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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고리-7화 (7/99)

7화

웬만해선 감기도 걸리지 않을 만큼 건강한 나인데, 어째서인지 도통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열병이 찾아와 눈앞이 혼미해졌다. 열이 펄펄 나서 시야마저 흐려진 탓에 여동생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병원에 다녀올 수 있었다.

“링의 전조네요.”

의사가 싱긋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땐 아무런 약도 들지 않으니 그냥 돌아가서 쉬는 게 최선이라는 말을 건넸고, 내일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질 거라고 말했다.

의사에게 몇 번이나 물어봤다. 그가 말하는 링이 내가 아는 그 링이 맞는 건지.

‘설마 나한테 링이 생길 줄이야.’

열에 취한 눈을 내려 내 왼손 약지를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의식하고 나니 왼손 약지 부근에서 아릿한 느낌이 피어오르는 것도 같다.

기분이 확 나빠졌다. 상대가 누구인진 모르겠지만, 최소한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전날에 조금이라도 접촉한 사람의 수는 족히 일이백 명쯤 될 것 같았다. 그 사람들 대부분은 나와 업무 때문에 만난 사람들이거나 알지도 못하는 이들인데, 그 안에 운명의 짝이니 뭐니 하는 사람이 섞여 있다는 거다. 모르는 사람과 강제로 연을 맺게 만드는 이 괴이한 링에 불신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짜증스럽게 앞머리를 쓸어 올리자, 백미러를 통해 날 바라보고 있던 지연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오빠, 괜찮아?”

“…안 괜찮아.”

그 많은 사람 중에서 어떻게 상대를 찾나 싶어서 머리가 아파졌다. 이해한다는 듯한 눈으로 같이 한숨을 내쉬어준 지연이 어디선가 들었던 적이 있다며 입을 열었다.

“링의 발현 때문에 열병이 생겼을 때 상대가 떠오르는 사람도 있다던데, 오빠는 그런 거 없어?”

“있었으면 이렇게 가만히 있지도 않았겠지.”

대답을 하면서도 언뜻 우서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열병에 취해 잠에서 깼을 때,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히 떠오르던 게 우서의 얼굴이었다. 사진 속에서 웃고 있던 모습도 떠오르고, 내 품에 의도치 않게 안긴 형태가 되었을 때 보이던 놀란 얼굴도 생각났다.

설마 아니겠지.

일부러 그럴 가능성은 아예 저 멀리 던져버렸다. 만약 우서와 링으로 연결되어 있는 거라면 여태껏 멀어지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내가 너무도 우스울 것 같다.

* * *

“저기…, 대표님.”

부르는 소리에 이마를 짚은 손을 떼며 눈을 들었다. 피로감 때문에 뻑뻑해진 눈이 문가를 향했다. 빠끔히 열린 문과 그 틈새로 보이는 이 팀장의 포마드 머리 반쪽이 심히 거슬렸다.

“노크도 안 합니까?”

“했는데 못 들으시는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억울함을 담아 조심스레 말하던 그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들어오라고 손짓하니 그가 후다닥 안으로 들어와 USB 하나를 데스크에 올려놓았다.

“엔터스톤 사에 보낼 앱 테스트 파일입니다.”

“확인해보고 호출할게요. 나가봐요.”

이 팀장에게 시선도 제대로 주지 않은 채 피곤한 눈으로 USB를 집어 들었다. 그걸 업무용 PC에 꽂으려고 하니, 아직 돌아서서 나가지 않은 그가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저…, 요즘 컨디션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역시 병원에서 검진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 팀장은 본인 일이나 하세요.”

“…예.”

보이지 않는 귀가 있었다면 분명 축 늘어뜨렸을 것 같은 이 팀장이 터덜터덜 대표실을 나섰다. 그가 나가고 나자, 홀로 남은 사무실 안에서 깊은 한숨 소리를 내며 의자에 푹 기대어 늘어져 버렸다.

불면증이라는 게 이렇게 지독한 것인 줄 몰랐다. 몸이 아무리 피곤해도 잠을 잘 수가 없다. 선잠이라도 자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도 않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기절이라도 하는 것처럼 필름이 훅 끊어졌다가 돌아온다. 그래 봐야 고작 몇 초간 기절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러다 죽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로 오싹해진다. 목덜미가 기분 나쁠 정도로 당기고 머리는 두 손으로 좌우를 꾹꾹 눌러대는 것 같은 압박감이 찾아왔다. 그 탓에 신경이 바짝 곤두서고 모든 것에 예민해졌다.

이 최악의 상황을 가라앉힐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링의 상대와 신체접촉을 한 상태로 잠드는 것.

솔직히 지금과 같은 상황에 누군가와 접촉한 것만으로도 깊이 잠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허무맹랑하게 여겨졌지만,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망할 링.

운명의 상대고 뭐고, 애초에 연애에 그다지 관심도 없던 나로서는 여태껏 상대를 찾아보는 내내 답답하기만 했다. 아무 감정도 없는 사람과 고작 링 때문에 평생을 연결되어 살아야 한다는 게 말이나 될까.

그런 생각을 하며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과 함께 이 팀장이 두고 간 파일을 확인하고 있었다. 짧은 알림음과 함께 지석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형 그냐ㅇ 천처니 와돋ㅐ 우서가 와준다ㅣ]

내게 왔던 열병만큼이나 열이 어지간히도 심한 모양이었다.

지석의 메시지를 해독하다가, 우서라는 이름에 멈칫했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 아른거리는 우서의 얼굴 때문에 순간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럼에도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억나지 않는 곳이 없다.

‘돌겠네.’

겨우 마음을 다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불쑥 마주친 그 순간이 왜 자꾸 머릿속을 맴도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쯤 됐으면 머릿속이든 가슴에서든 지워낼 때가 됐는데.

문득 우서와 접촉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설마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되풀이했는지 모른다. 그건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우서를 만났을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그래서인지 왼손 약지에 붉은 링이 생기지 않았느냐고 선뜻 물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접촉을 하긴 했으니 언젠가는 물어야 할 것을 알면서도.

적막감이 감도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서가 긴장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왼손은 그의 등 뒤로 약간 넘어가 있는 상태라서 잘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숨기고 있는 건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건지 아직은 알 수가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 뛰어대기 시작했다.

우서의 안색이 나쁜 이유가 나와 같은 이유라면. 만약 우서도 링이 생겼고 그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기 때문에 지금처럼 긴장하고 있는 거라면…….

이상했다. 확실치도 않은 사실에 가슴이 기분 좋게 저릿거리고 자꾸만 그의 왼손을 억지로라도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나와 같이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 약간의 핏발이 선 눈가, 무의식중에 흘러나오는 지친 듯한 숨소리를 느낄 때마다 예민한 신경이 온통 우서에게 쏠려서는 쿡쿡 건드려대고 있다.

긴장한 마음을 안고서 차를 향해 걸어가는데 우서가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리니 애써 웃어 보인 그가 혼자 가겠다며 여기서 가깝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그가 사는 원룸이 여기서 지하철로 열두 정거장이라는 것쯤은 지석에게 들어서 이미 다 알고 있는데.

그러면서 지석을 살펴달라고 뒷걸음질 친다. 명백히 나를 피하려는 듯한 행동에 우서를 그냥 두지 못하고 성큼 다가가 그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그러자 우서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그의 팔을 붙잡은 오른손이 아니라 내 왼손에 닿았다. 그걸 알아채고 나니 기묘한 긴장과 함께 기분 좋은 확신이 밀려왔다.

힘으로 우서의 팔을 당겨 그의 왼손을 붙잡아 확인했다. 역시나 선명한 붉은 띠 한 줄이 내 눈에 들어온다.

신우서는… 링이 연결된 내 짝이었다.

답답하던 머릿속이 단번에 정리되는 것처럼 트이는 느낌이 났다. 3년에 걸쳐 막아온 감정이 한순간에 밀려와 전신을 뒤덮었다.

확인이 필요했다. 이런 실낱같은 붉은 줄 하나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분명한 영향을 미치는 짝으로서의 확인이.

놀라서 굳어버린 우서를 끌어 차에 태우고는 이제껏 막혀있던 것처럼 답답하기만 하던 숨을 골랐다.

눈을 내리깐 채 말없이 조수석에 앉아 있는 그를 보며 물었다. 진작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그가 지석을 통해 연락 한 번이라도 해줬다면…….

‘그렇게 되면 지석이가 알 수밖에 없었겠지.’

우서가 뭘 고민했는지 알만했다. 단순한 친구 사이도 아니고 짝사랑 중인 상대에게 그의 형과 링으로 이어져 있다고 고백하기엔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을 거다.

마치 예전의 나와 같았다. 동생의 친구인 그를 좋아하게 되어버렸다고 고백하는 대신 무작정 벽을 치고 멀어지길 선택한 3년 전의 바보 같던 나와.

저 작은 머리통 속에서 나에 대한 생각이 가득 굴러다녔을 걸 생각하니,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그 말을 다 쏟아 내기엔 나도 아직 내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실히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저 우서와 링이 연결되어 있다는 게 운명 같았고 여태까지 마음을 억눌러 왔던 것의 몇 배에 달하는 기묘한 감정의 파도가 속을 울렁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우서의 눈이 깊이 가라앉고 고개까지 숙어졌다. 안 그래도 피로에 찌든 안타까운 얼굴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어두워졌다. 나 역시 피곤했지만 그보다도 우서가 걱정이었다. 남 걱정 따윈 제대로 해본 적도 없었던 날 떠올리면 지금 이 순간이 신기할 따름이다.

“1시간만 자보자.”

우서의 손을 그러쥔 채 알람을 맞췄다. 마음 같아서는 어디 침대에라도 눕혀 놓고 오랫동안 푹 재우고 싶었지만 여태껏 거리를 둬온 게 나라서 선뜻 그런 제의를 할 수도 없었다.

당황하는 우서의 손을 꽉 붙잡고서 눈을 감았다. 이전에는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으면 갖가지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고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지는 게 느껴졌는데, 이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고가의 침대에 누운 것 같은 굉장한 편안함이 몰려왔다. 이게 우서와 연결된 증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의 기분 좋은 울림이 듣기 좋은 자장가처럼 느껴졌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겠다.

알람을 듣고 눈을 뜬 후에야 내가 푹 잠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고작 1시간 잠들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몸이 가볍고 정신이 말짱했다. 쓸데없는 생각으로 어지럽던 머릿속이 단정하게 정리된 느낌이 들었고 전신을 휩쓰는 개운함에 좀 더 잠을 청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헛웃음을 흘리며 우서를 바라보았다. 그의 낯빛에 머물던 피로감 역시 눈에 띄게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약간 창백한가 싶던 볼에도 보기 좋은 혈색이 돌고 있다.

링의 능력은 정말 신기했다. 불면증만큼 괴로운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며 죽을 만큼 힘겹게 버텨왔는데, 고작 손을 잡고 잠깐 잠든 것만으로도 쾌감에 가까운 극상의 만족감을 맛볼 수 있었다. 중독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게 될 정도로.

하지만 링이 가져다준 건 단잠뿐만이 아니었다.

‘놓고 싶지 않아.’

누군가를 향한 소유욕이나 집착은 나와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다. 우서에 대한 마음을 깨달았던 3년 전에도 그에게 집착하긴커녕, 하루라도 빨리 멀어져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었다. 사업을 하면서 점점 성격이 날카로워지고 타인을 이용가치로만 판단하던 나인데.

하지만 그만큼 떨어져 있었는데도 그대로라면, 아니, 더 강한 감정을 갖게 됐다면 이 이상 물러나 봐야 소용없지 않을까.

우서의 손을 잡은 내 손가락 사이로 그의 약지에 한 줄로 새겨진 붉은 링이 보였다. 그 링을 보자마자 희열에 가까운 벅찬 감정이 차올랐다. 신우서와 연결된 그 붉은 줄 하나가 내 답답한 가슴속 어딘가를 차곡차곡 무너뜨렸다. 부서진 틈새로 빠져나온 시커먼 뱀 한 마리가 이걸 기회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루 한 시간이어도 좋아. 같이 자자.”

그 시간 동안 난 우리가 가진 형식적인 링의 형태를 바꿔볼 생각이다. 신우서가 바라지 않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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