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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고리-14화 (14/99)

14화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강지석을 민아 누나와 함께 보내고 난 후, 난 홀로 마트로 향했다. 미리 살 것들을 적어둔 휴대폰 속 메모장이 아니었더라면 빈 카트를 한참 동안 끌기만 하다가 뭘 사야 하는지도 잊은 채 그냥 나왔을 것 같다.

사려 했던 걸 이것저것 다 산 것까진 좋은데, 문제는 이게 둘이서 들 생각으로 가득 적었던 거라서 내겐 꽤 무거운 짐이 되어버렸다.

물건이 담긴 두 개의 봉투를 각각 양손에 하나씩 든 채 마트를 걸어 나와 지석의 집으로 향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내 머릿속에는 민아 누나와 함께 멀어져가던 지석의 뒷모습이 끝없이 재생되고 있었다.

서운한 마음보다도 불안한 마음이 더 컸다. 6년 만에 만난 사이라고 하니 반가움이 클 만도 했지만, 민아 누나를 바라보는 지석의 눈빛이 여느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더군다나 예전에 지석이 말했던 이상형이 그 누나라는 걸 알아채고 나니 전신에 힘이 쭉 빠지는 느낌도 들었다.

‘그래서 어쩌고 싶은 건데, 신우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석과 잘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의 옆에 다른 사람이 함께하게 될 걸 예상치 못한 것도 아니었다. 언젠가 그가 원하는 이상적인 여자를 만나 사귀다가 결혼을 하게 될 테니, 그때는 티 내지 말고 쿨하게 보내 주자고 마음먹었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그리 쉬운 게 아닌가 보다. 목구멍 아래쪽을 굴러다니던 가상의 작은 돌멩이들이 이젠 가슴 언저리까지 긁어대고 있었다. 체념보다 먼저 고개를 든 질투심이 스스로를 상처 내고 있었다.

여자였으면 좋았을걸.

아담하고 밝은 사람이었으면 좋았을걸.

강지석보다 연상이었으면 좋았을걸.

짧지만 확실하던 강지석의 이상형을 머릿속에 그리면 그릴수록 나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반면 강지석이 그리도 살갑게 대하며 따르던 민아 누나는 너무도 딱 일치하는지라, 그에게 굳이 누나가 이상형인지 묻는 것조차 민망할 정도였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이 복잡한 마음을 어떻게든 가라앉히고자 안간힘을 쓰는 것뿐이었다. 그러다 보면 미리 준비해왔던 것처럼 편안히 체념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생각에 빠져 걷다 보니 양팔이 통째로 뽑힐 것 같은 무게감마저 잊었던 모양이었다. 손바닥이 아플 정도로 눌리고 쓸려서 봉투를 놓칠 뻔할 때가 돼서야 정신이 들었다. 하필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지려는 봉투에 계란이 들어있었다. 얼른 손에 힘을 주어 그걸 다시 꽉 붙잡으려는데, 뒤에서 갑자기 누군가의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이리 줘.”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고개를 홱 돌렸다.

어느새 내 뒤에는 지건 형이 서 있었다. 왜 형이 이제 막 해가 저물기 시작한 이 시간에, 그것도 어떻게 내 뒤에 있는지 의문이었다.

지건 형은 내게서 봉투를 죄다 빼앗아가더니만 그것들을 말없이 뒷좌석에 실었다. 순식간에 묵직한 두 개의 짐이 사라진 나는 피가 통하지 않던 양 손바닥을 번갈아 주물러댔다. 뒷좌석 문을 쾅 소리를 내며 닫아버린 형이 그새 가까이 다가와 내 손바닥을 붙잡아 폈다. 봉투 손잡이를 잡고 있던 줄이 아직도 선명하고 그 줄을 기점으로 근처가 새하얗게 질려 있다.

“나 부르지 그랬어.”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손바닥을 꾹꾹 눌러 혈액을 순환시켜주던 형이 눈을 맞춰왔다. 날카롭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고 나서야 내 입이 열렸다.

“아직 야근인 척하고 계셔야 하는 시간 아니에요?”

“맞아. 근데 오늘은 지석이가 집에 늦게 들어올 것 같아서 일찍 가려고 했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강지석이 전화라도 했나?

어이없게도, 난 강지석이 혹시나 날 걱정해서 형에게 연락이라도 한 줄 알았다. 다 큰 청년을 친구가 일일이 걱정하는 게 웃긴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기대가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형은 그런 내 기대를 박살 내듯, 휴대폰을 들어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민아 누나와 지석이 함께 찍은 셀카였는데, 손을 든 각도로 보아 누나가 직접 찍은 것 같았다.

“한민아가 보냈어. 지석이랑 같이 백화점 돌고 있다고 나보고도 오라더라.”

사진을 보며 허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사진 속 민아 누나보다도 더 신나 보이는 건 다름 아닌 강지석이었다. 사이 좋게 누나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는 걸 보니 속이 지끈거렸다.

“형이랑 친했다면서요. …형도 가지 그러셨어요.”

지석이라면 지건 형이 링의 상대와 만나고 있을 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테지만, 그런 것쯤이야 형은 얼마든지 둘러댈 수 있었다. 6년 만에 만난 친구이고 지석보다 더 그녀와 가까운 사이이니만큼 오늘 같은 날 회포를 풀 수도 있었지 않을까.

애써 태연한 척했는데, 어째 형에게는 소용이 없었나 보다.

“친한 건 맞지만 굳이 풀 회포도 없어.”

형은 내 손을 붙잡고서 그의 차로 끌고 가더니 조수석에 나를 앉혔다. 그러더니 직접 안전벨트를 매어주고 강지석과 똑같은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본다.

“그리고 그건 네가 바라는 게 아니잖아.”

속마음을 통째로 읽힌 것만 같았다.

형은 강지건이 아닌 강지석인 척 말하고 있었다. 내가 바라던 말을.

피식 웃으며 이젠 혈액이 너무 돌아서 붉게 변해 버린 손바닥을 꾹꾹 눌러댔다.

“그렇게 제가 티가 많이 나요?”

“아니.”

“그럼 어떻게 아는 건데요.”

“티는 안 나도 알겠던데. 네가 어떤 상태인지.”

또 한 번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마치 매일 강지석을 눈여겨보는 나 같았다. 겉으로 티 내지 않아도 어떤 상태인지 알아채고, 작은 행동이나 눈빛만 보고도 강지석의 감정을 읽어낼 수 있는 나와 같다.

‘이것도 내가 바라는 강지석의 모습을 흉내 내주는 건가.’

강지석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똑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원하는 관심을 주는 상황이란, 가슴 속 어딘가의 묘한 간지러움을 가져왔다.

조수석 문을 닫아주고서 운전석으로 돌아온 형은 곧바로 차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형의 휴대폰이 몇 번 진동을 울렸다. 전화인 것 같아서 받아도 된다고 했더니, 액정에 뜬 이름만 확인하고서 귀찮은 듯 전원을 꺼버렸다. 혹시 민아 누나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걸 알기에 굳이 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오늘 메뉴는 뭐야?”

집에 도착해서 주차장으로 들어갈 때쯤 형이 물은 말이었다.

“소고기뭇국에 달걀장조림 정도이긴 한데, 어차피 저 혼자 먹을 테니까 그냥 라면이나 먹을까 생각 중이에요.”

그런 것치고는 양손 가득 장을 봐버렸지만.

안전벨트를 풀던 형이 미간을 모으며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그것만으로도 아까와 또 다른 차가운 분위기가 풍겨, 나도 모르게 긴장했다.

“왜 혼자 먹어?”

“그거야 형은 당연히 드시고 오셨을 테니까…….”

말을 하다가 형의 얼굴이 여전히 풀어지지 않는 걸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아직 저녁 식사 안 하셨어요?”

형의 퇴근 시간인 6시보다 한 시간 반이나 늦은 시간이라서 당연히 먹고 왔을 줄 알았는데.

지건 형은 약간 찌푸리고 있던 얼굴을 펴며 강지석과 같은 서글서글한 눈웃음을 띄웠다.

“같이 먹자. 배고프다, 우서야.”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형의 커다란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형에게 쓰다듬어지고 있어서 그런지 이젠 얌전히 머리를 내줄 정도로 익숙해져 버렸다.

내 안전벨트까지 풀어주려는 지건 형을 만류하고서 직접 풀고 나오자, 난 꽤 무겁게 들었던 봉투를 저 형이 거뜬히 들고 나왔다. 그걸 보며 역시 운동을 다니며 팔에 근육이라도 좀 만드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들어와 재료를 손질하고 있는데, 씻고 나와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지건 형이 등 뒤에 찰싹 붙어서 그걸 다 구경하고 있다.

“형, 신경 쓰이는데요.”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움직이면 움직이는 대로, 멈춰있으면 멈춰있는 대로 등 뒤에 붙어있으니 신경이 쓰이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주말 외에는 매번 밖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늦게 들어오던 형이었기에 이처럼 요리하는 걸 신기한 듯 보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단정하게 썰어둔 채소를 한 접시에 몰아넣으며 형에게 보란 듯 눈치를 줬다.

“바로 뒤에 서 있는데 어떻게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요리하는 게 신기해서 그래. 우리 가족들은 전부 요리와 담쌓고 사는 사람들이라서.”

지건 형이 다정한 얼굴로 웃어 보이더니 내가 찬장에서 꺼내려 했던 접시를 가뿐히 꺼내어 내려놔 준다. 뭘 꺼내려 했는지도 말하지 않았는데 신기할 정도로 감이 좋은 건지, 아니면 눈치가 빠른 건지, 형은 이후에도 내가 뭔가를 하려 할 때마다 한발 앞서서 움직여줬다. 눈치 빠른 주방보조라도 들인 느낌이다.

막상 주방보조라고 생각하니 형의 머리에 요리사 모자가 씌워진 걸 상상하게 된다. 어떻게 이렇게 안 어울리지 싶을 정도로 괴리가 심한 상상이었던 터라 나도 모르게 작은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더불어 형에게 고마워졌다. 형이 함께 있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컵라면 하나 끓여놓고서 면이 퉁퉁 불어버릴 때까지 지석과 민아 누나만 생각했을 거다.

준비하던 음식들이 완성되어 따끈한 밥과 함께 테이블을 채웠다. 반찬이 그리 많지는 않은 조촐한 식단이었으나, 지건 형이 워낙 감탄하며 먹어준 덕분에 뿌듯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석이 좋아하는 것들로만 짜둔 머릿속 식단 사이로 형이 선호하는 음식을 넣어보고자 입을 여는데.

삑삑-

현관문에서 도어 록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민아 누나와 한창 쇼핑 중이어야 할 강지석이 급하게 들어왔다. 지석은 부엌의 식사용 테이블에 앉아 식사 중이던 나와 지건 형을 바라보며 왜인지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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