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형이 왜 벌써 와있어?”
“왜? 난 일찍 오면 안 되냐?”
“그게 아니라…….”
말을 잇던 지석은 날 슬쩍 보더니 뭔가 주저하는 듯이 뒷말을 삼켰다. 그걸 보고 있던 지건 형이 남은 밥을 말끔히 먹어서 그릇을 비워냈다.
“너야말로 왜 벌써 들어와? 한민아가 밤늦게까지 빌린다고 하던데.”
형과 있느라 잊고 있었던 민아 누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더불어 누나와 함께 즐거운 듯 웃고 있던 사진 속의 지석이 생각나,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눈을 내리깔았다.
“형은 왜 안 왔어? 누나가 형도 불렀잖아.”
“난 나중에 따로 만나면 돼. 굳이 끼어서 누구처럼 짐꾼만 하다가 오고 싶지도 않았고.”
지건 형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 먹은 그릇을 차곡차곡 겹쳤다.
“오늘 그쪽 파트너한테 일이 좀 있어서 일찍 헤어졌어. 그래서 누구 대신 우서가 해준 밥 먹고 있었지.”
대신이라는 말에 어깨가 흠칫했지만 정정해달라고 할 수가 없어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게 형이 강지석의 대신이었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었지만, 틀린 말도 아니기에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이럴 때만은 내 감정을 강지석에게 숨기던 것처럼 거짓말이라도 해야 할 텐데 도통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형이 괜찮다는 듯 내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고 지나갔다.
“너도 와서 먹지, 그래?”
등 너머로 싱크대에 식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딱 봐도 네가 좋아하는 것들뿐이더라.”
이상하게 무거워진 공기 속에서 보이지 않는 바늘 같은 것이 따끔따끔 피부를 찔렀다. 그 느낌은 분명 강지석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특유의 웃음기도 없고 지건 형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눈빛도 날이 서 있다. 친구도 버리고 즐겁게 나가 논 놈이 예고도 없이 일찍 들어와서는 왜 저러는가 싶다.
체할 것 같은 기분에 밥그릇을 반밖에 비우지 못하고 일어나는데, 어느새 다가온 지건 형이 어깨를 살짝 눌러 앉힌다.
“마저 먹어. 혼자 먹기 뭐하면 나도 앉아있을게.”
“아녜요, 저 다 먹었어요.”
“그거 먹고 되겠어? 그러니까 이렇게 말랐지.”
한 손으로 내 팔뚝을 쥔 형이 까딱이며 시선을 보내자 울컥했다. 평소엔 밥 한 공기 정도 너끈하니 이런 취급을 받을 일도 없는데, 이건 엄연히 강지석 탓이다.
형 손이 큰 거기도 하고 내가 말랐다기보다 뼈대가 얇은 것뿐이라고 항변하고자 입을 열었다.
“전 마른 게 아니라……!”
“내가 같이 있을 테니까 형은 할 일 해.”
차갑게 말한 강지석이 이제껏 지건 형이 밥을 먹던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았다. 겉옷도 벗지 않은 채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식탁 옆 바닥에 대충 내려놓고는 갑자기 날 똑바로 바라본다. 강지석이 이렇듯 시선을 돌릴 수도 없이 또렷이 바라보며 진지한 얼굴을 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어서 나도 모르게 긴장하게 된다.
눈을 맞추던 지석이 갑자기 평소처럼 히죽 웃었다. 그제야 답답하고 차갑던 공기가 탁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서야, 밥 남았어? 나 배고프다.”
강지석의 태평한 말에 이제껏 긴장했던 게 무색해졌다. 그와 동시에 괘씸한 생각도 들었다. 민아 누나랑 나가서 맛있는 거나 얻어먹고 올 일이지, 왜 밖에서 놀고 오자마자 밥 타령인지.
“너한테 줄 밥 없어.”
“거-짓말. 밥을 두 그릇 양만 했겠어, 네가? 혹시 몰라서 나 주려고 넉넉히 했지? 그렇지?”
이런 귀신 같은 새끼.
못마땅한 눈으로 머리를 한 대 쥐어박자, 지석이 두 손으로 아픈 부위를 꾹 누르며 장난스레 울상을 짓는다. 그게 워낙 웃긴 얼굴이라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공기가 바뀌고 나니 체기가 몰려오던 게 싹 사라져버렸다. 그즈음엔 우리를 가만히 보고 있던 지건 형이 부엌을 나가 방으로 돌아갔고, 난 강지석의 갖은 호평을 들으며 그가 밥 두 공기를 뚝딱 비울 때까지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날 밤.
어느새 자정이 다 되었기에 슬슬 잘 준비를 했다. 책의 펼쳐진 페이지에는 포스트잇이 몇 개 붙어있었는데, 아직 완전히 다 본 것은 아니어서 책갈피를 끼워 넣었다. 조만간 이쪽 페이지에 있는 예시를 토대로 자그마한 프로그램이라도 하나 만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꽤 어렵긴 하지만 애플리케이션을 제작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코딩 부분이니 지건 형에게 도움을 좀 받아야겠다.
‘일단 표시해놓고 형 오면 물어볼까.’
이해가 덜 된 부분만 해결되면 당장이라도 만들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서 책갈피를 껴둔 책을 그대로 책상 위에 둔 채 웹서핑이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한창 빠져 있다가 뒤늦게 시간을 보니, 그새 30분이 훅 지나있다.
‘일하는 중인가?’
보통 자정쯤 데리러 오고, 일이 있어서 자는 게 늦어질 것 같으면 메시지를 먼저 보내 주곤 했다. 아직까지 휴대폰도 잠잠하고 데리러 올 기색이 없어,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막연히 기다리기엔 형도 내일 이른 아침부터 출근을 해야 하고 나 역시 아침에 수업이 있어서 최대한 빨리 나가야 했다.
10분 정도 더 기다려보던 나는 상황이라도 파악하기 위해 슬그머니 방을 나섰다.
내 방은 현관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었는데, 문을 열자마자 저 끝에 보이는 형 방으로 가기 위해서는 베란다가 있는 거실을 지나야 했다. 거기다가 형 방의 바로 옆은 지석의 방이었는데, 혹시라도 소리를 듣고 나올지 모르니 조심해야 했다. 아무래도 늦은 밤에 은밀히 형 방으로 향하는 모습은 들키면 조금 민망하다.
발소리를 죽이며 불 꺼진 거실을 지나기 위해 한 발 내디뎠을 때였다.
‘응? 어디서 담배 냄새가…….’
어렴풋한 담배 냄새에 이상해하고 있는데, 희미한 사람 목소리까지 들렸다. 아파트 밖에서 나는 소리라고 하기엔 귀 기울여 들으면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느낌이었다.
두리번거릴 필요도 없었다. 탁 트인 거실의 베란다로 향하는 통유리, 그 얇은 커튼 너머로 두 사람의 달빛 받은 그림자가 보였다. 흠칫하며 놀랐지만 그게 익숙한 키의 두 남자라는 것을 알아채는 건 금방이었다.
낯선 담배 냄새와 두 사람의 대화에 호기심이 생긴 나는 살그머니 베란다 문에 가까이 다가섰다. 얇은 커튼이긴 해도 이쪽은 어두운 공간이라서 그런지 두 사람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난 형이 무슨 생각인지 알고 싶은 거라니까?”
지석의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지석이 이러는 건 너무도 드문 일이었다.
“생각이랄 게 있나. 넌 한민아랑 잘만 놀다 들어왔으면서 왜 나한테 성질부리냐?”
“내가 지금 가만히 있게 생겼냐고!”
지석의 언성이 높아졌다. 이 역시 놀랄 정도로 드문 일이기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보다도 민아 누나의 이름이 나왔다는 데에 가슴이 크게 철렁했다. 저릿저릿거리는 가슴을 주먹으로 꾹 눌러 진정시켰다.
“목소리 낮춰, 강지석.”
지건 형의 실루엣이 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위협하듯 말했다.
“옛날부터 한민아라면 그저 좋다고 따라다녔잖아. 간 김에 원 없이 놀다 오지 그랬어.”
가슴이 철렁하다 못해 머리가 울릴 정도로 쿵쿵 뛰어댔다. 무거운 발이 어느샌가 슬쩍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아니면, 이제 한민아 안 좋아하냐? 네 이상형이라며.”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강지석이 그의 입으로 그렇다고 말해버리기라도 한다면…….
“좋아해.”
다리가 순간적으로 휘청했다. 가슴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숨이 가빠졌다.
“아직도 민아 누나 좋아해, 나.”
확인사살을 당한 느낌이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강지석의 말은 너무도 또렷해서 부정할 수가 없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있던 지건 형이 몸을 돌려 난간에 기댄 채 이쪽을 바라보았다. 커튼의 얇은 틈새 사이로, 형의 예리한 눈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눈이 마주쳤을 땐 들켰으니 얼른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보다도 그저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천천히 뒷걸음질 치는 내 귀로 지건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그거면 됐어.”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거친 숨을 소리 내어 토해낸 후, 힘이 빠진 것처럼 침대에 대(大)자로 드러누웠다.
아직도 심장이 진정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새삼스럽게 왜 이래.’
헛웃음과 함께 스스로를 비웃었다.
‘알고 있었으면서 이제 와서 뭘…….’
강지석이 민아 누나를 좋아한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말해왔던 이상형도 그렇고 민아 누나를 바라볼 때의 눈빛도 그렇고. 아마도 강지석을 오래 봐온 사람이라면 금세 알아채지 않을까.
조금 전의 대화는 마치 가망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에게 다시금 불가능이라는 쐐기를 박아버린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을 들게 했다.
듣지 말 걸 그랬다. 바로 방으로 돌아갔으면, 아니, 형이 부르기 전까진 방 밖으로 나가지도 말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애초에 같이 살지 않았다면 이런 이야기를 들을 일은 없었을지도…….’
자잘한 것부터 하나하나 다 후회되었다. 짐작만 할 뿐, 모를 때가 나았는데.
우웅-
눈을 꾹 감은 채 숨을 고르고 있는데, 바지 주머니에 넣어뒀던 휴대폰이 잘게 진동한다. 꺼내 들어보니 메시지가 한 통 와 있다.
[방으로 와. 위로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