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계의 고리-18화 (18/99)

18화

처음에는 잘못 본 건가 했다. 어딘지 말도 안 했는데 지건 형이 어떻게 알고 온 걸까.

“뭐해, 빨리 안 마시고.”

눈이 풀린 친구 하나가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서 아직 가득 찬 소주잔을 내 손에 쥐여준다. 형을 보고 술이 확 깼던 나는 그만 마시려고 다시 내려놓으려 하니 이 친구 놈이 잔을 잡은 손을 통째로 잡아 억지로 내 입에 가져다 댄다.

“야, 나 이미 많이 마셨는데…….”

“혀가 멀쩡한데 뭘 많이 마셔. 아직 멀었어. 팍팍 마셔!”

“맞아! 취할 때까지 마시라고!”

다른 친구까지 가세해서는 압박을 한다. 마지못해 소주잔을 단번에 비워버리고 나자 목이 찌릿찌릿할 정도의 독한 칼칼함이 느껴졌다. 뒤이어 찾아온 몽롱함에 머리가 띵하다.

“어딜 내빼려고 해, 새끼가. 괘씸죄로 한 잔 더 받아.”

술잔이 비자마자 다시 소주가 채워졌다. 안주용 과자를 집어 먹으며 좀 천천히 마시자고 했지만, 이것들은 도통 멈출 줄을 몰랐다.

연거푸 석 잔을 마시고 나니 취기가 심히 올라와 얼굴이 터질 것처럼 화끈거렸다. 심장 소리에 맞춰 머리도 쿵쿵 울리고, 풍선이 가득한 바닥에 발을 올려둔 것처럼 둥둥 뜬 느낌도 났다.

“야아아-, 한 잔 더어어!”

“유 교수우우, 이 시붕얼시키이-! 교수면 돠냐아-?!”

사방에서 혀 꼬인 소리가 들려오고 또다시 내 잔에 술이 채워진다. 이젠 거부하거나 때맞춰 마실 생각도 없이 그저 잔에 뭔가가 채워지면 들이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어차피 안 마시면 이것들이 억지로 내 입에 부어버릴 거다.

당연한 것처럼 소주잔을 드는데, 옆에서 다른 손이 끼어들어 그걸 확 가로채 간다.

“우서야, 흡, 너 너무 많이, 흐, 마시는 것 같아.”

내 소주잔을 들고 딸꾹질을 해대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강지석이었다. 그걸 본 다른 친구들이 니 술이나 처먹으라며 도로 빼앗으려 하자, 배시시 웃은 강지석이 내 술을 원샷해 버렸다. 그러더니 지 술잔까지 두 개를 양손에 들고서 더 달라며 패기를 부린다. 마다할 녀석들이 아니어서 친구들이 그의 두 소주잔에 다시금 술을 부어 준다.

난 의자에 반쯤 늘어진 채 그런 강지석을 바라보았다. 강지석 또한 술에 잔뜩 취한 게 보이는데, 그 와중에도 날 신경 써줬다는 것에 또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러다 금세 푹 가라앉는다.

“아직도 민아 누나 좋아해, 나.”

하필 왜 지금 그 말이 떠올라서는.

멍하던 머릿속에 미친 듯 되풀이되는 강지석의 고백이 술 때문에 들떠있던 기분을 나락까지 처박았다.

테이블에 팔을 걸친 채 턱을 괴고서 강지석을 삐딱하게 바라보았다. 아직도 그에게 붙잡혀 있는 내 술잔에 맑은 술이 채워지고 금세 그의 입을 타고 들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 빈 술잔은 곧 강지석의 손을 떠나 테이블에 올려져, 주인도 없이 버려져 버렸다.

별것도 아닌 것에 감정이 이입된다. 술의 힘이자 부작용이라고 생각하지만, 속에서 뭔가가 울컥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울컥함은 실제로 내 속에도 영향을 미쳐, 급하게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토기가 몰려오는 것 같아서 화장실로 향했지만 밖의 술 냄새 가득한 공간을 벗어나서인지 우려와 달리 속은 잠잠했다. 가슴을 쓸어내리다가 눈앞이 어질해서 세면대를 붙잡은 채 이마를 짚었다. 손도 제법 온기가 있는데 대체 얼굴은 얼마나 열이 오른 건지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고개를 들어 벽의 거울을 보니 마치 불에 덴 것 같다.

그때,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강지석이 들어왔다. 그의 얼굴도 잔뜩 붉어져 있었지만, 그나마 나보다 눈의 풀림이 좀 덜해 보였다.

“뭐야, 너도 화장실 왔어?”

바보처럼 웃으며 다가오던 지석이 곧 걱정스러운 듯 미간을 모았다.

“괜찮아? 토할 것 같아? 어지러워? 집에 갈까?”

과도할 정도로 걱정하며 다가오는 그가 왜인지 거북스러웠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고 그건 술에 취해 있어도 똑같았는데, 왜 저게 다 가증스럽게 느껴지는 걸까.

강지석은 내가 아니라 다른 친구들이 이렇더라도 똑같이 대했을 거다. 똑같이 묻고, 똑같이 걱정했겠지.

예전 같았으면 이 호의가 그저 고맙고 설렜을 거다. 강지석에게 특별 취급당하는 것 같고, 그와 애인만큼이나 가까운 친구라며 자부심을 느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복잡한 머릿속과 울렁거리는 감정 때문에 도저히 순수하게 받을 수가 없다.

“아직도 민아 누나 좋아해, 나.”

미치겠네.

또다시 강지석의 그 말이 떠올라 머릿속을 헤집어놨다. 그건 마치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민아 누나처럼 강지석의 수용 범위 안에 들어갈 일 없다고 쐐기를 박는 것 같았다.

탁-!

내 얼굴을 향해 뻗어져 온 손을 나도 모르게 쳐냈다. 강지석이 놀란 듯 바라보는 걸 노려보다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조금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그의 어깨를 밀듯이 툭 치고 지나갔다.

자리로 돌아간 나는 친구 중 두엇이 벌써 쓰러져 있는 걸 보며 내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나마 정신이 멀쩡한 친구가 어딜 가냐며 붙잡기에, 지갑에서 꺼낸 몇만 원의 술값을 그에게 쥐여주며 말없이 자리를 떴다.

밖으로 나오니 꽤 바람이 불었다. 여름에 접어들기까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는데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차다. 아마도 내가 열로 똘똘 뭉친 상태라서 그렇겠지만.

우웅-

가게 밖에서 바람을 쐬며 서 있다 보니, 뒤늦게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어 둔 휴대폰이 생각났다. 진동이 계속되는 거로 보아 누가 전화라도 하는 모양인데, 지금은 받고 싶지도 않고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진동을 무시한 채 걸음을 뗐다. 조금 시야가 흔들리고 한기가 들지만 그래도 이렇게 걸어서 집에 가다 보면 요동치는 감정도 가라앉고 취기도 가시지 않을까.

이제 세 걸음쯤 갔을 때였다.

시야가 훅 흔들린다 싶더니, 몸이 갑자기 뒤로 홱 돌아갔다. 내 눈앞에 보이는 익숙한 얼굴에 멋대로 얼굴이 구겨졌다.

“왜 나왔어? 술은 다 마셨어?”

조금 흐릿한 시야에 보이는 건 아까처럼 미간을 모은 채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 있는 강지석이었다.

“좀 놓고 꺼져봐.”

안 그래도 심란해서 혼자 머릿속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는데 원흉이 눈치 없이 끼어들기는.

붙잡힌 팔을 휘둘러서 확 밀어내려고 했더니 다른 팔까지 덥석 붙잡혔다.

“취하면 과격해지는구나.”

귀찮게 하는 강지석에게 한마디 쏘아붙이려던 찰나, 그의 목소리가 화장실에서와 달리 꽤 낮다는 것을 알아챘다. 좀 더 자세히 보니, 말끔한 정장 차림에 다소 어른스러운 미소를 걸고 있다.

“…형?”

그제야 눈앞에 있는 게 강지석이 아니라 지건 형이라는 것을 알았다. 생각해 보니 아까 한창일 때부터 와 있었는데 술과 강지석에게 정신이 팔려있어서 형이 있었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아…, 죄송해요. 제가 지금 좀 정신이 없어서…….”

미안함과 당황이 섞여, 안 그래도 둔하던 혀가 완전히 꼬일 것 같았다. 다행히 형은 불쾌한 내색 없이 날 부축해서 지탱해주었다.

“아직 친구들 다 남아 있는데 나와도 돼?”

“예, 그냥… 그만 마시려고요.”

눈을 내리깐 채 고개를 돌리자, 형이 내 얼굴을 부드럽게 잡아 돌려 시선을 맞췄다.

“머리 복잡하면 눈 내리까는 버릇 있는 거 알아?”

자상하게 웃은 형이 내 눈 밑을 엄지로 살짝 누르며 쓸어 주었다. 나도 모르던 버릇인데 그걸 알아채 준 것도 신기하고 이 자리에 형이 있다는 것도 신기하고 강지석과 이렇게 닮았다는 것도……, 그냥 다 신기하다.

“형은 여기 어떻게 알고 오신 거예요?”

형은 말없이 휴대폰을 꺼내어 메시지 하나를 보여주었다.

[친구들하고 술 마시다가 늦을 거니까 기다리지 마.]

강지석이 형에게 보낸 메시지였다. 그것만 가지고 어떻게 위치까지 알았냐는 의문 섞인 시선을 보내니, 형이 빙긋이 웃는다.

“예전에 친구들하고 술 마실 때마다 가는 곳이 있다고 들었거든. 대충 위치도 알고 있었고.”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친구들과 단체로 술 마실 땐 매번 이 술집을 찾았다는 걸 깨달았다. 학교 근처에 안줏값도 싸고 사장님 인심이 넉넉해서 학생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내일 주말이라고 새벽 늦게까지 술 마시다가 안 들어올까 봐 상황 봐서 잡아가려고 와 있었어. 난 내일도 나가야 하거든.”

형이 뭘 걱정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없으면 잘 수가 없을 테고, 내일 일에도 큰 지장이 가게 될 테니 걱정할 수밖에. 시간도 벌써 밤 11시가 넘었다.

“죄송해요. 그럼 집으로…….”

입을 열다가 말을 삼켰다. 이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가 바로 잘 생각을 하니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아직 속에 남아 있는 답답함도 싫고 환기되지 않는 머릿속도 불쾌했다.

어딘가 하소연할 데라도 있었으면…….

고민 끝에 형의 팔을 슬쩍 붙잡았다.

“저기, 혹시 한잔 정도… 괜찮으세요?”

내일 출근해야 할 사람을 붙잡고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못 들은 거로 해달라며 집으로 가자고 말하려는데, 형이 보기 좋게 웃는 얼굴로 날 차가 있는 방향으로 데려간다.

“두 잔도 괜찮아.”

형은 내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단박에 승낙해주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