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계의 고리-21화 (21/99)

21화

4. 강지건

링의 상대가 내가 바라마지 않던 사람인 것은 확실했으나, 그에게는 내가 오히려 생판 모르는 타인보다도 더한 상대였다. 그걸 알고 있었기에 한발 한발을 내디딜 때도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했다. 그걸 위해서는 걸리적거리는 건 전부 치울 필요가 있었다.

“형!”

사무실에서 조금 떨어진 카페에 들어가자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던 최진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기다린 지 꽤 된 것을 증명하듯, 그가 앉아있던 자리의 테이블에는 복잡해 보이는 전공 서적이 떡하니 올려져 있었다.

마주 앉자마자 최진호가 급하게 책을 치우며 단정한 얼굴에 미소를 걸었다.

“뭐 마실래, 형? 아메리카노? 아니다, 아직 저녁 안 먹었지? 바로 밥 먹으러 갈래?”

금방이라도 뭐든 주문하러 갈 것처럼 일어나는 그를 붙잡았다.

“필요 없어.”

“나 어제 알바비 받았어. 오늘은 내가 살 테니까 메뉴 골라주면…….”

“됐으니까 앉아.”

싸늘한 음성에 머쓱한 듯 느릿하게 앉은 최진호가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눈치를 살폈다.

단정한 외모에 생각이 가득해 보이는 진한 검은 눈동자, 또렷한 이목구비, 조금 마른 듯한 몸매, 어른스럽지만 학생티가 나는 분위기.

‘닮았네.’

머릿속에 떠오른 신우서와 애인 최진호는 상당히 닮아있었다. 둘을 함께 데려다 놓으면 누구든 그들을 친한 친구 사이라고 예상할 거다.

떠올리고 나니 벌써 우서가 보고 싶었다. 이런 곳에서 시간을 낭비할 순 없다.

말없이 왼쪽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오후 6시 35분.

7시 무렵에 우서가 사무실로 올 테니, 그 전에 최진호와의 이야기를 끝내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이야기라고는 해도, 사실 길게 말할 것도 없다.

“끝내자.”

내 입에서 흘러나온 짧은 말에 최진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렉 걸린 프로그램처럼 뒤늦게 내 말뜻을 알아들은 그가 입을 벙긋거리다가 억지로 웃으려 든다.

“형,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장난치지 마….”

“내가 한가롭게 장난이나 치는 사람으로 보여?”

머리가 나쁜 녀석도 아니니 한 번에 알아들어 주면 좋을 텐데, 최진호는 불안하게 눈을 굴리며 모르는 체한다.

“내가 이해를 잘못한 거지? 형 말은……, 그러니까…….”

“애인 취급해 주는 것도 이제 끝이라고 말하는 거야.”

“왜?!”

최진호의 입에서 큰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탓에 근처에 앉아있던 사람들 몇몇이 이쪽을 힐끔거렸다. 그 시선을 최진호 역시 느끼고 있을 텐데도 그는 목소리를 낮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뭐, 뭘 잘못했어? 그런 거야, 형? 말해주면 뭐든 고칠게. 내가 뭘 하면 될까? 응?”

“잘못한 것도 없고 고칠 것도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여전히 얼이 빠져 있는 최진호를 내려다보았다.

“이젠 네가 필요 없어서 그래.”

그 말을 들은 최진호가 파리한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갑작스러운 통보이다 보니 꽤 충격이 큰 것 같았지만, 한가롭게 위로해주는 척할 순 없었다. 혹시라도 우서가 일찍 도착해서 기다리게 될까 봐 알아서 잘 돌아가라는 말만 남긴 채 카페를 나섰다.

주차해 둔 차의 운전석 문을 여는데, 뒤에서 최진호가 기다리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새 달려 나온 그는 차에 타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운전석 문을 손으로 세게 밀어서 도로 닫아버리고는 내 팔을 잡아당겼다.

“형, 내가 뭘 잘못했냐니까? 다 고친다고 했잖아. 다 고친다고!”

금세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일그러진 얼굴로 내 정장 재킷 앞섶을 두 손으로 와락 구기며 매달린다.

“알잖아, 난 형밖에 없는 거.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끝내자고…….”

울먹이던 최진호의 눈에 기어코 물기가 서렸다.

“이렇게는 못 헤어져, 형…. 내가 형한테 필요한 사람이 되면 되잖아…. 형 입맛 맞춰서 다 바꿀게.”

벌써 훌쩍이기 시작한 최진호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눈치 없고 막무가내인 녀석인 줄은 몰랐는데.

“착각하지 마, 최진호.”

약간 마른 어깨가 움찔한다. 그의 두 손목을 붙잡아 정장에서 단숨에 떼어놓았다.

“나한테 필요한 사람은 한 명뿐이야. 그래서 네가 필요 없다는 데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최진호에게 잡힌 정장 앞섶에 선명한 주름이 생겨버렸다. 곧 우서를 만나야 하는데 깔끔하던 정장이 구겨져 있으니 짜증이 확 올라왔다. 손목을 붙잡고 있던 최진호를 노려보며 그를 거세게 밀어냈더니 휘청하다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정장 재킷을 벗어 뒷좌석에 아무렇게나 던져놓고서 운전석 문을 열었다.

“형, 자, 잠깐만……!”

최진호가 다급히 일어나 어깨를 잡는 느낌이 나자마자 몸을 돌려 그의 배를 퍽 소리가 나도록 차버렸다.

“흑!”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배를 부여잡은 그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뒤이어 눈물을 흘리며 헐떡이던 그가 소리도 내지 못한 채 ‘형’이나 ‘가지 마’라는 말을 반복한다.

“귀찮게 하지 말고 갈 길 가라, 진호야.”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감정 하나 들어있지 않은 무미건조한 음성이었다.

흔들리는 눈에 어둠이 깔린 최진호를 버리듯 놔둔 채 차를 몰았다. 나아가면서 힐끗 백미러를 확인했는데, 최진호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하염없이 이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 보며 불쌍하다기보다는 그저 한심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사무실까지 돌아가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조금 전에 모진 말과 함께 버려버린 최진호가 아니라, 곧 찾아올 신우서만이 가득했다.

* * *

매일 우서와 호텔에서 잠들었다가 헤어지길 며칠.

거침없이 돈을 쓰는 자신에 대해 우서의 부담이 한계에 다다라가는 게 보였다. 사실은 그러길 바랐기 때문에 굳이 호텔로 끌고 다녔던 거라, 슬슬 다음 일을 진행할 때가 되었다.

똑똑-

짧게 노크하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여니, 옷장 앞에서 내일 입고 나갈 옷을 미리 준비 중인 여동생 강지연이 보였다.

“왜, 오빠?”

옷걸이에 걸린 원피스를 들고서 그 위에 다른 재킷을 대보는 지연에게 넌지시 물었다.

“여기서 판교까지 왔다 갔다 하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들지 않아?”

“그거야 그렇지만 어차피 차도 있으니 상관없어.”

다른 재킷을 대보던 지연은 그 코디로 결정했는지, 두 옷을 옷장 밖의 옷걸이 대에 걸어두었다.

“집 얻어줄게.”

지연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진짜? 근데 회사 근처 집값이 좀 비싼 게 아니어서 아무리 오빠여도 허리 휠걸?”

지연이 굳이 차로 출퇴근을 하려 했던 건 회사를 따라 집을 얻기엔 그 일대 집값이 서울만큼이나 비싸기 때문이었다.

“출퇴근만 두어 시간이면 일하는 데도 지장 갈 수 있어. 너도 자취하고 싶어 했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지연이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보았다. 자취는 예전부터 하고 싶었지만 회사와 이 집과의 거리가 가까웠던 탓에 굳이 돈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지연도 자연스레 자취는 단념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회사가 꽤 갑작스럽게 위치 이전을 하게 되었다. 단념하고 있다가 갑자기 찾아온 자취의 기회라서인지 이것저것 걸리는 게 많을 만도 했다. 물론 그 안에서 독보적으로 걸리는 것은 역시나 돈이었다.

“괜찮겠어, 오빠? 비쌀 거라니까?”

지연이 조심스레 물었다. 싸든 비싸든, 어차피 내 대답은 하나였다.

“집 구하는 대로 말해. 얼마든 내줄게.”

곧 지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 * *

지연이 집을 계약한 걸 확인하고 난 후, 집 거실에서 TV로 혼자 영화를 보고 있던 지석에게 툭 던지듯 말했다.

“우서 원룸 계약 기간이 언제까지인지 알아?”

“응?”

영화를 보며 실실 웃던 지석이 갑자기 튀어나온 우서 이름에 반응하듯 고개를 홱 돌렸다.

“그건 왜?”

“방 하나 비잖아.”

“…응?”

지석이 선뜻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지석이 앉은 소파에 나란히 앉고서 무심한 척 TV에 시선을 두었다.

“창고로 쓰기엔 딱히 둘 짐도 없으니 우서가 살게 하면 어떨까 해서. 월세 내면서 좁아터진 원룸에 사는 것보다야 지연이 방에서 지내는 게 낫지 않겠어?”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뜬 지석이 영화를 보던 것도 잊은 채 의문을 담아 바라보았다. 안 볼 거면 뉴스나 틀겠다고 했더니, 여태 즐겁게 보고 있던 영화의 이어질 내용은 궁금하지도 않은 것처럼 자꾸 물어온다.

“형은 다른 사람하고 지내는 거 싫어하잖아. 우서가 같이 살아도 괜찮아?”

“걔는 과외받을 때도 가끔 자고 갔잖아. 예전이나 지금이나 얌전하고 눈치 빨라서 같이 지내도 딱히 거슬리진 않을 것 같아서.”

지석의 손에서 리모컨을 가져가, 뉴스를 찾으려는 것처럼 채널 번호를 하나씩 틱틱 올려보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요리도 잘한다며. 배달 음식 질렸는데 잘됐네.”

“그게 다야?”

“아마도?”

아직도 강지석의 눈은 풀어지지 않았다. 의아한 빛이 가득한 녀석의 눈은 은근히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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