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내가 그렇게도 티를 내고 다녔나, 하고 생각해 보지만 딱히 이렇다 할만한 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니라며 잡아떼기엔 지건 형의 눈빛이 이미 확신에 차 있다.
죄를 지은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내 얼굴을 보진 못하지만, 아마 손에 든 커피처럼 어둡게 가라앉아 있을 것 같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를 죄책감이 차오르고,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어린아이처럼 심장이 급하게 뛰어댔다.
“딱히 뭐라 하려는 건 아니니까 고개 들어.”
형은 내가 강지석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사실 난 네가 지석이를 좋아하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예?”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고개를 들었다. 가까운 거리 덕에 형의 진한 검은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이 훤히 보였다.
“난 연애를 하더라도 결혼 생각은 없는 사람이야. 애초에 누구랑 연애할 생각도 없고.”
그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갸웃했다. 링이 생기기 며칠 전에 강지석에게 들은 바로는 지건 형에게 분명 괜찮은 연하 남자친구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형은 마치 애인이 없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강지석 말로는 형에게 연하 애인이 있다고…….”
“응, 있었지. 근데 헤어졌어.”
“언제요?”
“네가 내 상대라는 걸 안 직후에.”
형이 어려운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어째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마치 내가 링의 상대이기 때문에 애인과 헤어졌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정확히는 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리했다는 것일 테지만.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헤어질 것까지는…….”
“링으로 연결된 사람과 매일 함께 자야 하는데 그걸 이해하고 계속 사귀어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차라리 나 혼자 나쁜 놈 되고 깔끔하게 정리하는 게 낫지.”
들으면 들을수록 얼굴과 이름도 모르는 형의 애인에게 괜히 미안해졌다. 예기치 못하게 내가 끼어버리는 바람에 둘 사이가 끝나버린 것 같았고, 실상 그게 맞았기 때문에 내 가슴에 또 하나의 죄책감이 묵직하게 자리 잡으려 했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형의 손이 내 머리를 기분 좋게 쓰다듬었다.
“신경 쓰지 마. 어차피 안 맞는 부분이 많아서 헤어질 생각이었어. 오히려 이번 일을 계기로 정리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형이 덧붙여준 말 덕분에 조금 위안이 되었다. 그래도 가슴의 무게는 완전히 덜 수가 없어서 눈을 내리깔고 있는데, 형이 손을 거두며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우리, 편하게 거래를 한다고 생각하자.”
“거래…요?”
고개를 드니, 강지석을 닮은 휘어진 눈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네가 보기에 난 어때 보여? 이렇게 웃고 있으니까 지석이랑 굉장히 닮은 것 같지 않아?”
“굉장히 닮은 정도가 아니에요. 얼핏 보면 정말 강지석인 줄 알겠어요.”
형의 외견은 강지석과 너무나도 닮은 반면 원래의 분위기는 판이한 편이었다.
강지석은 웃지 못해 죽은 귀신이 붙기라도 한 것처럼 가만히 있을 때조차 웃는 얼굴이고, 목소리도 밝아서 듣는 이로 하여금 기분을 한층 업되게 만든다. 가끔은 평온하거나 태평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 천진한 미소와 함께 남을 과할 정도로 배려하기도 해서 자주 다른 사람의 호구로 낙인찍히기도 한다.
반면 지건 형은 웃을 때라면 몰라도 웃지 않을 땐 지석에 비해 약간 더 올라간 눈매와 낮은 목소리 때문에 다소 날카롭고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보이지 않는 벽이 쳐진 느낌 정도면 다행이지만, 분위기 자체는 말 한마디 걸지 못할 정도로 차갑다. 이 집에 처음 발을 들였던 날, 오랜만에 지건과 만났음에도 선뜻 뭐라 말을 걸기 힘들었던 게 그런 이유였다.
전혀 다른 분위기였기에 비슷한 체격에 쌍둥이 같은 얼굴이더라도 두 사람을 쉽게 구분해낼 수 있었다. 바꿔 말하면, 둘이 서로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맞출 수만 있다면 얼핏 봐서는 구분하기 힘들 것 같았다. 바로 눈앞의 지건 형처럼.
지건 형이 강지석을 따라 하듯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잘 생각해, 우서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만, 지석이가 네 마음을 받아줄 일은 없을 거야.”
가슴이 쿵, 큰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건 형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여태껏 친구로라도 곁에 있고자 입을 다물어 왔던 거다.
알고 있다. 충분히 알고 있는데, 그래도 가슴이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메리카노가 아니라 에스프레소를 쏟아 넣은 것처럼 입 안이 너무 썼다. 굳이 확인사살을 하듯 그 말을 한 지건 형이 원망스러워지려 했다.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건 형이 손을 뻗어 내 아랫입술을 엄지로 누르고는 느릿하게 빼준다.
“그러니까 넌 날 이용해.”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기 위해 눈을 내리깔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제어할 틈도 없이 시야가 올라간다. 두 눈에 담긴 건 보자마자 강지석을 떠올리고 말 정도로 자상한 얼굴이었다.
“네가 원한다면 지석이 흉내 정도는 얼마든지 내줄 수 있어.”
바로 지금처럼.
형이 직접 입에 담아 내뱉지는 않았던 말이 내 머릿속에서 멋대로 울려 퍼졌다.
“내게 필요한 건 일에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의 충분한 숙면이야.”
형은 나를 압박하듯 내 좌우 허벅지 위에 두 손을 얹으며 조금 힘을 실었다.
“링을 해제할 수 있는 방법은 계속 찾을 테니까, 그때까지만이라도 어때?”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한참 동안 형의 눈만 바라보고 있었다.
* * *
“크으으-!”
길게 기지개를 켜던 지석이 뒤이어 앉은 채로 책상 위에 철푸덕 엎드려버렸다. 그의 밑에 깔린 전공책이 찢어질 것처럼 구겨지는 것을 보며 급히 그의 팔을 들고는 손으로 일일이 종이를 펴주었다.
“두 시간 남는데 어떻게 할 거야?”
다음 강의까지는 꽤 시간이 비어있었다. 정리한 전공책을 건네주자, 늘어져 있던 강지석이 그것을 받아 챙기며 힘없이 대답했다.
“집에 갔다간 한없이 자버릴 것 같으니까 동방이나 가 있자.”
“거기라고 네가 안 잘 것 같아?”
“자겠지. 그래도 최소한 네가 깨워줄 순 있을 거……. 아 참, 어차피 우리 같이 살지.”
대수롭지 않게 뱉은 지석의 말에 가슴이 간질거렸다. 헤실거리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같은 집에 살게 된 지 벌써 사흘째라는 게 새삼스러워진다.
집이 가깝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귀찮은 게 사실이기도 하고, 오늘 아침에 조원 중 한 명이 보내온 자료를 확인하고 미리 정리해둘 겸 해서 가까운 동아리방으로 향했다.
“근데 너 요즘 알바 안가던데, 그만뒀어?”
가는 도중, 지석이 뒤늦게 생각난 듯 물었다. 알바하는 곳의 사장님 역할이었던 지건과 같이 살게 된 마당이라 딱히 시간을 내어 나갈 필요가 없었다. 그럴 시간 동안 지석과 함께 집에 붙어있었는데, 참 빨리도 묻는다.
“응, 나랑 안 맞는 것 같아서.”
“잘 생각했어. 과제도 많아서 시간 없는데 무슨 알바냐. 그러다 몸 상하지.”
별거 아닌 말이었지만 날 걱정해주는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피식 웃으며 ‘며칠 전에 감기로 앓아누운 사람한테 듣고 싶지는 않은데’라고 말하자, 끙끙거리는 얼굴로 너무한다는 말만 반복한다.
“그래도 다행이야. 너도 그렇고 형도 그렇고, 둘 다 안색 안 좋아서 걱정했었는데.”
지건 형을 떠올리던 지석이 걸음을 우뚝 멈추더니, 갑자기 내 팔을 잡아 돌리고는 귓가에 입을 가져갔다. 놀라서 흠칫하며 굳어 있는 내 귓가로 그의 은밀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번에 우리 형, 링이 생겼다고 했잖아. 처음엔 누군지 몰랐는데, 지금은 상대를 찾았나 보더라고.”
지석에게 붙잡힌 팔과 그의 음성이 닿은 귓가가 딱딱히 굳은 것 같았다. 설마 나인 걸 눈치챈 건 아니겠지.
내색하지 않은 채 누구냐고 물었다. 다행히 지석은 상대를 정확히 짐작한 게 아니었다.
“회사 일 마치자마자 밖에서 잠깐 같이 잤다가 들어오는 것 같아. 상대가 누군지는 나도 모르고.”
지석이 짐작하는 그 시간엔 사실 지건 형이 일부러 밖에서 없는 일도 찾아다가 시간을 보내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야 링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강지석이 ‘링의 상대와 밖에서 일찍 자고 오는구나’ 하고 생각할 테고, 괜히 의심할 일을 없게 만들어 줘야 밤늦게 걱정 없이 곯아떨어져 줄 것 같았다.
실제로 지건 형이 의도한 대로 생각하고 있던 강지석은 이번에 흥미 반, 걱정 반인 얼굴을 했다.
“괜찮은 걸까? 링 때문에 애인도 정리했다고 하던데, 이러다가 형이 혹시라도 결혼 상대라며 링의 상대를……!”
“왁-!”
한창 말을 하던 지석은 갑자기 들린 큰소리와 두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에 흠칫하며 굳어버렸다. 나도 같이 놀라서 지석의 뒤를 보는데, 처음 보는 작은 체구의 여자가 그의 등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어째서인지 그녀를 돌아본 강지석의 눈빛이 반갑게 빛났다.
나와 눈이 마주친 여자가 배시시 웃으며 쾌활하게 인사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