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안녕, 후배들!”
지석만큼이나 웃는 얼굴이 따뜻한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누군지 모르겠는 나와 달리, 그녀를 알아본 지석은 단번에 밝은 얼굴을 했다.
“누나, 오랜만이네요!”
“오냐, 그래.”
등에서 내려와 까치발을 들고서 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여자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를 훑어보았다.
“몇 년 안 봤다고 그새 엄청 컸다, 너.”
“누나가 마지막에 봤을 때도 컸거든요?”
“에이, 그땐 내가 까치발 없이도 쓰다듬었는걸.”
짧은 대화만으로도 두 사람이 꽤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지석에게 눈빛으로 누구냐고 묻자, 그가 반가운 얼굴로 여자를 소개했다.
“지건이 형 대학 동창인 누나야. 우리한텐 선배님이고.”
그러고 보니 이 대학은 지건 형이 다녔던 곳이었다. 우린 학과도 그렇고 동아리마저 형을 따라 하듯 줄줄이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선배라는 말에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가볍게 인사하자, 누나가 이번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한민아라고 해. 지석이 친구?”
“네.”
“아하….”
순간 민아 누나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로 워낙 찰나였던 데다가 지석이 부르자마자 웃는 얼굴로 그를 돌아보는 바람에 확신할 수 없었다.
“언제 돌아왔어요? 대학 졸업하자마자 해외로 유학 갔다고 들었는데.”
“며칠 전에 돌아왔어. 6년 채우고 왔지.”
강지석과 그렇게 붙어 다니면서도 내가 민아 누나를 한 번도 보지 못했을 만도 했다. 6년이라면 내가 고1일 때, 지건 형을 기준으로 하면 딱 형이 대학을 졸업한 직후쯤에 해외로 간 것이었다. 마치 바톤 터치라도 하듯, 그 무렵에 내가 강지석과 친해지기 시작한 거고.
그래서 몰랐던 거구나, 하고 생각 중인데 민아 누나의 팔이 자연스레 지석의 팔을 감았다.
“진짜 보면 볼수록 지건이 판박이네. 아니지, 우리 지석이가 좀 더 낫나?”
‘우리’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자그마한 돌멩이가 목구멍 안쪽을 굴러다니는 듯한 느낌이 났다. 지석은 어째서인지 평소보다 더 밝은 얼굴로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럼요, 누나. 솔직히 형은 이제 아저씨잖아요. 파릇파릇한 저 같은 청년이 훨씬 낫죠.”
“지건이를 아저씨라고 부르면 나도 아줌마라고 불러야 할 판인데?”
“에이, 누나는 열외에요. 어떻게 누나는 외국물을 먹어도 안 변해요? 신입생이라고 해도 믿겠네.”
“입에 침 바르고 말해. 그래도 칭찬 들으니까 기분은 좋다, 야.”
두 사람의 스스럼없는 대화를 듣고 있다 보니 왜인지 소외감이 느껴졌다. 그 소외감의 이유 중 하나는 아마 민아 누나가 아직까지도 지석의 팔을 두 팔로 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불어 그녀를 바라보는 지석의 눈동자가 한껏 들뜬 것처럼 보여, 왠지 불안하기도 했다.
누나는 지석의 팔을 끌며 우리가 향하던 동아리방 쪽으로 앞서 걸어갔다.
“동아리는 여전하지? 지건이 말로는 인원도 많다던데.”
“어? 형하고 통화했어요?”
“응, 내가 아직도 연락하고 지내는 한국 친구가 지건이 뿐이라서.”
신난 듯 지석을 끌고 가는 민아 누나를 보다 보니 가슴이 조금 답답해졌다. 지석과는 오래전부터 잘 알던 사이이니만큼 충분히 반가워할 만도 했지만, 그걸 지켜보는 나로서는 꽤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자꾸만 지석의 팔을 온몸으로 휘감듯 두 팔로 끌어안은 누나가 너무도 신경이 쓰였다.
나와 지석이 들어가 있는 동아리의 동아리방은 민아 누나가 기억하는 것과 같은 건물에 있었지만, 6년 전에 비해 인원이 많이 늘어난 만큼 꽤 큰 방으로 옮겨진 게 벌써 2년이었다. 새로워진 구조의 넓은 동아리방을 눈에 담으며 신나 하던 민아 누나가 그 안에 머물고 있던 몇 명의 학생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사이 지석에게 민아 누나에 대한 부가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지건 형과 수석 자리를 두고 매번 싸우던 사람이라는데, 말이 싸우는 거지 실상은 투닥거림이 잦은 친한 친구였다고 한다. 대학 입학 시절부터 쭉 같이 다녀왔고 친하게 지내면서 자연스레 지연 누나나 지석과도 알게 되었는데, 그렇게 치면 햇수로 근 10년 전부터 알던 사이가 된다. 낯가림 없이 누구든 금세 친해지는 쾌활한 성격의 민아 누나는 그때부터 지석을 친동생처럼 아끼고 귀여워했다고 한다.
그런 얘기를 들으며 왠지 지석마저 신이 난 것처럼 보이기에 가만히 보고 있으니,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난 품에 쏙 들어오는 아담한 체구에 밝고 쾌활한 여자가 좋아. 연상이면 더 좋고.”
언젠가 일말의 기대감을 갖고 물었던 이상형에 대한 지석의 대답이었다. 그중에서 어느 것 하나 해당되지 않던 나는 그 말을 들었던 날부터 씁쓸히 내 마음을 저 안쪽 깊숙이 감추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건…….
‘민아 누나잖아.’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한 얼굴로 주저 없이 이상형을 말하던 고등학생 강지석의 머릿속엔 이미 민아 누나가 자리 잡고 있었던 거다. 그걸 알아채고 나자 가슴 속 어딘가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저절로 입가가 굳어지고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지석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고개를 조금 돌려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온 민아 누나가 지석의 앞에 가까이 붙어 섰다.
“지석아, 오늘 누나가 쇼핑 좀 해야 하는데 같이 가줄 수 있어?”
“어, 저 이따가 강의 하나 더 있는데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되지, 뭐. 강의 끝나고 같이 가자, 응?”
큰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싱긋 웃고 있으니, 지석의 얼굴이 스르르 풀어지는 게 보였다. 원래부터 풀어져 있던 놈이긴 해도 오늘따라 저 표정이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절해. 거절하라고, 강지석.’
속으로 몇 번이나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그래 봐야 사람들 눈이 있어서 압박다운 압박도 전해지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거듭 ‘거절해’라는 말을 속에서 되풀이했다.
강의가 끝나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같이 마트에 들러서 강지석이 해달라고 했던 소고기뭇국 재료를 사야 하고, 언제 꺼질지 모를 것처럼 깜빡거리던 베란다 등불을 갈기 위해 전구도 알아봐야 한다. 식사를 하고 나면 재활용 쓰레기를 묶어서 밖에 내다 놔야 하고, 그 후엔 조별과제의 발표까지 맡아버린 강지석을 위해 그의 발표 상대가 되어줘야 했다.
오늘은 그 정도로 바빴다. 그러니 강지석이 민아 누나의 요청을 받아줄 리 없을 텐데.
“그러죠, 뭐.”
지석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내가 원했던 말이 아닌 너무도 가벼운 승낙이었다.
지석은 고개를 돌려 내게 시선을 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당연히 같이 가자는 말을 할 줄 알았다.
“우서야, 오늘 강의 끝나면 너 먼저 들어가야겠다. 갈 때 연락할게.”
입을 열어 알았다고 말해야 하는데 어째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목구멍 안쪽의 보이지 않는 작은 돌멩이가 두 개, 세 개, 여러 개로 늘어나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대답을 하기도 전에 민아 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끼어들었다.
“뭐야, 둘이 같이 살아? 기숙사?”
“아뇨. 저랑 지건이 형까지 해서 셋이 살아요.”
“진짜? 대박! 아, 지건이도 부르자.”
민아 누나가 방방 뛰듯이 말하자, 지석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형은 안 될 거예요. 매일 야근이거든요.”
링에 대해 말하는 대신 야근이라고 대답한 지석이 씩 웃어 보였다.
“대신 제가 누님 쇼핑을 책임지겠습니다!”
“좋아, 후배님! 보상으로 뭐든 도와줄 일 있으면 말만 하라고.”
“누나, 그럼 저희 조별과제 내용 좀 봐주실래요? 이번에 조별과제 내용이 좀 복잡해서…….”
“도와준다고 하기가 무섭게 바로 말해버리네. 뭐, 그런 건 또 내가 전문이지. 자료든 파일이든 다 줘봐. 한번 보자.”
그새 의자를 빼 앉은 민아 누나가 책상을 손바닥으로 탁탁 두드리며 손가락을 까딱했다. 지석은 나와 상의도 없이 노트북을 꺼내 누나의 앞에 놔주었고, 나와 함께 보기로 했던 다른 조원의 자료 파일을 가장 먼저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우와, 엄청 어려운 걸 하네. 이거 자료 조사 빡셀 텐데.”
“그래서 지금 다들 탈주하고 난리 났어요. 살려주세요, 누나.”
“생각보다 정리도 잘 되어있고 자료도 많이 구했네. 여기에 코딩 샘플 하나 넣으면 어때?”
“어떤 샘플이 좋을까요?”
“이 자료가 어필되어야 하니까 내용 중 이 부분을 코딩해서 이쯤에…….”
조언해주는 민아 누나와 그걸 바짝 붙어서 귀담아듣고 있는 지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의자를 꺼내 앉아 함께 그걸 들여다보는 척했지만 정작 내 눈에 들어오는 건 두 사람의 가까워진 거리였다.
무릎 위에 올려둔 두 주먹이 꽉 쥐어지며 손바닥에 손톱이 아플 정도로 박혀버렸다. 그로 인한 아릿함보다도 목구멍 아래를 드륵드륵 굴러다니는 작은 돌멩이들의 느낌이 너무 신경 쓰여서 그런지 과제에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