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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고리-19화 (19/99)

19화

형을 따라 술집이라 부르기 민망한 고풍스러운 바에 도착한 지 1시간.

영화에서나 보던 값비싼 바에 형과 나란히 앉아 벌써 한잔이 아닌 세 번째 칵테일을 들이켜는 중이었다.

“제가 정말…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요.”

반쯤 남긴 맑은 칵테일을 입 안에 털어 넣고서 한 손으로 흐트러진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그때 그 말이 자꾸 맴돌아서… 강지석이 잘해주고 걱정해주는 게 자꾸 마음에 걸려요…. 어차피 걔는 다른 사람들한테도 똑같이 하는 거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데… 왜 난 그런 것 하나하나에 설레왔던 건가…하고…….”

포크에 찍힌 동그랗고 하얀 치즈 덩이가 입 앞에 대기하고 있기에 주저 없이 받아먹었다. 평소 같았으면 민망해하면서 내가 먹겠다고 말했을 텐데, 술이 가득 들어간 상태라서 그런지 민망함보다도 직접 안주를 집어 먹지 않아도 되는 편함이 가장 컸다.

내게 안주를 먹여준 형이 그 역시 똑같은 걸 포크로 찍어 입에 물며 대꾸했다.

“그럴 수 있지. 좋아하는 사람이 내게 해주는 행동이면 누구나 의미를 두고 싶어 하잖아.”

“의미…. 네, 의미…. 그렇죠….”

어지러운 머리를 손으로 짚어 가까스로 지탱하며 빈 칵테일 잔을 노려보았다. 유리로 된 잔의 표면에 강지석의 헤실거리는 얼굴이 흐릿하게 그려진다.

“저는 강지석이… 다른 여자랑 사귀게 되고 결혼까지 한다고 해도 괜찮을 줄 알았어요. 괜찮아야 했거든요, 옆에 있으려면…….”

어차피 강지석과 이어질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친구로라도 오래 남아 있고자 했다. 구질구질한 감정은 갖지 말고 친한 친구에 불과한 척 연기하기로 다짐했고, 여태껏 해왔듯이 쭉 잘해 올 자신도 있었다.

그랬는데, 막상 강지석이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는 걸 깨닫자마자 이 꼴이다. 벌써부터 감정 조절을 이리도 못해서야 어떻게 계속 옆에 있을 수 있을까. 그렇다고 강지석에 대한 마음을 접는다는 둥, 멀어져야 한다는 둥, 그런 생각조차 전혀 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심각할 정도로 한심스러웠다.

눈을 돌려 형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강지석과 같은 얼굴보다도 형 특유의 여유로운 분위기와 어른스러운 느낌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제가 형처럼 나이를 먹으면 괜찮아질까요.”

형처럼 여유롭고 어른스러워지면 이런 복잡한 감정도 좀 단순해질까. 강지석이 누구를 좋아한다는 걸 들은 것만으로도 이러는데 나중에 누굴 사귄다고 하면 과연 태연한 척 연기할 수 있을까.

말 없는 형을 향해 피식 웃었다.

“짝사랑이라는 거…, 진짜 힘든 거네요.”

형의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조금 내려갔다. 그래서인지 평소의 미소가 아닌, 어딘가 나와 닮은 씁쓸한 호선이 되었다.

새 칵테일을 절반 정도 마셨을 무렵, 주량을 한참 넘겼다는 걸 일깨워주듯 눈앞이 단숨에 흔들렸다. 그와 더불어 몸도 같이 휘청거리는 걸 형이 어깨를 감싸 안아 지탱해주었다.

“이제 그만 들어가야겠다. 너무 마셨네.”

“아뇨, 하지만…….”

술기운을 빌어 나 혼자만 푸념을 늘어놓은 상태라서 형에게 미안했다. 아무리 내가 강지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다 해도 그 답답한 얘기가 그리 듣기 좋은 건 아니었을 텐데.

형도 뭔가 털어놓고 싶은 게 있다면 말해도 된다고 웅얼거리니 내가 기댄 어깨 위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와서 뭐라 말을 건네고, 형이 그 사람에게 신용카드 한 장을 내미는 게 보였다. 현금 몇 장을 친구에게 쥐여주며 술집을 나왔던 나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그 차이가 내가 아직 미숙한 어린애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는 다리를 움직여 형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아까는 그렇게도 칼바람 같았는데, 시간이 더 지난 지금은 오히려 부드럽고 시원해서 기분이 좋았다.

조수석에 어떻게 올라탔는지 모르겠다. 언뜻 형이 거의 안아서 자리에 앉혀준 것 같은데 기억이 드문드문 끊기기 시작했다.

운전석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기에 곧 출발하겠거니 하고 눈을 감으려 했다. 언뜻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형과 술을 마시는 중간중간에 계속 어디선가 연락이 와도 무시했더니, 새벽일 게 분명한 이 시간까지도 자꾸 연락이 온다.

짜증 섞인 눈으로 꺼내서 확인하다가 순간적으로 시야가 밝아졌다.

[어디야, 우서야ㅠㅠ]

메시지를 보내온 건 강지석이었다. 설마 하고 연락 온 내역을 확인해보니, 부재중 전화 11통이 전부 강지석이다. 거기다 메시지까지 셀 수 없이 많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관심이 마냥 좋기만 했을 텐데, 오늘은 심란해서 그런지 순수히 좋아할 수가 없다. 더 신경 쓰이는 건, 새벽 1시가 넘은 이 시간까지도 강지석은 취해서 곯아떨어지지도 않았다는 거다.

[집에 혼자 있으니까 무서워ㅠㅠ]

봐, 오타 하나 없지.

잠에 취하든 감기약에 취하든 술에 취하든, 강지석의 오타는 그놈 상태를 낱낱이 알려준다. 아까는 내 것까지 빼앗아가며 술을 잔뜩 마신 것 같았는데, 오타가 하나도 없는 걸 보면 정신이 멀쩡한 게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집에 들어가기 싫어졌다. 지금처럼 몽롱하고 감정적인 상태로 강지석을 만났다가는 술김에 무슨 말을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답장도 보내지 않고 휴대폰을 노려보는데, 그 화면을 타인의 큰 손이 가려 버린다.

“우서야, 우리…….”

강지석의 메시지를 가린 지건 형이 유혹하듯 웃는 게 보였다. 순간 형의 얼굴 위에 강지석의 얼굴이 겹쳐 보여서 가슴이 한차례 크게 울리는 듯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홀릴 것 같고 그렇다고 고개를 돌리자니 아쉬워서 다시 바라볼 것 같다.

“집에 들어가지 말까?”

형의 제안은 그의 미소만큼이나 유혹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덜컥 그러자고 할 순 없었다.

“내일 출근하셔야 한다면서요.”

“응, 그래서 자긴 해야 할 것 같은데 네가 들어가고 싶지 않은 것 같아서.”

형이 이럴 때마다 가끔 소름이 돋는다. 어떻게 내 생각을 저렇게 다 아는 거지.

“근처 호텔로 잡을게. 퇴실 시간 늘려 놓고 나갈 테니까 푹 쉬다 나오고.”

상대적으로 체온이 낮은 형의 손이 뜨끈한 내 볼을 쓰다듬었다. 기분 좋은 감각으로 인해 속이 간질거렸다. 그와 동시에 자상한 형에게 자꾸만 강지석이 오버랩된다.

“강지석도 그렇고 형도 그렇고…, 다들 왜 이렇게 자상해요….”

느릿한 혀가 머릿속에 있는 말을 끄집어내며 굴러다녔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형의 시원한 손에 볼을 비비고 있다.

“자상하다는 얘기는 처음 들어봐.”

“애인 있었다면서요…. 애인이 매일 말해주지 않았어요…?”

말하는 거든, 행동이든, 눈빛이든, 죄다 강지석인데. 자상함 빼놓으면 시체인 강지석인데…….

“응, 한 번도 못 들어봤어. 자상하긴커녕 차갑다고 난리였지.”

“거짓말….”

“진짜야. 아마 네가 날 자상하다고 느끼는 건 내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가 아닐까?”

형의 눈가와 입매가 좀 더 진한 호선을 그렸다. 그게 또 강지석과 너무 닮아있어서 순간 내가 누구와 대화 중인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둔한 머리가 천천히 굴러가며 형의 말뜻을 뒤늦게 이해했다.

“네가 원한다면 지석이 흉내 정도는 얼마든지 내줄 수 있어.”

아…, 그런 거였구나.

입에서 힘없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형은 그저 형이 하기로 한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이었다.

강지석과 같은 얼굴로, 강지석처럼 자상하게, 내가 강지석에게 원하던 대로.

그걸 깨닫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형에게서 느낀 강지석과 그의 자상함을 미련한 내 망상이라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머릿속 일부가 비틀려, 이기적인 생각이 흘러나왔다. 나와 눈을 맞추고 있는 사람이 비록 강지석은 아니지만, 내가 강지석에게 원하는 것들을 충분히 들어줄 것 같았다. 그게 어떤 비열한 것이라 해도 말이다.

나는 형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니까.

형의 왼손 약지에 자리 잡은 붉은 링이 마치 내가 쥐고 있는 붉은 족쇄 같았다.

술로 인해 둔해진 머리는 어린애처럼 단순해졌다. 강지석 흉내를 내주겠다는 형의 말이 뭐든 해줄 수 있다는 맹목적인 말처럼 여겨졌다.

“그럼요, 형….”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내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조금만 더 제가 원하는 대로… 강지석인 척해주시면 안 돼요…? 강지석 대신 형이…….”

말을 완성하고 나자 내가 지금 왜 이러나 싶어서 혼란스러웠다. 망할 술, 역시 작작 마셔야 했는데.

둔한 혀를 움직여 얼른 내가 내뱉은 말을 정정하려 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강지석에게 원하는 걸 형에게 노골적으로 부탁하는 건 너무했다.

“죄송해요. 이건 그러니까…….”

“뭘 해주면 될까?”

날 이상하게 바라볼 거라 생각했는데, 형은 의외로 목소리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되물었다.

“어떻게, 키스라도 해줄까?”

형의 노골적인 말이 안 그래도 붉은 내 얼굴에 열기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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