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5. 신우서
차에서 잠들었다가 어렴풋이 눈을 떴을 땐 시야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푹신한 침대 위에 은은한 스탠드 빛이 비치는 천장이었는데, 술과 잠이 덜 깬 탓에 머리만큼이나 눈도 잘 돌아가지 않아서 여기가 어디인지 쉽게 파악할 수가 없었다.
졸려 죽겠는데 다시 잠이 들지 않는 기현상에 그제야 옆에 지건 형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더 자고 싶은 욕구 때문에 흐느적거리며 근처를 더듬어보지만 드넓은 침대에 누워있는 것은 나 혼자뿐이었다.
그러다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어서 이불을 슬쩍 걷어보니, 언제 갈아입은 건지 알몸에 샤워 가운 하나만 달랑 걸치고 있다. 벌어진 가운 사이로 속옷도 없이 휑한 아래쪽이 보여, 얼른 다리를 오므리고 이불을 팍 덮었다.
덕분에 조금 정신이 들어서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방은 척 보기에도 꽤 값비싼 호텔 같았다. 방은 물론이거니와 침대 또한 넓었고 저 너머로 보이는 불 켜진 욕실도 꽤 큼직한 사각 욕조가 엿보였다. 침대에 누운 채로 볼 수 있게 벽에 큼지막하게 걸린 벽걸이 TV나 창가 근처에 배치된 기다란 가죽 소파 또한 내가 상상치 못할 만큼 비쌀 게 분명했다.
그런데 향긋한 향이 나야 할 것 같은 고급스러운 호텔방에서 희미한 담배 냄새가 났다. 어디서 나는 건가 하고 고개를 돌리던 도중, 발코니와 연결된 창가 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운 상태로는 잘 보이지 않아서 상체를 드니 그제야 발코니에서 통화 중인 형의 뒷모습이 보였다. 손가락 사이에 타들어 가는 담배를 끼운 채 난간에 기대어 있는 형은 나와 같은 흰 가운을 입고 있었다.
얼핏 보이는 무표정한 형의 얼굴이 한없이 차가워져 있다. 입을 달싹일 때마다 흘러나오는 회색 연기마저 냉기가 돌 것 같다.
‘중요한 통화 중인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일 때마다 형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걸 보고 있다 보니 머릿속에 찬물이 확 끼얹어진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다. 나도 모르게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까 키…….’
차마 머릿속에서 단어를 완성하지 못한 채 형과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러자 얼굴과 입술 모두 뜨겁게 달아오른다.
“편하게 생각해. 지석이 상대로 하고 싶었던 거 다 해봐도 좋으니까 뭐든 요구해도 되고.”
충동적인 마음과 술기운이 섞여 무려 키스를 요구해버렸다. 키스를 예로 들어준 건 형이었지만, 좋다고 끄덕거린 건 엄연히 나였다.
“기분 좋을 거니까, 입 벌려.”
형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귀를 간질이는 것 같다. 비명이 되지 못한 소리가 목구멍을 맴돈다. 취하면 기억이 송두리째 날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던데 왜 난 멀쩡한 걸까.
‘형은 대체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 있는 거지?’
형도 술을 마시긴 했어도 딱히 취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너무 멀쩡했는데, 어떻게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선뜻 키스할 수 있었는지 의아할 정도다.
형한테 너무 미안했다. 계약 자체가 그렇다곤 하지만 형을 이용할 생각은 없었는데, 이번에 아예 다른 사람 대용품으로 삼아버렸다. 친동생을 겹쳐 보며 입을 맞춘 날 형이 속으로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막 일어났을 때는 두통도 없었는데 기억을 더듬으면 더듬을수록 숙취가 올라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머리가 아파졌다.
그때, 발코니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우서야, 괜찮아?”
걱정이 담긴 놀란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자 바로 앞에 다가와 있는 형과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굳어 있으니 형이 눈가를 찌푸리며 내 양어깨를 손으로 감싸준다.
“머리 아파? 약 사다 줄까?”
형의 급한 물음에 입만 달싹거렸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는데, 형은 사람 마음도 모르고 내 이마에 손을 얹어주었다. 바깥바람을 쐬면서 차가워진 손바닥이 이마의 열기를 기분 좋게 식혀준다.
“열이 있긴 한데 어디가 안 좋은 건지, 아니면 술 때문인지 모르겠네. 또 아픈 데 있어?”
형은 휴대폰을 내려놓은 채 두 손으로 내 볼을 감쌌다. 화끈하게 달아올라 있던 볼이 금세 가라앉는 느낌은 꽤 기분이 좋았다.
“괜찮아요. 그냥 아직 술기운이 덜 빠진 것뿐이에요.”
그것과 별개로 도저히 형과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볼을 감싼 손을 조심스레 떼어내고서 눈을 굴렸다. 그런 내 시선이 형의 휴대폰에 닿았다. 액정에 뜬 ‘AM 03:32’를 보며 의아해했다.
“새벽 3시 반에 누구와 통화를…….”
별생각 없이 말을 꺼내다가 입을 다물었다. 형의 사생활에 관해 묻거나 간섭할 자격이 없음에도 말을 돌린답시고 통화 상대를 물어버렸다.
죄송하다고 말하려는데 형이 선뜻 대답해준다.
“내일 미팅하기로 한 해외 거래처 쪽인데, 문제가 생겨서 급히 다른 날로 미뤄졌어.”
아무리 해외 쪽이라도 형을 고려하지 않은 새벽 통화에 조금 불만이 생겼다. 규모는 작아도 업계에서 인정받는 앱 개발 회사의 대표에게 좀 너무한 것 아닌가. 마음 같아서는 불퉁한 소리를 내고 싶었으나 막상 당사자인 형이 주말 동안 푹 쉴 수 있다며 기분 좋은 미소를 걸고 있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형이 휴대폰을 침대 옆 협탁에 올려두는 것을 보다가 뒤늦게 내 휴대폰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혹시 제 휴대폰 보셨어요?”
형은 곧바로 저 멀리에 있는 책상 위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기다란 선의 충전기가 연결된 내 휴대폰이 올려져 있었다.
“배터리가 다 되었더라고.”
그럴 만도 했다. 내가 잠든 와중에도 강지석이 계속 메시지를 보내고 전화를 걸어댔겠지.
그럼 혹시 형이 연락을 받아버린 건 아닐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지석의 연락이었으니 대신 전화를 받아서 상황을 설명해줬을 수도 있다.
일부러 잠깐이나마 피하고 싶어서 연락을 받지 않았던 건데…….
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더니 형이 흐트러진 내 앞머리와 볼을 상냥하게 쓰다듬어준다.
“지석이한테 계속 연락 오던데, 받기 싫은 것 같아서 일부러 안 받았어.”
나도 모르게 형을 빤히 바라보았다.
형은 가끔 이상하다. 형과 함께 있다 보면 내가 얼굴에 뭘 원하는지 직접 써 붙이고 다니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도 들었다. 그만큼 형은 내가 뭘 원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쉽게 알아채 준다. 둔한 강지석과는… 달랐다.
원치 않게 강지석을 떠올리며 이불을 그러쥐는데, 형이 침대에 올라 날 바르게 눕혀주었다.
“전화 받느라 떨어져 있어서 미안해. 다시 자자.”
형은 이불을 끌어 목까지 꼼꼼히 덮어주고는 허리를 감아 당겨 끌어안았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의외로 꺼려진다거나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이게 형이라서인지, 아니면 강지석과 같은 느낌이라서 그러는지 모르겠다. 편안한 기분과 함께 가슴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그리 싫지 않았다.
누워서 나를 마주 보고 있던 형이 강지석처럼 눈웃음을 보였다.
“불편하면 손만 잡고 잘게.”
막상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불편하다기보다는 이대로 푹 자고 싶을 정도로 좋은 느낌이다.
“…안 불편해요.”
“그럼 이건?”
형의 팔에 더한 힘이 가해져 몸이 완전히 밀착했다. 형과 내 다리가 자연스레 얽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난 베개가 아니라 형의 팔을 베고 있었고, 맞닿은 가슴을 통해 서로의 다소 빠른 박동이 오고 간다.
“신체접촉 비율이 높을수록 수면 후의 컨디션도 더 좋아진다고 들었어. 어쩌면 숙취까지 사라질지도 몰라.”
형이 내 등을 균일하게 토닥여준다.
“술 많이 마신 날은 숙취 심하다고 들었는데, 조금이라도 가라앉힐 방법이 있으면 해 봐야지 않겠어?”
형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나 밀착해서 자는 건 조금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단순히 생각에 지나지 않았다. 벌써 마음이 편해지고 잠이 솔솔 오기 시작한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형에게 물었다.
“형은 이렇게 붙어 자도 괜찮아요?”
“응. 나도 꽤 기분 좋거든. 푹 잘 수 있을 것 같아.”
솔직하게 대답한 형에게 한 박자 머뭇거리다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저와 키스…했던 것도 괜찮았어요?”
물어놓고 후회했다. 차라리 잊은 척할 걸 왜 굳이 입 밖으로 꺼내서는.
등을 토닥이던 형의 손이 어느새 멈춰있었다. 차마 형의 얼굴을 올려다볼 수가 없어서 슬쩍 시선을 피했다.
“넌?”
짧은 되물음에 어깨가 떨렸다.
“넌 어땠는데?”
“…….”
대답할 수가 없다. 형에게 이런 질문을 받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기에 입을 꾹 닫은 채 눈만 내리깔고 있었다.
그런 내 턱을 형이 슬쩍 들어 올린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올라가 형과 눈이 마주쳤다.
“모르겠으면 다시 해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