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강지석은 평소엔 자주 맹하게 굴면서 가끔 이렇게 집요하게 굴 때가 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보통 신우서와 관련된 경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경계심이 올라오려 했다. 하지만 우서를 사이에 두고 경계하는 빛을 보였다간 이상한 데서 예리한 지석이 넘어오지 않을 게 뻔했다.
여전히 제대로 보지도 않는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태평하게 채널만 거듭 돌려대었다.
“싫으면 관두던가. 요즘 알바까지 하느라 힘들어 보인다기에 월세라도 안 나가게 해주려고 했더니.”
“…….”
함께 살지 않아도 아쉬울 건 없다는 듯 말하고 나니 지석이 그제야 눈을 굴리며 고민을 한다.
지석이 자주 입에 담던 우서의 이야기 중에는 그가 최근에 알바를 시작하는 바람에 매일 피곤해 보인다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사실 그 또한 의도한 것이었다.
우서의 손에도 링이 있는 걸 모르는 지석은 그가 저녁부터 밤까지 몇 시간 동안 알바를 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는 나와 함께하는 시간에 대해 그렇게 둘러대자고 말해둔 탓이다.
링 때문에라도 남몰래 매일 함께 자기로 한 날, 우서에게는 동생들과 함께 사는 만큼 쓸데없는 걱정을 끼치는 걸 피하고자 외박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더불어 그와 시간을 맞추기 위해 저녁에 잠드는 거라서, 그 무렵에 처리해야 할 일들을 몰아서 새벽에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로 인해 자정이 되기 전까지 자다가 헤어지는 시간이라고 해봐야 고작 서너 시간 정도에 불과했고, 이후로는 더 자고 싶더라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서로 떨어져 있었기에 잠을 잘 수 없으니 당연히 날을 새게 된다. 그런 상태로 각자의 일을 하다 보면 당연히 얼굴의 피로감이 사라질 날이 없었다.
피로감이 밴 우서의 얼굴을 매일 마주하다 보면 강지석 성격에 그를 걱정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 증거로, 최근에는 지석이 걱정 어린 한숨을 내보였다 하면 죄다 우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할 수만 있다면 대신 알바를 하거나 일을 그만두라고 하고 싶은데, 말은 안 해도 생활비가 모자란 게 틀림없어서 무작정 그러라고 할 수도 없다고 한다.
아마 내 제안을 받은 지금쯤, 지석의 머릿속에는 피로한 얼굴의 우서가 둥둥 떠다닐 터였다. 어차피 그가 고개를 끄덕일 걸 알기에, 난 돌아올 대답을 기다리며 이미 지나간 뉴스 화면으로 다시 채널을 맞췄다.
단순히 우서와 함께 살기 위해서 지연에게 집을 얻어주고 지석이 제 계획에 넘어오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우서를 직접 설득해서 그의 원룸이든 새집이든 둘만의 공간을 만드는 게 더 쉽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우서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
모든 걸 필사적으로 숨겨야 하는 상대. 모든 걸 거리낌 없이 말해도 될 상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공간에 머물게 된다면 싫어도 둘을 비교할 수밖에 없어진다.
전자의 사람과 함께 하면 숨기는 게 많기에 마음이 불편하고 정신적으로 지쳐버리고 만다. 반대로 후자의 사람과 함께라면 뭐든 털어놓을 수 있다 보니 마음에 안정이 찾아오고 저도 모르게 의지하게 된다. 이는 전자와 후자의 인간이 함께하는 공간에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빠르게 두드러진다.
설령 전자의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 하더라도.
지석만 바라보는 그 녀석이 날 의지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려면 우서의 감정에 다양한 변수가 일어나도록 판을 깔아야 했다.
세 사람의 동거는 그걸 위한 가장 기초적인 포석이었다.
* * *
우서는 길게 꼬실 필요도 없이 동거를 승낙했다. 동거하지 않는다면 여태처럼 호텔비나 저녁 식사 비용이 매일 내 주머니에서 나갈 테니, 그로서는 날 위해서라도 집에 들어와서 살 수밖에 없었다. 여태껏 일부러 부담을 느끼게 한 덕에 일이 빠르게 풀렸다.
우서가 이사를 오는 당일.
마음 같아서는 일찍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지석은 여전히 내가 저녁부터 밤까지 링의 상대와 잠을 자고 들어오는 줄 알고 있었다. 우서가 집에 온 시점부터 일찍 퇴근한 채 멀쩡히 지낸다면 당연히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오늘 저녁은 다른 약속을 잡았다.
“여기야, 지건아.”
미리 바에 와 있던 한민아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해외에서 6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지 근 2주가 되어가는데, 그간 링과 우서의 일로 바빠서 이제야 시간을 낼 수 있었다.
말없이 눈짓으로 인사하며 그녀의 옆에 앉자마자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야, 넌 어떻게 하나도 변하지를 않냐? 3년 전이나 지금이나 얼굴에서 냉기 날리는 건 똑같네.”
민아의 불퉁한 목소리를 들어주며 픽 웃었다. 차라리 그렇게 비웃듯이 웃기라도 하라며 입을 삐죽거린다.
민아가 유학을 간 건 6년 전이었지만, 그 후 재회한 건 지금의 회사를 설립하기 전에 해외의 갖은 컨퍼런스와 세미나를 돌아다녔던 3년 전쯤이었다. 그때 오랜만에 만났던 한민아는 여전히 쾌활했지만, 난 상당히 많이 변해있던 상태였다. 하루 내내 그녀가 석연찮은 표정으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물었던 그 날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 날 이후부터 메일이나 전화로 자주 교류를 하고 있었다. 한민아 딴에는 내가 걱정되었던 터라 온 신경을 쏟아준 거겠지만, 난 그저 해외의 정보들을 쉽게 수집하기 위해 그녀를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한민아 역시 알고 있었고 딱히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기업을 세우는 데에 목표를 두고 있는 사람이라, 그 정도의 이용은 충분히 이해하는 것 같았다.
바에 나란히 앉아 몇 잔의 위스키를 들이켰다. 둘 다 주량이 워낙 많다 보니 남들 같았으면 벌써 눈이 풀렸을 정도로 마셨는데도 멀쩡했다.
대화는 대부분 한민아가 주도했다. 오랜만에 만났다고는 하나, 나는 그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것에 불과한지라 틈틈이 시간을 확인하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고개를 들어 시간을 보니 벌써 자정이 다 되어있다.
‘지석이는 슬슬 잘 시간인가.’
보통 지석은 아무리 늦어도 자정쯤에는 곯아떨어진다. 그러고 나면 우서는 날 기다리느라 방에서 조용히 공부나 하고 있겠지.
책상에 앉아 모범생답게 공부를 하며 날 기다리고 있을 우서를 떠올리니 꽤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 걔가…….”
입을 떼던 민아가 말을 멈췄다. 그러더니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뜬다.
“강지건, 너 좀 이상하다?”
“뭐가?”
민아가 고개를 기울이며 노골적으로 내 얼굴을 훑어본다.
“여태 표정 없는 돌덩어리랑 대화하는 기분이었는데, 방금 분위기가 좀 이상했거든? 무슨 생각 했어?”
한민아도 예리한 구석이 있네.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며 몇 잔째인지 모를 위스키 잔을 입에 가져갔다.
“내 거 생각.”
왼손 약지의 붉은 링을 내려다보며 반쯤 남아 있던 위스키를 단번에 마셔버렸다.
한민아는 내 대답이 놀라웠던 모양이다. 눈을 크게 뜬 것뿐만 아니라 쉴 새 없이 반짝여댄다.
“뭐야, 지금 애인하고 잘 되어가나 보다? 어떤 사람인데?”
“애인 아니야.”
“뭐?”
민아가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한다.
“물건을 말하는 것도 아닐 테고, 애인도 아니라면 대체 뭔데?”
재차 묻는 말에 굳이 ‘내 거’에 대한 부연설명을 답해주진 않았다. 민아는 자꾸만 궁금한지 꽤 집요하게 캐물었지만 내 입을 통해 흘러나온 건 신우서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
“입사 준비 중인 곳이 타일러 컴퍼니였지?”
“맞아.”
타일러 컴퍼니는 미국에 본사를 둔 애플리케이션 개발 전문 회사로,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큰 회사였다. 그 회사의 한국지부 역시 IT 강국답게 명성이 드높았는데, 한민아는 유학경험을 바탕으로 그곳에 입사하고자 준비 중이었다.
별다른 말도 하지 않았는데 민아의 눈이 음흉하게 휘어졌다.
“뭐야. 혹시 나, 친구 덕 좀 보는 건가?”
위스키 잔을 흔들어 보인 민아가 ‘오늘 술값은 내게 맡겨’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빈 잔 대신 바텐더에게 새로이 받아든 위스키를 단번에 마셔버리며 입을 열었다.
“이틀 뒤에 천안에서 있을 AI 쇼케이스에 타일러 컴퍼니 한국지부 개발 이사가 참여할 예정이야. 예고 없이 찾아가는 거라서 대외적으로 드러나진 않을 테니까 미리 얼굴 익혀둬.”
다 마신 위스키잔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금융과 AI 쪽에 관심 많은 양반이니까 그쪽 관련 아이디어나 애플리케이션 밑밥을 깔면 반응이 올 거야. 눈도장을 찍고 못 찍고는 밑밥의 질에 따라 다르니까 그건 네가 알아서 하고.”
“웬일이야? 나한테 소스를 다 주고.”
민아가 따라 일어나며 카드를 꺼내 들었다. 꾸벅 인사하며 다가온 종업원에게 그 카드를 건네려던 민아의 손을 슬쩍 밀어내며 내 카드를 내밀었다.
종업원이 카운터로 향하는 걸 보던 민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소스값은 해야지. 이러면 내가 빚지는 것 같잖아.”
입사 시험이나 면접에 붙을 자신이 가득한 그녀였지만 미리 타일러 컴퍼니 한국지부의 간부들에게 눈도장을 찍어두길 원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아무 근거도 없이 눈도장 하나로 덜컥 입사시켜줄 리는 없었다. 한민아는 큰 회사일수록 간부에게 좋은 쪽으로 눈길을 받는 사원이 그만큼 예기치 못한 큰 관심을 받기 마련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한국지부에서 시작해, 입사가 그리도 힘들다던 미국 본사로의 입성을 원하는 그녀로서는 그러한 눈길의 시작이 될지 모를 내 정보가 꽤 값질 것이다.
곤란한 표정의 한민아를 내려다보며 다른 제안을 했다.
“술값 대신 다른 건 어때.”
“다른 거 어떤 거? 거창하고 어려운 것만 아니면 돼.”
민아의 반짝이는 눈이 한번 말해보라는 듯 올려다본다.
“오랜만에 대학 좀 갔다 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