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3. 신우서
지건 형의 알바 제안을 받은 지 사흘째.
오늘도 피곤한 얼굴로 형의 회사 사무실을 찾았다. 같이 손을 잡고 잠들어 주는 것만 해줘도 돈을 주겠다기에 나도 잠이 필요했던 거라서 그건 됐다며 마다했지만, 며칠간 이곳을 오는 내내 가슴에 들어앉은 죄책감은 도무지 가실 줄을 몰랐다.
‘그날 지석이 집에 가는 게 아니었는데.’
그랬으면 링이 발현할 일도 없었을 텐데.
살면서 내 손가락에 링이 생길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 했던 거라, 아직까지도 마음이 심란했다. 하물며 짝사랑하는 상대의 형이라니.
높다란 빌딩 중에서도 지건 형의 사무실이 있는 층에 조심히 내려섰다. 칼퇴근이 모토라던 지건 형의 말대로 다른 직원들은 다들 퇴근한 건지, 아직 7시도 안 되었는데 사방이 너무도 조용했다.
복도를 지나며 힐끗, 불 꺼진 사무실을 눈으로 훑어보다가 그 끝의 대표실 앞에 섰다. 괜스레 주변을 한 번 두리번거리고는 똑똑- 노크했다. 안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문고리를 돌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바쁜 타자 소리가 들렸다. 직원들은 모두 퇴근시켜놓고서 본인은 이 시간까지도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다.
“거의 다 끝났으니까 잠깐 앉아있어.”
내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바쁘게 손을 놀리는 그를 보며 슬쩍 데스크 앞 소파에 앉았다.
타닥타닥, 듣기 좋은 빠른 키보드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소파에 몸을 푹 파묻고서 눈을 꾹 감았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피로가 누적된 몸은 곳곳이 삐걱거리고 뭔가에 꽉 붙잡힌 것처럼 압박감을 주기도 했다. 머릿속은 이상할 정도로 또렷해서는 뭔가를 자꾸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도 그리 좋지 않은 생각을.
‘강지석이 알면 어떻게 생각할까.’
지석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있다. 철저한 이성애자이지만 동성애에 대한 편견도 없고 오히려 그들을 응원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러니 내 왼손에 있는 링에 대해 알더라도 괜찮을지 모른다. 상대가 지석의 친형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역시 친구와 친형이 링으로 이어진 건… 껄끄럽겠지. 심지어 동성이고…….’
링으로 이어져 있다고 해서 지건 형과 뭘 거창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하루에 몇 시간 정도만 함께 잠을 청하면 해결될 일이었다. 같이 잠을 자는 것 정도는 친구들끼리도 충분히 하는 일이니 깊게 생각할 것 없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 보지만 지석이 알게 된다면 그의 친형에게 생긴 문제를 가볍게 여길 순 없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타자 소리가 멈췄다. 바퀴 달린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들리고 지건 형이 가까이 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눈을 감고 있으니 귀가 예민해져서 보지 않아도 형의 움직임을 알 것 같았다.
옆자리에 털썩 앉는 느낌이 났다. 2명이 여유롭게 앉을 수 있을 만한 소파인데도 지건 형은 서로의 어깨가 닿을 만큼 가까이 앉았다.
그제야 눈꺼풀을 여니 날 바라보고 있는 지건 형과 눈이 딱 마주쳤다.
순간적으로 든 생각은, 강지석인 줄 알았다는 거다.
강지석은 가끔 지건 형과 같은 눈으로 날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가 있다. 보통 그럴 땐 내 안색을 살피기 위해서이거나 생각을 읽으려 들 때였다. 둘이 얼굴만 닮은 게 아니라 이런 행동마저 비슷해 버리니 순간 두근거릴 수밖에.
“많이 피곤해 보이네.”
그렇게 말하는 지건 형이야말로 눈동자의 핏발도 여전하고 눈가도 어둑하다.
“형도 그래요.”
“며칠간 제대로 잠도 못 잤으니 그럴 만하지.”
지건 형이 지친 듯 말하며 피식 웃었다. 그 덕분에 치켜 올라가 있던 눈꼬리가 내려와, 차가워 보이던 분위기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형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형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뭐가?”
태연한 그를 보고 있자니 나만 복잡한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제가 불편하진 않으신가… 해서요. 링으로 연결된 것도.”
형은 대답 대신 잠시 말없이 날 바라보았다. 말도 없이 바라보고 있으니 민망해져서 고개를 돌리려 할 때쯤.
“넌 내가 불편해?”
형이 되레 물어왔다. 얼른 고개를 저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편한 건 아니어서 선뜻 그러질 못했다.
“그럴 줄 알았어.”
형이 씁쓸히 웃으며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난 예나 지금이나 네가 불편했던 적은 없어. 일 때문에 오랫동안 제대로 대화를 못 해서 조금 조심스러운 거지.”
그렇게 말해주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싫거나 마음에 들지 않아서 거리를 뒀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형이 창업한 사업 때문에 얼마나 바빴는지는 지금까지도 지석을 통해 전해 들어왔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저도 불편한 건 아니에요. 다만…….”
입 안에서 말을 골랐다. 지석을 좋아하는데 다른 사람과 링이 이어져 버린 내 착잡함을 표출해선 안 되기에, 감정을 가다듬고 형의 눈치를 살폈다.
“지석이가 알면 안 된다는 것 때문에 생각이 많아서요.”
어느새 나는 내 왼손 약지의 링 부분을 손끝으로 꾹 눌러 매만지고 있었다.
“저는 지석이가 제일 친한 친구…예요. 지석이가 이런 거 때문에 절 꺼리게 되는 건 좀 싫거든요. 형도 그럴 거 아니에요.”
‘이런 거’라고 표현한 부분에서 일순 형의 눈꼬리가 꿈틀한 것 같았지만, 입가에 번진 작은 미소는 그대로였다.
“그래. 지석이에겐 지금처럼 비밀로 하자. 링에 대해서는 나도 자세히 알아볼게.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순 없으니까.”
“네. 고마워요, 형.”
긴장한 눈매를 누그러뜨리니, 형이 내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오늘은 룸서비스 시켜서 먹자. 가는 길에 먹고 싶은 거 생기면 말하고.”
“룸서비스는 너무 비싸지 않아요? 그냥 몇 시간 자다가 나오는 것뿐인데…….”
“괜찮아. 그 정도 돈은 있어.”
형은 정말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말했지만, 정작 내가 신경 쓰인다. 매일 저녁 식사비와 호텔비를 형이 혼자 내고 있으니 너무 미안했다. 잠이 필요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인데.
‘차라리 내 원룸에서 자자고 할 걸 그랬나.’
비좁긴 하지만 둘이 조금 떨어져서 손만 잡고 자는 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선뜻 그러자고 할 수가 없다. 내 원룸은 침대라고 해봐야 1인용의 작은 매트리스 하나만 있었고, 그리 깔끔하거나 좋은 환경도 아니었다. 그런 곳에 호텔만 다녀봤을 것 같은 형을 끌어다가 재우는 건 여러모로 미안할 일이었다.
“너무 비싼데…….”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듯 피식 웃은 형의 손이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결국 그날도 형을 따라 호텔에서 일찍이 잠을 청했다. 각자 커다란 침대의 끄트머리쯤에 누워서는 이불 속에서 손을 살짝 잡고 잠든 것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온기가 오가는 느낌을 받으며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잠에 취해 있을 땐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 만큼 황홀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지낼 순 없는지라, 금세 머리가 복잡해졌다.
* * *
톡톡-
“우서야, 자냐?”
도서관에서 책을 쌓아두고 엎드려 있는데, 손가락으로 어깨를 건드리는 감각에 고개만 살짝 돌려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역시나 걱정스러운 얼굴의 지석이 나름 심각한 얼굴로 옆자리의 의자를 빼 앉는다.
“하루 이틀이야 그렇다 쳐도 매일 피곤해해서 어떻게 하냐? 이거 병 아니야?”
“…아니야. 나 밤에 알바 시작했다고 했잖아. 그리고 피곤하다기보다는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사실 알바가 아니라 지건 형과 함께 잠을 자러 가는 것뿐이었지만 이럴 때 핑계 대기엔 좋았다.
“학교 다니면서 무슨 알바야. 과제만 해도 빡센데. 용돈은 충분히 들어온다며.”
지석이 입을 삐죽이며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을 했다.
지석과 잘 맞았던 또 하나의 이유는, 부모님이 외국에 계신 그의 집처럼 우리 또한 두 분이 멀리서 일을 하고 계시기 때문이었다. 원하던 대학에 덜컥 합격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거리상 부모님과 함께 지낼 수는 없어서 홀로 원룸을 구해서 다니던 차였다.
옆자리에 앉아 턱을 괴고 있던 지석이 한 손을 뻗어 내 이마에 얹었다. 미열이 있던 이마에 약간 서늘한 손이 닿아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이 손의 주인이 강지석이기 때문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너 열 있어.”
“알아.”
“잔소리 퍼붓기 전에 병원 가자, 우서야. 나 한 번 물꼬 트이면 속사포인 거 알지?”
“병원 같은 소리 하네. 이 정도로 병원 가면 엄살 부린다고 욕먹어, 멍청아.”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하는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남 걱정하는 잔소리 하면 강지석이지.
이 손을 가만히 느끼며 눈을 감아보니, 언뜻 지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눈 감고 있으면 누구 손인지 모르겠네.’
얼굴도 닮았고 체구도 닮았고 심지어 손 크기마저 닮았나. 이쯤 되면 정말 쌍둥이가 아닐지 의심될 정도다.
다만, 지석의 손은 내게 닿아있다 해도 잠들 수 없다. 지건이었다면 이대로 기분 좋게 잠에 빠져들었겠지만.
‘뭘 아쉬워하고 있냐, 난.’
지석의 작은 스킨십에도 설레하면서 한편으로는 지건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귓가에 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서야. 너 원룸 계약 기간 얼마나 남았지?”
뜬금없이 묻는 말에 눈을 떴다. 어째 지석의 얼굴에 약간의 생기가 돌고 있다. 뭔가를 기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착각일까.
“중간고사 지나고 나서 계약했던 거니까… 아마 며칠 내로 연장해야 할걸.”
“잘됐네. 그럼 혹시…….”
지석이 목소리를 낮춰 은밀히 물었다.
“너, 나랑 살래?”
그 말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엎드려 있던 상체를 벌떡 일으키고 말았다. 주변에 있던 몇몇 학생들이 이쪽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지금 난 그걸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우리 집에서 살자, 우서야.”
이게 지금 뭐라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