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놀랐잖아요, 형.”
“놀라게 하려고 한 거야. 문도 안 닫고 왜 멍하니 있어.”
어느새 정장을 빼입고 나타난 지건 형이 팔을 풀며 웃었다. 앞머리를 올린 채 단정하고 멋들어진 정장을 입은 형의 모습은 강지석과 확연히 달랐지만, 역시나 웃는 얼굴만큼은 똑같았다. 이렇게 선뜻 다가와 주는 것도.
전날에 과거의 살갑고 다정했던 때를 떠올려서인지, 그전까지는 다소 긴장하며 조심스럽게만 보이던 형이 그때처럼 친근하고 가까워진 걸 느꼈다. 전날의 조금 가까운 접촉이 한몫한 것 같기도 했다.
약간 흐트러진 내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빗듯이 다듬어준 형이 넌지시 물었다.
“태워다 줄까?”
“아니에요. 형 회사랑 반대 방향이잖아요. 저희 내려주고 가면 시간 빠듯할 거예요.”
“괜찮은데.”
형이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할 때, 어느새 문가에 다가와 선 지석이 끼어들어 물었다.
“형 회사가 어디인지도 알아?”
지석의 입가는 분명 웃고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눈꼬리가 형과 비슷할 정도로 날카롭게 올라가 있다.
사실 난 링이 생기기 전까지 형네 회사가 어디인지도 몰랐다. 이름이야 알고 있었지만 굳이 위치를 검색해 본 적도 없었기에 서울 어딘가에 있는 소형 앱 개발 업체라는 것 말고는 아는 게 없었다. 링 때문에 사무실을 찾아가면서 위치를 알게 된 거지, 그게 아니었다면 여태껏 모르고 있었을 거다. 관심 밖이었으니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입 안에서 말을 골라내고 있는데 형이 먼저 나서서 변호해 준다.
“내가 알려줬어. 다음에 실무 둘러보러 오라고.”
“…….”
간단한 대답을 받은 지석은 딱히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의 눈에서 형을 경계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형이 태워다주겠다는 말을 한 번 더 했지만 나도 재차 거절했다. 이번엔 형의 출근에 지장이 갈 거라는 생각보다도 어딘지 모르게 두 사람 분위기가 그리 좋지 않아서 내가 불편했다.
형을 먼저 보내고 나서 아파트 밖으로 나온 나는 지석을 힐끔거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둘이 싸웠어?”
전날에 베란다에서 무슨 얘기를 어떤 분위기로 나눴는지는 대강 알고 있었지만, 아예 모르는 척 물어보았다. 예상대로 지석은 멋쩍은 얼굴로 배시시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형제들끼리는 원래 티격태격도 잘하고 금방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굴기도 하잖아. 우리도 그렇지, 뭐.”
뒤이어 정말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며, 불편하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아닌 것 같았는데…….’
지석의 진지한 얼굴이라든지 경계심 섞인 눈이나 형을 향해 거칠게 내뱉던 말이라든지, 전부 평소의 지석에게선 찾아보기 힘든 것들이라 쉽게 그러려니 넘길 수가 없었다. 물론 내게 형제간의 이야기를 전부 다 해줄 것까지는 없었지만, 최소한 어떤 상태인지 정도는 알려 줘도 되는 것 아닐까. 아니면 민아 누나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라도.
내게 무슨 일이 생겼다 싶으면 끈질기게 물어보며 끝내 알아내고 마는 주제에, 정작 본인은 이번 일에 대해 꾹 눌러 숨기려 한다. 그래서 더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이러다 보면 끝도 없어.’
마음을 가라앉히며 조금씩 튀어나오던 질투심을 가라앉혔다. 지석의 얘기를 듣다 보면 필연적으로 민아 누나가 얽혀있을 거고, 그렇다면 깊이 파고들어봤자 나 자신에게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
어제 겪었던 가슴 저림과 답답함은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머릿속을 채우던 패배감과 상실감도.
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려는 감정을 가라앉히며 강지석이 그러는 것처럼 아무 일도 없는 척 실없는 얘길 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과연 조원들이 몇 명이나 나올까, 마지막 점검 때조차 안 나오면 그 사람은 과감히 이름을 확 빼버리자 같은 조별과제 이야기부터 저녁은 뭘 만들어 먹을까 하는 주부 같은 이야기도 꺼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려는데, 후드를 푹 눌러쓴 채 이쪽을 향해 걸어오던 남자 하나가 내 어깨를 강하게 치며 지나갔다. 그 탓에 몸이 크게 휘청거려서 옆에 있던 지석이 얼른 받아주었다.
“야, 괜찮아?”
어깨가 얼얼할 정도로 맞아버린 데다가 퍽 소리가 큼직하게 들렸으니 지석이 놀랄 만도 했다. 어깨를 강하게 치고 지나간 사람은 그 역시 타격이 있었을 텐데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살짝 일그러뜨린 내 얼굴과 어깨를 내려다보던 지석이 참다못해 그 사람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저기요! 사람을 쳤으면 사과를 하셔야죠!”
빠른 걸음이긴 해도 나아간 거리가 그리 길지 않으니 충분히 소리를 들었을 게 분명함에도 그는 역시나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석연찮음을 느낀 내가 다시금 소리치려는 지석을 말렸다.
“그만해. 그냥 가자.”
“괜찮은 거 맞아? 어깨 부러진 거 아니고? 소리 장난 아니었단 말이야.”
“진짜 괜찮아. 시간 없으니까 빨리 학교나 가자.”
날 붙들고 있는 지석의 손목을 잡아끌며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나 그 남자는 아무 소리도 못 듣고 느끼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그가 갈 길만 열심히 걸어가고 있었다.
사과를 하든 안 하든 본인이 그 정도로 강하게 사람을 쳤으면 돌아보기 마련인데 저 남자는 그러지 않고 무시했다. 그렇다는 건, 의도적으로 나를 노려 어깨를 치고 갔다는 말이다.
‘어디서 만난 사람인가?’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나와 비슷한 체격을 가진 남자라는 건 확실했다. 기억 속에 자리 잡은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있었나 싶어서 한참 뒤져보다가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후드 재킷 주머니에 양손을 넣은 채 이쪽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아까의 남자가 보였다.
* * *
조별과제를 위한 마지막 모임이자 과제를 발표해야 하는 강의까지 한 시간을 남겨놓고 모인 자리에는 역시나 빈 자리가 있었다. 그것도 두 개나.
이쯤 되니 해탈과 분노가 함께 찾아온다.
“강지석, 가차 없이 빼버려.”
“이미 뺐다.”
발표용 PPT에서 두 명의 이름을 지워버린 지석이 아직도 연락이 되지 않는 두 명의 무임승차 조원을 향해 무언의 욕을 퍼부었다. 맞은편에 앉은 두 명의 조원은 그들 역시 중간부터 하기 시작했으면서 자리에 없는 조원들을 괘씸하다며 온갖 욕을 다 가져온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 둘이 없을 걸 감안해서 이쪽이 미리 철저히 준비해왔다는 것이다. 아마도 발표 자체는 문제가 없을 거고, 이름이 빠져버린 그 둘에겐 교수님의 호출이 화살처럼 아프게 꽂히겠지.
네 명이서 점검을 마치고 강의실에 들어가자, 그제야 두 명의 무임승차 조원이 활짝 웃으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갖은 핑계를 대며 빠지더니만 발표 담당은 티가 날 정도로 목이 쉰 척을 하고 있고, PPT 제작 담당은 다친 게 덜 나았다며 엉성하게 붕대 감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대신 발표하게 된 지석이 배시시 웃으며 괜찮다고 말해주니 역시 착하다며 고맙다고 난리다.
하지만 뒤늦게 PPT에서 이름이 빠진 걸 확인한 그들은 온갖 원망 섞인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다가 결국 강의가 끝나자마자 교수님에게 호출을 당하고 말았다. 두 사람의 초조한 얼굴과 축 늘어진 어깨가 참 쌤통이었다.
매일 과제 때문에 갈려 나갔다고 하긴 뭐하지만, 다른 친구들은 마치 중대한 시험이 끝난 것 같은 홀가분한 얼굴로 술판을 벌였다. 지긋지긋한 조별과제와도 안녕이라며, 차라리 개인 과제 10개를 하는 게 더 나았다는 말을 하는 친구도 있었다.
“어우-! 술이 다네, 달아.”
한 친구가 오버하며 빈 소주잔을 자기 머리 위에 탈탈 털었다. 두세 방울 정도가 정수리에 톡톡 떨어졌지만 그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 듯했다. 저대로 술 취해서 머리도 안 감고 잠들면 냄새가 엄청나지 않을까 하다가, 어차피 내일은 주말이니 뭐 어떠냐는 생각을 했다.
다사다난한 조별과제가 끝났으니 이제 남은 고비는 기말고사였다. 그것만 해치워버리면 그리도 원하던 여름방학이다.
여름이 됐다 하면 덩치에 안 맞게 감기를 달고 사는 강지석도 강지석이지만, 나 역시도 문제가 많았다.
여름만 되면 기력이 딸려서 차가운 방바닥에 껌딱지처럼 붙어서 늘어져 있는 게 일상이었다. 장마가 찾아오면 우중충한 하늘과 습한 공기 때문에 자꾸만 몸이 무거워졌고 병든 닭처럼 수시로 졸기까지 했다. 감기만 이겨내면 팔팔해지는 강지석에 비해 난 여름 내내 그렇다 보니 그에게 이끌려 세 달간 먹어치운 삼계탕 수만 해도 셀 수 없을 지경이다.
이번에도 그럴 걸 생각하니 방학의 기대감보다도 어떻게 늘어져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사이, 친구들은 벌써 술잔을 몇 번이나 돌린 건지 벌써 한껏 취해가고 있었다. 그건 부어라 마셔라를 외치는 강지석 또한 마찬가지였다. 신이 난 친구들이 갖가지 게임을 벌여가며 내 술잔까지 채워버리는 통에 나도 함께 잔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분위기에 휩쓸려서 계속 마시다 보니, 나도 슬슬 취기가 올라와 얼굴이 홧홧해지는 게 느껴졌다.
‘몇 잔이나 마셨더라….’
머리가 둔해져서 잘 계산이 되지 않았다. 술이 그리 센 편도 아니면서 오랜만에 마시는 소주를 좋다고 몇 잔이나 연거푸 마신 게 화근이었다.
열이 올라온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몇 시인가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 드는데, 시계보다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미리 보기 형태로 떠 있는 지건 형의 메시지였다.
[술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니야?]
갑자기 술이 확 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번쩍 들어 주변을 둘러봤지만, 지건 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메시지가 또 한 통 도착한다.
[그만 마시는 게 좋겠다. 얼굴이 너무 익었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얼굴로 한 번 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형은 없었지만, 내가 앉은 자리에서 가장 가까운 쪽에 있는 창문 너머로 익숙한 차 한 대가 보였다. 그 차의 조수석 창문은 3분의 1쯤 열려 있었는데, 그 틈새로 낯익은 두 눈이 보였다. 시선이 마주친 그 사람의 눈가가 강지석처럼 초승달을 그리며 휘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