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딱 필요한 만큼 잘 듣고 갔겠구나 생각하며 커튼 사이에서 눈을 떼는데.
“말 돌리지 마, 형.”
어깨에 지석의 손이 얹어졌다. 그뿐 아니라 꽤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의 강한 압박감이 가해진다.
“지금 뭐 하는 거냐, 강지석?”
“만약에 내 예상이 맞는다면…….”
살벌하게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열더니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내 어깨를 으스러뜨릴 것처럼 손에 한껏 힘을 준다.
“언제든 우서 데리고 나갈 거야.”
누가? 네가? 감히?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 눈에서 살기에 가까운 흉흉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을 거라는 걸. 그럼에도 강지석의 눈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난 경고했어, 형.”
강지석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가 꽉 쥐었던 어깨가 아직도 얼얼하다. 헬스장을 밥 먹듯이 다니던 게 확실히 효과가 있었던 듯, 악력이 상당하다.
뒤를 돌아 베란다를 나가려는 강지석의 등을 향해 물었다.
“그건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하는 경고냐?”
여전히 화를 억누르는 것처럼 눈가에 힘을 주고 있던 지석이 어깨너머로 나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그거 말고 뭐가 있는데?”
돌아보는 눈동자를 분석하듯 응시했다.
한동안 그렇게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난간에 올려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만약 내가 여태까지와 달리 우서한테 진심이 되면 어떻게 할래?”
이미 진심이었고 링이 있는 이상 절대 떨어질 수 없었지만, ‘만약’이라는 말을 붙여 물었다. 그럼에도 지석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안 돼.”
고개를 돌린 지석이 베란다 문의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우서는… 절대 안 돼.”
강지석은 그 말을 남긴 채 베란다를 나섰다.
찬바람만 가득한 고요함 속에 홀로 남은 채 난간에 등을 기댔다.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말없이 불을 붙였다. 새 필터를 거쳐 폐부로 파고든 담배 연기가 답답해진 머릿속을 조금이나마 맑게 해주었다.
‘강지석….’
대화를 통해 파악한 대로라면 상당히 난감했다. 이번만은 제 감이 틀렸기를 바라지만, 애석하게도 정확할 거라는 생각만 든다. 그 어떤 때보다 강한 위기감이 찾아왔다.
‘아무래도 넋 놓고 있으면 안 되겠는데.’
담배를 하나 다 태울 동안 머릿속에는 여전히 지석과 나눈 대화가 몇 번이나 재생되고 있었다.
찬바람에 담배 연기를 좀 흘려보낸 뒤, 거실로 나와 우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방으로 와. 위로해줄게.]
눈이 마주쳤으니 내가 알아채고 있었다는 걸 우서 역시 알고 있을 거다. 예상대로 우서는 괜찮은 척을 했다.
[저 괜찮아요. 금방 정리하고 갈게요.]
괜찮기는. 가슴 아파서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웅크려 있을 게 뻔한데.
우서의 방문 앞에 섰다. 한동안 원룸에서만 살았던 탓에 방문을 잠가두는 버릇이 들지 않은 것 같았지만, 그래도 직접 열지 않고 문자를 보냈다.
[문 열어줘.]
굳이 직접 문을 열도록 하는 것은 우서를 안심시키고 그가 내게 마음을 기댈 수 있게 만들 방법의 하나였다. 문이든 마음이든, 직접 열어주지 않는다면 억지로 들어가지 않겠다는 조심스러움이 쌓이고 쌓일수록, 우서는 내가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알아서 열어줄 것이다.
머뭇거리며 문을 열어준 우서의 얼굴은 얼핏 보기에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와 눈을 마주한 순간에 버릇처럼 눈을 내리깔며 어깨를 움츠렸다. 내리깐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는 거로 보아, 확실히 적잖은 타격을 입은 것 같았다.
우서를 끌고 내 방으로 와서 끌어안아 재웠다. 일일이 말로 위로해줄 수도 있었지만, 그러는 것보다는 말없이 토닥이며 옆자리를 지켜주는 게 더 효과가 좋을 거다. 소심하고 생각이 많은 것에 비해 우서는 겉으로 티를 내는 감정 표현이 현저히 적은 편이었다. 그것만 보아도 티 나지 않는 자존심 때문에 싫어도 표정이나 분위기를 나름대로 조절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말없이 누워있던 우서의 숨소리가 점차 고르게 바뀌어 갔다.
“잘 자, 우서야.”
우서는 대답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숨소리가 균일해진 걸 확인한 후, 품에 있는 그의 머리에 얼굴을 묻고 입을 맞췄다.
이대로 계속 힘들어해 주기를.
그래야 내가 혼란한 네 가슴 속을 파고들 수 있을 테니까.
* * *
기회는 금세 찾아왔다.
술 때문인지 표정이 조금 선명해진 우서가 날 강지석으로 착각하며 욕을 섞었다. 그 모습이 생소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런 감정적인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라서 꽤 흥미가 돌았다.
“취하면 과격해지는구나.”
그 말을 듣고서야 날 알아본 우서가 잔뜩 당황한 표정으로 사과를 했다. 귀엽기는.
강지석의 ‘친구들하고 술 마시다가 늦을 거니까 기다리지 마’라는 메시지를 받고도 여기까지 와서 대기한 보람이 있었다.
일정도 없으면서 내일 일이 있다는 핑계로 잠이 필요한 척했다. 미안해하던 우서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조심스럽게 같이 술 한 잔만 함께 마셔달라는 요청을 했다. 그런 그를 바로 데려가 독한 술 몇 잔을 사주었다. 조금씩 눈이 풀려갈수록 우서의 속에 있던 말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벌써 틈이 생겼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우서가 원하는 것처럼 강지석을 닮은 미소로 자상하게 다가가 자연스럽게 선을 넘었다. 그러고선 내가 하는 행위가 그저 우리의 계약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에 불과한 척했다. 몽롱한 얼굴의 우서는 갈등하는 듯하다가 결국 본능이 말하는 걸 입에 담았다.
“키스… 해보고 싶어요.”
우서와의 키스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달콤했다. 입을 맞추면 맞출수록 더 깊이 탐하고 싶어지고, 안을 엉망으로 헤집어주고 싶어졌다. 이제껏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중독성 강한 키스는 그와의 숙면만큼이나 아득히 기분 좋은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닌 다른 놈이 먼저 이 입술에 닿았었다는 사실이 내 열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어떤 놈인지 모르겠지만, 우서에게 고백했다던 그 새끼가 눈앞에 있다면 당장이라도 밟아버렸을 것 같다.
우서는 키스를 했던 상대가 그뿐인 척했다. 하지만 난 그가 지석에게 몰래 입을 맞췄던 걸 알고 있었다. 그때를 떠올리니 속에서 뜨거운 뭔가가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
“읍, 하…. 형, 잠깐만……!”
키스에 익숙하지 않은 우서가 고개를 돌려 날 밀어내려 했다.
밀어내지 마.
날 밀어내지 마, 우서야.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키스하고 있는 건 난데, 밀려나기 싫어서 강지석인 척 억지로 눈가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형이 아니라 지석이야.”
그러니까 긴장하지 마.
그때 네가 지석이에게 스스로 했던 키스를 내게 해봐.
입술을 부드럽게 핥아주며 재차 속삭였다.
“넌 강지석과 키스하고 있는 거야.”
몽롱한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 눈동자에 비친 건 분명히 나였고 그걸 우서 역시 알고 있을 테지만, 선뜻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날 통해 떠오르는 강지석을.
가슴이 아릿해졌다. 내게 타인을 투영해 봐달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것 자체가 싫지만, 그래도 그가 이 한순간만은 날 강지석 바라보듯 했으면 좋겠다.
모순이라는 걸 알고 있다.
우서가 강지석이 아니라 날 또렷이 봐줬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일일이 의식해서 거리를 둘 걸 알기에 싫어도 지석이를 이용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우서의 빈틈을 재차 넓히고 싶었다. 언제든 들락날락할 수 있도록.
최면과도 같은 내 말은 술에 취한 우서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과도하게 긴장해 있던 몸이 점차 나른하게 풀어지고 뻣뻣하던 혀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이 비벼져 유연해졌다. 스스로 얕은 신음을 흘리며 입술을 문지르고 뜨거워진 작은 혀로 내게 얽혀왔다.
달콤하지만 씁쓸한 키스였다. 익숙하지 않은 키스와 술의 열기로 인해 숨이 모자란 우서가 내게로 쓰러졌다. 더불어 신체접촉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졸음까지 더해져, 그의 파르르 떨리던 눈이 점차 감겨 갔다.
잠에 빠져가는 우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낮게 중얼거렸다.
“빨리 날 봐줘, 우서야.”
완전히 기대어 늘어진 우서를 의자에 바르게 눕히고, 몸을 기울여 그의 입술에 다시금 다가갔다. 타액이 묻어난 입술이 붉게 물든 걸 보고 있자니 꾹 눌러둔 감정이 자꾸만 밖으로 터져 나오려 한다.
“링으로 이어진 이상, 어차피 넌 내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엄지로 우서의 부드러운 입술을 눌러 매만졌다. 자연스레 벌어진 입술 사이로 술기운을 담은 안정적인 숨소리가 흘러나온다. 매번 긴장을 완전히 내려놓지 못한 채 잠들기 일쑤였던 그가, 이젠 내 앞에서 안심한 듯 편안히 잠들어 있다.
잠든 우서의 얼굴을 눈에 선명히 새겨 넣었다. 언제나 그가 잠들고 나면 습관처럼 하던 것이었는데, 오늘만큼은 느낌이 더 강렬하고 새롭다.
숨을 불어넣듯 천천히 입술을 맞대며 그의 허벅지 위에 얹어져 있던 왼손을 내 왼손으로 깍지껴 잡았다. 뒤이어 힘없이 얽힌 그의 손가락 중 붉은 링이 새겨진 약지에 키스하듯 입을 맞추며 얇은 살결을 빨아들였다.
마치 두꺼운 붉은 족쇄를 차고 있는 것처럼 링 주변이 붉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