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지건 형의 짧은 메시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어보았다. 역시나 내가 엿듣고 있었던 걸 형이 알아챈 모양이다.
무슨 말을 들은들 위로가 될까. 아니, 애초에 내가 위로를 받을 주제가 되긴 하나.
좋아하는 친구가 내가 아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됐을 뿐이고, 이미 짐작까지 하고 있었다. 이건 위로를 받을 게 아니라 내가 납득하고 받아들여야 할 일이었다.
가슴이 저릿거리는 것을 느끼며 형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저 괜찮아요. 금방 정리하고 갈게요.]
딱히 정리할 건 없었지만, 굳이 따지자면 내 마음을 정리해야 했다. 강지석에 대한 내 마음 때문에 형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가슴은 빠르게 뛰고 있었고, 머릿속을 가득 채운 민아 누나의 얼굴과 강지석의 말 때문에 아직도 혼란스러웠다.
‘정신 좀 차리게 찬물로 세수라도 해야 하나.’
얼음장 같은 찬물을 얼굴에 흠뻑 끼얹고 나면 좀 낫지 않을까 생각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때마침 휴대폰이 울린다.
[문 열어줘.]
지건 형의 짧은 메시지였다. 그 안에서 뜻 모를 압박감이 느껴진다. 딱히 문을 잠그고 있는 것도 아니니 직접 문을 열고 들어오면 될 테지만, 형은 언제나 조심스러워 하는 것처럼 내가 직접 문을 열게 했다.
머뭇거리며 문으로 다가간 나는 형에게 답장을 하는 대신 그가 말한 것처럼 문을 열어주었다. 문 앞에는 조금 전에 피운 담배 냄새와 함께 특유의 머스크 향을 품은 지건 형이 서 있었다.
막상 문을 열고 마주 보고 나니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선은 이야기를 본의 아니게 엿들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 할까. 애초에 본의가 아니기나 했나. 일부러 귀 기울여 듣고 있었으면서.
지건 형을 마주하며 잠깐이나마 잊었던 지석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역시 듣지 말걸. 차라리 안 들었다면 이렇게 머리가 아플 일도 없었을 텐데.
지석을 떠올리며 눈을 내리깔자마자 팔을 덥석 붙잡혔다. 지건 형은 무표정한 얼굴로 내 팔을 끌어 밖으로 당기더니, 내 방문을 소리 나지 않게 은밀히 닫았다. 그러고선 말없이 형의 방으로 끌고 간다.
이 집에서 가장 넓고 깔끔한 방을 쓰고 있던 지건 형은 침대마저 넓었다. 다른 누군가와 함께 써야 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침대가 널찍했기에, 새벽에 형과 함께 잠을 잘 때는 언제나 이 방을 사용했다.
문을 닫아 잠가버린 형은 돌연 날 번쩍 안아 들었다. 갑작스러운 시야 이동에 화들짝 놀라, 형의 목을 팔로 감고서 당황한 얼굴을 했다.
“형, 잠깐, 왜……!”
형은 말없이 날 그대로 침대에 눕혀버렸다. 그뿐 아니라 형 역시 옆자리에 누워, 내 목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주었다.
당황함에 물든 내 얼굴을 보며 형이 그제야 싱긋 웃어 보였다.
“사람은 자면서 다 잊게 되어있어. 그러니까 빨리 자자.”
형이 침대 머리맡에 있던 리모컨을 들어 방의 불을 전부 꺼버리자, 주변이 삽시간에 어둠으로 가득 찼다. 어둠에 눈이 익어가면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을 받아, 여느 때보다 가까이 있는 얼굴을 쉽게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
형을 바라보며 옆으로 누운 상태로 슬쩍 뒤로 물러났다. 평소에는 침대 끄트머리에 누워 손만 잡고 잤었으니 이렇게 가까이 누워있을 일이 없었다.
평소와 같은 자리로 물러나려는데, 그새 뻗어져 온 형의 팔이 내 허리를 감아 당겨서 더는 뒤로 물러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만 가. 더 갔다간 외로워서 울어.”
“누가 외로워서 운다고 그래요?”
어린아이 취급하는 말에 욱해서 내뱉으니, 어둠 속에서 형이 ‘내가’라고 말하며 작게 웃는다. 그런 형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냥 자고 싶어서 그런 거죠? 위로 같은 게 아니라.”
벌써 새벽 1시가 다 되었으니 자야 할 때긴 했다.
사실 위로는 없어도 그만이었다. 솔직히 내 감정을 다 알고 있는 형이 아까의 대화를 갖고 날 안쓰럽다는 듯 위로했다면 얼마 있지도 않은 자존심이 저 아래까지 툭 떨어졌을 거다. 어쩌면 서러워서 눈물을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하필이면 강지석 같은 놈을, 이러면서 말이다.
차라리 잠이 필요해서 날 끌고 온 거면 좋겠다.
형은 내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굳이 대답해주지 않았다. 대신 더 물러나지 못하도록 팔로 허리를 감은 채, 어린아이를 재우듯이 등을 토닥여 준다.
신기했다. 형의 팔과 손이 닿아있는 자리부터 시작해, 편안함을 유발하는 기분 좋은 온기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아까만 해도 숨이 찰 정도로 빠르게 뛰던 심장이 금세 안정을 되찾고 복잡하던 머릿속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가라앉는다. 접촉한 상태로 잠들기 전에 느끼게 되는 이 편안함은 형이 했던 말처럼 일종의 ‘위로’와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 느낌, 어디선가 느껴본 적이 있었다. 조금 멀리까지 가서 기억을 더듬어보고 나서야 4년 전에 이런 식으로 형에게 토닥임을 받았던 적이 있다는 걸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땐 부모님이 크게 싸워서 이혼하니 마니 난리를 피울 때였다. 하나뿐인 아들이 수험생이든 말든 일절 관심도 없던 사람들이다 보니, 내가 방에서 공부에 전념하고 있을 때도 이혼을 얘기하며 큰 소리로 싸웠었다.
지금이야 바쁜 일과 잦은 출장으로 인해 서로 싸울 여력조차 없어진 거고, 내가 대학에 들어갈 무렵부터는 두 분의 일이 잘 풀려서 돈도 꽤 많이 모으게 되셨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이혼하게 되면 다 큰 아들을 서로 데려가라며 난리였다. 그 당시 일이 바쁜 것에 비해 두 분의 수입은 그리 넉넉지 않았고, 정말 이혼하게 되어 한쪽이 날 데려가게 된다면 비싼 대학 등록금을 혼자 감당해야 할지 모를 상황이었다.
어둡고 거친 집안 공기를 감당하기 어려워서 과외를 핑계로 지석의 집에 갔는데, 그땐 방학 때이다 보니 그놈과 가족들이 친척 집에 말도 없이 놀러 가버렸고, 남아 있는 건 지건 형 혼자뿐이었다.
그날이 지건 형과 가장 많은 대화를 한 날이었을 거다. 속에 있는 말도 낱낱이 꺼내버리고, 일 때문에 멀리 떨어져 살고 있음에도 끈끈한 가족애가 보이는 형네 집안을 대놓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형은 내 투정 섞인 말을 다 들어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가 울컥한 내 눈물을 직접 닦아주며 재워주기도 했다. 그땐 어린 갓난아기를 재우는 듯한 그런 행동이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속에 쌓여 있던 답답한 마음도 다 사라지고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부정적인 감정들마저 싹 씻겨 내려갔던 터라 참 신기했다. 눈을 떴을 때 날 자상하게 내려다보고 있던 지건 형의 눈빛 또한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그때와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스르르 눈이 감겼다. 요즘엔 형과 꼬박꼬박 숙면을 취하고 있어서 그렇게 졸린다거나 피곤하지도 않은데, 그때의 기분 좋았던 감각 덕분에 벌써부터 잠이 쏟아졌다.
다가오는 잠을 거부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버릇처럼 형에게 잘 자라는 말을 남겼다.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커다란 손이 느껴졌다. 아무리 동생이라지만 같은 남자로서 너무 자주 쓰다듬을 받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신경이 쓰였지만, 이미 가득 내려앉은 잠은 날 놔주지 않았다.
“잘 자, 우서야.”
귓가를 간질이는 형의 목소리를 들으며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 * *
다음 날.
강지석과 난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강지석은 평소처럼 헤실거리는 얼굴로 방에서 걸어 나와 늦잠을 자버려서 미안하다고 말했고, 그럴 줄 알고 알았던 난 버터에 노릇하게 구워진 빵 두 조각과 딸기잼을 건네며 이게 아침밥이라고 말했다. 실망한 척 ‘아침은 된장찌개인데’라고 주절거리기에, 얼굴을 된장처럼 만들어버리기 전에 빨리 먹기나 하라고 타박하고서 방으로 돌아왔다.
그래, 평소와 똑같았다. 이러면 되는 거다.
전날의 일이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걸 의식하며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는 거였다. 그 생각의 기저에는 오래된 체념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내가 원하는 건 ‘강지석의 친한 친구’로 오래도록 곁에 있는 거니까.
그런데 어째 오늘은 좀 더 몸이 가벼운 것 같다. 정신도 더 맑은 것 같고 전날의 일을 떠올려 봐도 심장이 아프게 요동치는 정도가 좀 덜했다.
“알아보니까 접촉면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기분 좋게 잘 수 있다더라.”
눈을 뜨자마자 시원한 물을 가져다준 지건 형이 웃으며 한 말이었다. 비몽사몽 한 상태라서 그런가요, 하고 짧게 반응하고 말았는데, 지금 보니 손을 잡고 잤을 때와 허리를 팔로 두르고 잤을 때는 확실히 뭔가 다르긴 달랐다.
‘그때 백 허그하는 자세로 잤을 때도 굉장히 상쾌하고 기분 좋았던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덥석 끌어안아 왔다. 코끝을 스치는 머스크 향 덕분에 돌아보지 않아도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