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내 말에 역시나 눈이 동그래진다.
“대학? 거긴 왜?”
“가서 내 동생이랑 잠깐 어울려주다가 와.”
“지석이? 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내가 이상한 거야?”
결제를 하고 돌아온 종업원에게 카드를 받고서 여전히 모르겠다는 얼굴의 민아를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집에 돌아와 술에 취한 척 우서의 방으로 향했다. 여동생이 쓰던 방은 어느새 우서의 체취가 배어 있었고, 곳곳엔 그의 숨결이 녹아있는 것만 같았다.
착하게도 그냥 재우려 하지 않고 답답해 보이는 곳들을 정성껏 풀어주는 우서를 보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틈틈이 지석이와 같은 행동을 하는 게 중요했다.
지석이처럼 웃고, 지석이처럼 쓰다듬어주고, 지석이처럼 다정하게 대한다. 우서에게는 이걸 기본적으로 연기해줘야 한다. 그래야 언제든 긴장하지 않고 얌전히 내 손을 받아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먼저 내 손을 갈구하도록 점차 의지하게 만들어야 했다.
내 손에 얼굴을 기댄 채 잠든 우서를 안아 들고서 침대에 바르게 눕혔다. 한동안 깊이 잠든 우서를 내려다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잔잔한 것보다는 약간의 자극을 주는 편이 더 빠른 변화를 일으킨다.
한민아는 우서에게 있어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중요한 자극이 될 것이다.
* * *
“형, 대체 뭐야?”
지석에게 베란다로 불려 나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드는데 녀석이 날 닮은 차가운 눈으로 노려본다. 서늘할 정도로 표정 없는 얼굴에 눈꼬리를 날카롭게 치켜올리고 있으니, 확실히 날 닮긴 제대로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태연하게 대꾸하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지석이 계속 불러도 일을 핑계로 시간을 끌었던 덕분에 어느덧 자정을 넘어 30분이 다 되어있었다.
‘슬슬 확인하러 올 때가 됐는데.’
기왕 자극을 주는 거, 하려면 제대로 해야 했기에 일부러 시간을 맞춰 움직였다. 예상대로라면 이쯤 해서 우서의 방문이 열려야 할 텐데.
“민아 누나한테 나 끌고 다니라고 시켰잖아.”
지석의 말에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바라보았다.
설마 한민아가 입을 열었나? 입 무거운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을 텐데.
내 생각을 알아챘는지, 지석이 알아서 해명했다.
“우연히 민아 누나한테 보낸 형 답장을 봤어.”
아마도 내게 인증 차원에서 보낸 두 사람의 다정한 사진과 형식적인 ‘너도 와’라는 메시지에 대한 답장으로 ‘최대한 늦게까지 끌고 다녀’라는 메시지를 보낸 걸 말하는 것 같았다. 지석은 둔한 녀석이긴 하나 이상한 데서 감이 좋은 녀석이라서, 가끔 이렇게 중요한 부분을 잡아내곤 한다.
어차피 지석이 알아채든 말든, 그다지 상관은 없었다.
“그래서?”
“…무슨 생각이었는데? 내가 민아 누나한테 끌려다녀서 형이 좋을 게 뭐가 있어?”
“꼭 내가 좋을 게 있어야 하냐? 예전부터 한민아라면 눈 돌아가던 녀석이라 오랜만에 잘 좀 놀고 왔으면 하는 의도였는데?”
“장난치지 마!”
지석이 웬일로 언성을 높였다.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켜려다가 손을 멈췄다.
“강지석.”
싸늘한 눈을 들어 지석을 노려보았다.
“많이 컸네. 나한테 언성도 높이고.”
낮은 목소리에 지석의 어깨가 한차례 움찔했다. 하지만 물러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형이 의도적으로 날 떼어내고 우서랑 있으려고 한 것처럼 보이는 건 내 착각이야?”
“그래.”
“형이 오늘따라 링의 상대까지 버리고 집에 일찍 들어온 것도?”
“버렸다는 표현이 좀 그렇네. 시간이 안 맞았을 뿐이야.”
“거짓말하지 마. 안 만나면 하루를 꼬박 새우게 되는 건데, 형이든 그쪽이든 그렇게 쉽게 약속을 취소할 수 있겠어?”
사실 그런 약속 자체가 없었으니 내겐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지만, 링의 상대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지석으로서는 오늘 일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던가 보다. 혼자 있을 우서를 위해 링의 상대까지 버려가면서 일찍 집으로 돌아온 거라고.
담배에 불을 붙여 깊이 빨아들였다. 매캐한 연기가 폐부를 채우다가 곧 숨을 타고 서늘한 밤바람 사이로 흩어진다.
“형.”
지석이 흔들리는 눈으로 미간을 모았다. 날카롭게 치켜 올라갔던 눈매가 녀석의 목소리만큼이나 불안한 듯 내려갔다.
“우서는 안 돼.”
손가락에 끼운 담배를 한 번 더 깊이 빨아들이려다가 멈칫했다. 지석이 부탁한다며 날 설득하기 시작했다.
“우서가 형 취향이라는 건 알아. 하지만 내 친구잖아. 그 녀석까지 건드릴 셈이야?”
그제야 지석이 뭘 생각하는지 알만했다.
근 3년간, 연애에 무관심했던 과거와 달리 난 그동안 꽤 많은 애인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남자였으며 마른 체구에 적당히 키가 있는 얌전한 모범생 스타일의 이들이었고, 나이 차이가 꽤 되는 연하뿐이었다.
그때 당시는 그게 그저 내 취향인 줄 알았다.
우서를 다시 만나고 그와 링으로 이어져 있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작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내 취향 자체가 신우서였다는 걸 외면하고 3년을 보냈다는 사실이 웃기지 않을 수가 없다. 우서 외에는 그저 그를 닮은 껍데기들을 줄지어 세워둔 것에 지나지 않았는데.
스스로가 한심해서 자조하는데, 지석은 그 웃음을 다른 의미로 해석했다.
“우서 건드리면 가만히 안 둬, 형.”
지석의 눈꼬리가 다시금 높이 치켜 올라갔다.
“걔는 내버려 둬. 다른 애인들처럼 적당히 상대하다가 버려도 될 정도로 함부로 할 애 아니야.”
“과민반응하지 마.”
지석과 똑같이 내 눈꼬리 역시 위협적으로 치켜 올라갔다.
“어쩌다 집에 일찍 들어온 것뿐이고 한민아한테 보낸 메시지도 별거 아니었어. 거기에 우서를 끼워 넣는 건 너무 앞서나간 거 아니냐?”
그렇게 말하며 바람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려 담배 연기를 흘려보냈다. 그러다 거실의 약간 벌어진 커튼 사이로, 우서의 방에서 흘러나온 빛이 바닥에 드리워진 걸 깨달았다.
그 빛과 함께 보이는 어렴풋한 사람 그림자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렸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거였으면 좋겠어. 난 원래 둔하니까 바보같이 잘못 짚은 거였으면……!”
“하긴, 내가 우서를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긴 해.”
마음에 들어 하는 것뿐일까. 지금은 그 녀석 생각에 머리가 꽉 차서 터질 지경인데.
지석의 말을 끊으며 보란 듯이 담배를 입에 물고서 그에게 거만한 미소를 내보였다.
“3년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내 눈엔 너무 귀엽거든.”
지석의 얼굴이 긴장으로 일그러졌다. 눈동자만 돌려 커튼 사이로 보이는 작은 빛 속에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발걸음을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우서를 집에 들인 게 단순히 네 친구라서였던 건 아닌 것 같네.”
“형!”
지석이 두 주먹을 꽉 쥔 채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정확히 무슨 뜻이야? 대체 뭘 생각하는 건데?”
대답 대신 반쯤 피운 담배를 입에 물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빠르게 타들어 가는 담배만큼이나 지석의 얼굴 역시 빠르게 초조해져 갔다.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입구 쪽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관심 끄고 이제 그만 들어가 자라.”
그러자 지석이 앞길을 막아서며 눈가를 찌푸렸다.
“대답해주기 전까진 못 가.”
“작작해, 강지석. 뭘 자꾸 대답해 달래.”
“그러니까 난 형이 무슨 생각인지 알고 싶은 거라니까?”
지석의 짜증 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슬쩍 시선을 옮겼다. 커튼 사이로 얼핏 우서의 발끝이 보인다. 저 정도면 아마 우리의 대화 정도는 충분히 들릴 것이다.
“생각이랄 게 있나. 넌 한민아랑 잘만 놀다 들어왔으면서 왜 나한테 성질부리냐?”
일부러 한민아를 끄집어냈다. 지석의 얼굴이 한층 답답한 듯 일그러진다.
“내가 지금 가만히 있게 생겼냐고!”
귓가가 아릴 정도로 지석이 큰 소리를 냈다. 우서의 실루엣이 움찔하는 것을 보며 나 역시 지석만큼이나 험악한 눈을 했다.
“목소리 낮춰, 강지석.”
아직 우서가 더 들어야 할 얘기가 있는데, 혹시라도 싸우는 줄 알고 말리려고 난입하거나 방으로 돌아가 버리면 아까워진다.
씩씩대던 지석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숨을 고르는 걸 보며 담배를 한 번 더 흡입했다.
“옛날부터 한민아라면 그저 좋다고 따라다녔잖아. 간 김에 원 없이 놀다 오지 그랬어.”
지석의 미간이 의아하게 찌푸려졌다. 우서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한민아 얘기를 섞어 말하니, 지석의 눈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냐며 따지는 것처럼 보였다. 지석이 다른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선수 쳐서 뒷말을 이었다.
“아니면, 이제 한민아 안 좋아하냐?”
“뭐?”
지석의 얼굴이 또다시 의문에 휩싸였다.
“네 이상형이라며.”
대답을 재촉하듯 말하자, 지석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그러더니 이내 내가 원하던 대답을 내놓는다.
“좋아해.”
됐다.
“아직도 민아 누나 좋아해, 나.”
예나 지금이나 강지석의 이상형은 한민아였다. 그녀가 유학을 갈 때 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할 정도로 좋아했고 이날 이때까지도 한민아 외엔 다른 여자를 쳐다본 적도 없다.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강지석이 한민아를 좋아‘했’고 그녀가 첫사랑인 건 맞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어린 날의 일이었을 뿐이다. 지금은 좋은 누나로서 바라보면 모를까, 사랑에 가까운 감정은 전혀 아니었다. 그건 강지석이 자기 입으로 스스로 말하기도 했었다.
지석은 예전에 내게 했던 ‘아직도 좋아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누나로서일 뿐이다’라는 말을 되풀이할 것처럼 재차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래.”
일부러 지석의 말을 막으며 난간에 몸을 기댔다. 커튼의 벌어진 틈새 사이로 어둠 속에서 떨고 있는 우서와 눈이 마주쳤다.
“그거면 됐어.”
주춤주춤 물러나던 우서가 이내 몸을 완전히 돌려 제 방으로 돌아갔다. 바닥에 드리워진 우서의 방 불빛이 점차 얇아지다가 곧 완전히 사그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