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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고리-26화 (26/99)

26화

형이 묻자마자 다급히 대답했다.

“괜찮아요!”

또다시 키스의 기억이 되살아나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 반응을 본 형이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기분 나빴어? 키스는 꽤 자신 있었는데.”

“그건 아니지만…….”

말을 우물거리다가 결국 한숨과 함께 속내를 털어놓았다.

“기분 좋았어요. 기분 좋았는데… 형에게 굉장히 미안해서요.”

나 때문에 형이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억지로 키스를 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했다.

키스 자체는 정말 좋았다. 강지석을 떠올리고 아니고를 떠나, 예전에 겪었던 불쾌한 키스가 한 번에 떠내려갈 정도로 지독히 달콤했다.

그래서 더 겁이 났다. 나는 기분 좋은데, 정작 억지로 해야 했던 형은 나와의 키스가 너무 기분 나빴을까 봐. 약속한 게 있어서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뿐이고 실은 나와의 키스를 최악이라며 곱씹고 있는 게 아닐까.

불안하고 미안한 마음에 도저히 눈을 마주할 수가 없는데, 어째서인지 형은 작은 웃음을 흘렸다.

“우서야, 너 진짜 귀엽다.”

형의 편안한 얼굴에 미소가 번져 있는 걸 보고 나니 불안감의 덩어리가 금세 조각나서 사라지는 것 같았다.

“절 귀엽다고 하는 사람은 형과 강지석뿐일 거예요.”

왜 이 타이밍에 귀엽다는 말이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형의 분위기가 워낙 편해져서 조금 불퉁한 소리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작게 웃던 형이 그의 왼손을 들어 붉은 링을 보여주었다.

“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아봤어?”

“일단은요.”

“그럼 그 내용 중에 ‘스킨십’에 관한 부분, 기억해?”

형이 말하는 게 어느 부분인가 싶어서 머릿속의 링에 관련된 부분을 뒤지던 도중, 뒤늦게 알아챘다.

링의 상대와의 스킨십은 기분 좋은 편안함을 전해주며 그 깊이가 깊을수록 황홀에 가까운 기분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이는 숙면과도 관련된 부분이었지만 굳이 따지자면 섹스와 더 깊은 연관이 있었다.

거기까지 떠올리고 나니 또다시 얼굴에 열이 몰렸다. 적당히 접촉한 상태로 자는 것만 생각했지, 그 이외의 깊은 스킨십 같은 건 완전히 잊고 있었다.

형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링이 연결된 이상, 절대 기분 나쁠 일 없을걸.”

소리를 낮춰 속삭인 형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형이 뭘 하려는 건지 알고 있음에도 고개를 돌리거나 밀어내지 않았다.

“이번에도 날 지석이라고 생각해 봐.”

은밀한 속삭임이 내 머리를 채웠다.

어쩌면 시험해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 키스가 달콤했던 건 술에 절어있었기 때문인지, 강지석을 떠올려서인지, 아니면 링이 연결된 지건 형이 상대였기 때문인지 알고 싶었다.

형의 입술이 살포시 맞닿았다. 벌써 중독될 것 같은 단내가 입 안을 가득 채우는 것만 같다.

그와 함께 저 깊숙한 곳에서 기묘한 감각이 스멀거리며 올라왔다.

그것은 희미한 배덕감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의 형을 끌어안고 있다는 것. 상대에게 좋아하는 사람을 투영해 이용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링 때문이라며 애인도 아닌 사람과 키스하고 있다는 것.

스스로를 자책해야 할 것 같은 크나큰 크기의 배덕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그런데 왜, 그 배덕감이 주체 못 할 자극처럼 여겨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 * *

호텔에서 나와 집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0시 무렵이었다.

막상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 서서 머뭇거리던 나는 곧 도어록 자판에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기계음과 함께 문의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우서!”

문을 열자마자 들린 음성에 깜짝 놀랐다. 지금 시간이라면 강지석이 있을 곳은 헬스장일 텐데, 그는 버젓이 집에 있었다. 일부러 집에 없을 시간을 골라 돌아온 건데 낭패가 따로 없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복장이 집에서 입는 편한 옷이 아니라 어제 입었던 외출복이다. 마치 연락만 오면 언제든 뛰어나갈 수 있도록 옷도 갈아입지 않고 기다린 사람 같았다.

강지석이 여태까지 잠도 못 자고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못 한 채 날 기다려줬다는 것에 설렘을 넘어 가슴이 꽤 크게 뛰었다.

하지만 설렘은 아주 잠깐이었다.

성큼성큼 현관으로 다가온 강지석의 얼굴엔 평소와 달리 아무런 웃음기가 없었다. 잔뜩 화가 나서는 살벌한 눈으로 날 노려보던 그가 내 손목을 아프게 틀어쥐었다.

“윽! 야, 아파!”

“내가 얼마나 걱정했던 줄 알아?! 연락은 왜 안 되는데?!”

“배터리가 나가서……!”

“메시지 확인했던 거 다 알아! 확인했을 때 답장이라도 해줬으면 됐잖아!”

몰아치듯 다그치더니 내 손목을 강하게 끌고 거실로 향했다. 힘이 워낙 강해서 신발도 다 벗지 못하고 한 짝을 신은 채 맥없이 끌려갔다. 그러더니 소파에 던지듯 밀어 앉힌다.

“내 생각은 안 해?! 밤새워서 너 기다리면서 내가 얼마나……!”

위협적으로 윽박지르며 내려다보던 강지석이 돌연 움찔하며 말을 멈췄다. 몰아치는 그 때문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던 나는 뒤늦게 내 어깨가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친구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참 한심하고 우습지만, 솔직히 무서웠다.

강지석이 이렇게 내게 화를 내는 것도 처음이었고, 손목을 부러뜨릴 것처럼 배려 없이 잡은 것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무서웠던 건, 내가 강지석에게 미움받아버렸다는 사실이었다.

한심해.

너무 한심해서 말이 안 나온다.

고작 강지석이 왜 늦었냐며 몰아세운 것 가지고 벌벌 떨고 있다니.

고개를 숙인 채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지석에게 강하게 붙잡혔던 손목에도 힘이 가해지다 보니 아프게 아릿해졌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네가 왜 화를 내?’

내가 술을 왜 그렇게 마셔댔는데. 왜 들어오고 싶지 않았는데. 사실 화를 내고 싶은 건 난데…….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으면서 그동안 말도 안 하고 티도 내지 않았다. 차라리 티라도 내줬으면 이렇게 서럽지나 않지.

병신 같은 나는 강지석이 여자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실제로 그가 여자친구를 둔 적이 없었기에 막연히 안심하고 있었다. 평생 강지석의 이상형 같은 건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고, 둘 다 옆자리에 아무도 두지 않은 채 친구 상태로 평생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6년 전, 아니, 그 이전부터 좋아하던 여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상형이라며 서슴없이 말하던 사람이 허구의 이상이 아니라 실존하는 누군가를 지칭하는 거였다. 실제로 만난 강지석의 이상형은… 그와 잘 어울렸다.

화를 내기는 무슨.

내가 내 감정 하나 다스리지 못해서 혼자 무너지는 것뿐인데 강지석에게 화를 낼 자격이나 있을까.

‘씨발….’

자조 섞인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것 같아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치아가 입술 살을 파고드는 찌릿한 통증이 느껴진다.

그냥 내가 바보였던 것뿐이다. 주제도 모르고 나와 이어질 수 없는 친구를 오래도록 가슴에 담아온 내가 잘못된 거다. 언젠가 나타날 게 분명했던 ‘강지석이 좋아하는 사람’을 보자마자 여태껏 잘만 눌러오던 감정을 통제할 수 없게 된 게 문제였고, 빠르게 체념하지 못한 것도 문제였다.

너무 어렵고 힘들어도 그저 태연한 척하면 됐던 건데.

지금이라도 그러면 되는데, 시야가 흐려지는 것만은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우서야.”

강지석의 목소리가 한숨과 함께 누그러졌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살벌하고 무겁던 공기가 조금 나아졌다는 게 느껴졌다.

“나는 네가……. 하아…, 우서야, 잠깐 고개 좀 들어봐.”

말을 고르던 강지석이 내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탁-!

강지석의 손을 가차 없이 쳐냈다. 쳐낸 내 손이 얼얼할 정도이니 아마 그 역시 꽤 아플 거다.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강지석 입장에서는 걱정시킨 것에 대한 화를 좀 냈더니 눈물이나 질질 짜는 이해 못 할 놈으로 보일 거다. 그런 그가 뭘 이런 걸 가지고 우냐며 한소리 하기라도 한다면 가슴이 너무 답답하고 아파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강지석은 내쳐졌음에도 또다시 내게로 손을 뻗었다. 이번에도 얼굴을 잡지 못하게 손으로 쳐내려는데 허공에서 손목을 붙잡혀버렸다. 하필 잡힌 자리가 아까 강하게 압박당했던 손목이라, 이번엔 꽉 잡지 않았음에도 통증이 전해져서 어깨를 움츠렸다.

“우서야, 왜 자꾸……!”

“그 손 놔, 강지석.”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까 급하게 끌려들어 오느라 문이 닫히지 않았던 건지, 도어록의 기계음도 없이 지건 형이 들어와 있다.

물기 때문에 또렷이 보이지는 않지만, 형의 눈이 아까의 강지석만큼이나 무서워져 있다. 싸늘한 얼굴이 조금 위협적으로 일그러진 게 보였다.

형은 내 얼굴과 지석이 붙잡은 손을 바라보더니 큰 보폭으로 걸어들어왔다. 그러더니 내 손목을 쥔 지석의 손을 힘으로 단번에 떼어놓는다.

형은 붙잡혀 있던 내 손목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띠를 두르기라도 한 것처럼 붉게 변해버린 손목을 보던 형의 눈꼬리가 무섭게 치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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