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지석의 집에는 세 사람이 살고 있다.
지건 형과 지연 누나, 그리고 강지석.
그 안에 뜬금없이 내가 왜 들어가나 싶었다. 방도 세 개고 남매 셋이서 사는 집에 외부인인 내가 왜?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지석이 알아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지연 누나네 회사가 판교로 이전 중이었거든. 며칠 뒤부터는 그쪽으로 출근해야 해서 근처로 오피스텔을 잡을 거야. 그래서 방이 하나 비어. 월세 안 받을 테니까 몸만 와.”
마지막 말이 좀 설레지만 그걸 다 떠나서 짚을 건 짚어야 했다.
“잠깐만…. 어차피 너흰 월세 낼 사람이 필요한 것도 아니잖아.”
한 달에 기껏해야 공과금과 관리비만 내면 되는 곳인데 굳이 방 하나 빈다고 해서 가족도 아닌 타인을 데려다 놓을 필요가 있을까.
“형도 불편하지 않겠어? 나야 너와 친구라고는 하지만…….”
“애초에 지건이 형이 제안한 거야.”
“뭐? 형이 왜?”
“내가 너 원룸에서 혼자 산다고 했더니 요즘 세상이 너무 험해서 위험하다고 데리고 오라던데.”
마치 내가 연약한 어린아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내가 너 요리도 잘한다고 했어. 난 아직도 기억하거든. 네가 자취방에서 해줬던 파스타, 볶음밥, 김치찌개, 쭈꾸미 볶음, 불고기…….”
여태껏 해서 먹였던 음식들을 줄줄이 나열하는 지석을 보며 조금 이해는 갔다. 지석을 포함한 그쪽 남매는 요리와 담을 쌓고 지내는 사람들이라서 각자 할 수 있는 음식이 라면뿐이었고 그건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것도 컵라면.
음식 정도야 언제든 재료만 있으면 해줄 수 있지만, 그런 걸 다 떠나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때, 재킷에 넣어둔 휴대폰이 잘게 진동했다. 이런 아침 시간에 전화 올 곳이 없는데, 라고 생각하며 액정을 확인하자마자 흠칫했다.
“전화 좀 받고 올 테니까 자리 좀 지켜줘.”
“응? 누군데?”
“알바하는 곳 사장님.”
짧게 대답하고서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로 향했다. 그제야 전화를 받자 건너편에서 지건 형의 목소리가 파고든다.
-수업 중 아닌 거 아는데 왜 이렇게 늦게 받아?
지석과 완전히 똑같은 스케줄이라서 형 역시 다 꿰고 있나 보다.
“도서관이에요.”
사실은 도서관이 아니었더라도 이처럼 자리를 피해서 전화를 받았을 거다. 지석은 아직 나와 지건 형이 연락처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애초에 지석과 과제를 하던 날 외에는 만난 적도 없는 줄 안다.
지건 형과의 관계를 알리고 싶지 않아서 더 조심하던 난 지석에게 들었던 내용을 확인하고자 했다.
“형, 저보고 집으로 들어와 살라고 했다던데, 정말이에요?”
-응, 정말이야. 들어와서 살아.
지나가다가 인사 한마디 건네는 것 같은 가벼움에 눈가가 찌푸려졌다.
“무슨 생각이신 거예요? 같이 살면 지석이가 다 알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어차피 둔해서 몰라. 그리고 너도 매번 호텔에서 자는 거 부담스러워했잖아.
그 말에는 물론 동의하는 바였지만, 지석에게 들킬 위험이 있다는 게 가장 문제였다. 그래서 고민할 수밖에.
-지석이도 방학 내내 집에 있을 거야. 월세도 들어보니까 상당하던데, 돈도 아끼고 잠도 푹 자고 집에 있으면 지석이가 놀아줄 거고.
강지석이 마치 장난감이나 애완견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한다.
지석에게 나와 지건 형의 관계만 들키지 않을 수 있다면 솔직히 혹할 만한 내용이었다.
-지석이는 어차피 자정되면 곯아떨어지는 놈이고 방도 따로야. 새벽에 내 방 와서 자고 지석이 깨기 전에 방으로 돌아가면 돼.
지건 형은 미리 준비하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술술 꾀어왔다.
-고민하고 있을 것 같아서 전화했어. 빨리 결정하고 들어와.
이미 지건 형은 내가 넘어갈 걸 뻔히 알고 있었다.
마치 형 손바닥 위에서 나 혼자 이리저리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 봐야 형 손바닥 위에 있는 건 변하지 않는데.
불안을 안고 고민하던 끝에, 결국 난 지건 형과 지석의 집에 눌러앉게 되었다.
* * *
지석의 집에 와보길 두 번째.
이번엔 완전한 손님이었던 이전과 달라서 그런지 느낌이 색달랐다.
“지연이 누나가 쓰던 침대긴 한데 매트 청소도 끝냈고 시트와 이불, 베개, 이런 거 다 새것이야. 책상은 사놓기만 하고 잘 안 써서 깨끗하고, 책장도 마찬가지. 아, 옷장은 좀 낡아서 형이 새로 들여놨어. 이렇게 보니 우리 누나… 정말 잠자고 옷만 갈아입고 다녔네.”
볼을 긁적이며 헤실거리며 웃는 지석의 말을 들으며 방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방도 넓은 편이고 가구도 깨끗하며 햇볕도 잘 드는 방이다.
방을 확인하며 얼마 있지도 않은 짐을 들여놓으려는데 지석이 먼저 달려가서 가장 무거워 보이는 상자를 번쩍 들어 올렸다.
“야, 그거 책 모아둔 거라 무거워. 허리 다치니까 같이 들어.”
“괜찮아, 별로 무겁지도 않고만.”
정말 거뜬한 것처럼 성큼성큼 가져다가 방에 옮겨놓더니, 내가 이제 막 집어 든 묵직한 상자를 홱 뺏어가 버린다.
“넌 상자 열고 정리나 해. 옮기는 건 내가 할 테니까.”
“괜찮아. 다 옮긴 다음에 천천히 정리하면 돼.”
“내가 안 괜찮아.”
난 무겁게 들었던 상자를 지석은 그 위에 다른 상자까지 얹어서 갖고 가 버린다.
“아-, 배고프다. 빨리 정리가 돼야 신 쉐프님의 풀코스를 먹을 텐데-.”
지석이 날 힐끔거리며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피식 웃으며 방으로 커터 칼을 챙겨가, 박스를 뜯기 위해 그 앞에 자리 잡았다.
“이사 당일은 짜장면인 거 몰라?”
“나 맨날 배달 음식 아니면 학식만 먹어서 집밥 먹고 싶어, 우서야.”
상자를 내려놓고서 옆에 찰싹 달라붙어 쭈그려 앉은 지석이 장난으로 울상을 지어 보였다. 삐죽 튀어나온 입술을 손등으로 아프지 않게 찰싹 때려주었다.
“알았으니까 먹고 싶은 거나 생각해 둬.”
“그럼 김치찌개!”
“그거면 돼?”
“앞다릿살 가득 넣은 거로 국물 진하게. 두부도 넣고.”
“참 구체적이기도 하다.”
강지석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물으면 단연코 김치찌개였던 터라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다. 때가 되면 한 번씩 원룸에 쳐들어와서는 김치찌개를 안주 삼아 대작을 하곤 했다.
슬슬 저녁 식사 무렵이니 얼른 해치우고 장이나 보러 갈 생각을 하며 짐 정리에 박차를 가했다. 짐이라고 해도 박스로 여섯 개가 전부였고, 그중 두 박스는 전부 책이었다. 옷가지도 별로 없었고 작은 원룸살이를 했던 터라 이렇다 할 큰 짐이 없었다.
옷이나 잡동사니 등의 정리는 금방 끝이 나고 지석의 도움을 받아 책을 차곡차곡 정리해나갔다. 정리가 끝날 무렵, 시간을 보니 벌써 6시가 넘어있었다. 지석과 함께 근처 마트에 들러서 장을 보고 돌아올 때까지도 지건 형에게선 연락 한번 없었다. 지금쯤이면 일도 끝났을 텐데.
식사를 차리면서 지석에게 묻자, 지건 형은 오늘 늦은 미팅이 있을 거라며 기다릴 필요 없다고 말했다. 난 참 못된 게, 그 말을 들었을 때 늦게 귀가할 형을 걱정하기보다도 지석과 둘만 있으니 함께 영화라도 보면 되겠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지석과 한가로이 영화를 보고 내일 있을 이른 강의를 생각하며 일찍이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망할 불면증 탓도 있지만, 바뀐 천장과 주변이 그제야 지석의 집에 함께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더욱 강하게 각인시켜 주었다. 가슴이 두어 번 강하게 뛰었다.
침대에 누운 채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어차피 지건이 형이 올 때까지는 못 자니까 공부나 하고 있을까.’
환경이 바뀌어도 새벽에 내가 할 일은 똑같았다. 원룸에 있던 것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고급스러운 의자에 앉아 책상에 책을 펼쳤다. 안 될 걸 알지만 부디 잠이 오길 바라며 애꿎은 책만 파고들었다.
어느새 책에 집중하며 필기까지 하고 있을 무렵.
어렴풋이 도어 록이 열리는 기계음이 들렸다.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해보니 벌써 새벽 1시다.
당장 잠은 안 자더라도 지건 형에게 인사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에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어느새 다가와 있었던 건지, 문 앞에 떡하니 서 있는 지건 형이 보였다.
“오셨…어요?”
인사를 건네는데, 어째 눈이 반쯤 풀려서는 차가운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다. 지독한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찌르는 거로 보아 상당한 양의 술을 몸 안에 들이부은 모양이다.
“형, 취했어요? 우선 씻고 주무셔야…….”
“아무리 마셔도 잠이 안 와….”
지건 형의 말이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혀가 꼬이기는커녕 평소보다 좀 더 가라앉은 목소리라서 오히려 멀쩡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 중인데, 형이 불쑥 들어와 문을 닫고는 돌연 날 덥석 붙잡아 안았다. 형의 두 팔에 전신이 단숨에 구속되고 술 냄새와 뒤섞인 희미한 담배 냄새가 파고든다. 움츠러든 내 어깨에 눈가를 묻은 형이 귓가를 핥는 것처럼 야릇한 음성을 흘린다.
“같이 자자…, 우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