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그들이 아직 고3이던 어느 여름날.
“지석이는 약 먹고 누워있어. 푹 잠들어서 당장 일어나긴 힘들 것 같아.”
때아닌 여름 감기에 걸려 침대에서 내려오질 못하는 지석을 대신해서 우서에게 상태를 알려주었다. 모처럼의 주말에 과외를 받겠다고 찾아온 우서는 지석의 상태를 듣자마자 걱정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귀엽게도, 미리 알았으면 약이든 죽이든 사 올 걸 그랬다며 착잡해 한다. 여름만 되면 꼭 감기에 걸리는 막냇동생을 위해 미리 준비해둔 약도 있었고 요즘엔 죽도 배달이 되니 괜찮다고 말했지만, 우서의 얼굴은 그리 쉽게 펴지지 않았다.
과외수업을 하는 내내 우서의 신경이 자꾸 다른 데에 쏠려 있는 게 느껴졌다. 평소 때였다면 금세 풀어냈을 문제도 한참을 고민하고, 뭔가 설명을 해줘도 단번에 이해하질 못했다. 방금 배운 문제를 세 번이나 연이어 틀렸을 때쯤엔 안 되겠다 싶어서 커피라도 한잔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단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우서를 위해 아메리카노를 준비해서 방으로 가는 도중, 지석의 방문이 빠끔히 열려 있는 걸 발견했다. 지석이 일어난 건가 싶어서 문을 열어보는데, 보이는 건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는 동생과 그의 이마에 손을 올린 채 가슴 아픈 표정을 짓고 있는 우서였다. 본인이 아프더라도 얼굴 한 번 제대로 찡그리지 않던 그였는데, 지석을 내려다보는 그 모습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아파 보였다.
거기서 끝이었다면 확신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단순한 친구를 보는 것 같지 않은 묘한 눈빛과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져도 모른 척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서는 아예 내 생각에 쐐기를 박아버렸다. 인사불성이 된 지석에게 조심스레 입술을 내려 짧은 입맞춤을 하고서 씁쓸한 얼굴로 동생의 뜨끈한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그대로 놓칠 뻔했다.
그건 우서가 내 동생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보다도, 그걸 알아챈 내 가슴이 이상할 정도로 요동쳤기 때문이었다. 뜻 모를 감정이 엄습해와 머릿속을 꽉 붙잡아 압박했고, 시야는 내 심장만큼이나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천천히 뒷걸음질 치다가 과외수업을 해 주던 내 방으로 향했다. 테이블에 두 잔의 아메리카노를 내려놓으며 그 위에 있는 교과서와 문제집, 필기구들에 시선을 두었다.
하나씩 시선을 둘 때마다 우서가 함께 보인다.
기다란 속눈썹을 내린 채 교과서를 바라보고 있는 단아한 얼굴, 샤프를 잡고 움직이는 가느다란 뼈대의 하얀 손과 기분 좋게 울리는 사각거리는 소리, 문제집의 어려운 문제를 가리키며 해답을 부탁하는 듣기 좋은 목소리, 그리고 지석을 눈에 담을 때마다 자연스레 휘어지던 부드러운 눈매.
눈앞에 없는데도 금세 그려지고 마는 선명한 신우서를 떠올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어느새 우서는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들어와 있었다. 그의 시선이 항상 누구를 바라봐왔는가를 생각할수록 가슴이 저릿하고 주체 못 할 질투심이 올라와 목구멍이 답답해졌다.
‘미쳤어, 강지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소리 없이 자조했다.
언제부터? 뭐 때문에?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봐도 답을 찾을 수가 없다. 이미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자각한 뒤엔 좋아진 순간을 찾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는 걸 알았다. 그와 함께 있었던 순간이 다 좋기만 해서.
상대가 다른 사람에게 품은 마음을 확인하게 된 날이 내 감정을 깨닫는 순간이 될 줄은 몰랐다. 심지어 그 상대라는 게 동생의 친구임과 동시에 그를 좋아하고 있는 7살이나 어린 남자애라니.
최악 중의 최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감정을 상기하자마자 찾아온 허탈함과 무기력함은 스스로를 자책하게 했다. 빌어먹을 삼각관계 한가운데에 내가 서 있게 될 줄이야.
우서를 향한 특별한 감정을 깨닫게 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시작도 하기 전에 철저히 차인 느낌인데 뭘 할 수 있을까. 어차피 내 마음은 보답받지 못할 걸 알고 있으니 깊이 숨겨둘 수밖에 없었다.
* * *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려 했으나 마음을 자각한 뒤로는 그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자꾸만 우서를 의식하게 되고 그의 눈짓, 행동 하나, 말 한마디에 감정이 과할 정도로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이러다간 언젠가 우서를 붙잡고 밀어붙일 것만 같았다.
그때는 성인이라고 해도 스스로 생각하기에 한없이 미성숙한 때였다. 감정 조절이 능숙한 것도 아니었고 갑작스럽게 찾아온 상황을 그러려니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우서에게 벽을 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작은 호의에도 과하게 반응하며 밀어내기 일쑤였고 과외 때가 아니라면 바쁜 척 밖으로 돌며 그를 피했다. 수능시험 후부터는 아예 연락조차 받지 않았으며, 그전까지 천천히 준비해 오던 사업에 전력을 다하며 우서를 잊어보려 노력했다.
그렇게 우서가 성인이 되고 내가 그를 직접 만나지 않게 된 지 3년이 흘렀다.
그때까지도 우서는 지석과 함께였다. 자주 지석의 얘기를 듣다 보면 우서가 정말 그를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걸 싫어도 깨닫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못 알아채도 난 듣는 순간 그게 친구로서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의 애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하루는 우서의 이야기를 듣던 도중, 지석에게 ‘만약’을 가정하며 물었다.
신우서가 널 좋아하는 거면 어떻게 할 거냐고. 고백하면 받아줄 생각이냐고.
눈을 동그랗게 뜨던 지석은 웃음을 터뜨리며 일말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았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진짜라면 당연히 거절해야지. 난 남자 안돼.”
강지석은 남들이 동성연애자든 아니든 편견을 갖고 보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 당사자는 명백한 헤테로였다. 신우서는 가장 기본적인 생물학적 부분부터 강지석의 수용 범위 밖의 사람이었던 거다, 불쌍하게도.
기분은 착잡했지만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강지석과 안 될 테니 나는 어떠냐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생각이 없진 않았다. 벽을 치고 멀어지기 시작한 건 나였어도 그가 나 때문에 복잡해지는 건 원치 않았다. 여태껏 차여본 적 없던 내가 거절당할 게 당연한 고백을 해야 한다는 것에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신우서가 강지석을 좋아하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이에 내 마음 정도는 일찌감치 버려둔 지 오래다. 어차피 그가 날 바라볼 리 없다면, 이제까지 해왔던 것처럼 이런 마음과 감정 따윈 깊이 묻어두는 게 정답이었다. 그러다 보면 내 취향의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될 날이 올 거고 그에게 새로운 마음과 감정을 건네주면서 신우서를 잊으면 그만이다.
사업을 시작하면서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혹사하며 정신이 없을 정도로 일에 빠져들었다. 그로 인해 지석과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거의 없어져 버렸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우서에 대한 것도 들을 수 없어졌다. 난 이게 오히려 잘된 거라며 더더욱 일에만 몰두했다.
그렇다고 연애를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일을 하면서 자연스레 만나게 된 사람들이든, 우연히 길을 가다 만난 사람들이든, 연인이 되고자 했던 사람들을 굳이 막지는 않았다. 연인이 되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연인의 의무를 다할 생각도 없었고 그저 서로 원하는 걸 하면 되는 거였다.
적당히 어울리고, 적당히 얘기를 나누고, 적당히 몸을 섞고, 적당히 선을 긋다가 적당히 헤어졌다. 그 과정에서 너무 냉정하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버렸다. 연인이라는 사람에게 제대로 웃어주거나 다정한 말 한마디 하지 않으면서 관계 속에서 실리만 찾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딱히 변명할 생각 없이 상대를 내치고 다시 새로운 사람을 사귀길 반복했다.
굳이 다정해야 하나.
어차피 서로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어울리는 것뿐인데.
* * *
그날은 새 협업체와 투자자들에게 회사를 어필할 수 있는 중요한 컨퍼런스가 있는 날이었다.
하필이면 꼭 필요한 중요 자료 중 일부가 누락된 걸 뒤늦게 발견했고, 그 원본이 들어있는 USB를 가져가기 위해 급히 집에 들렀다.
요즘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정신을 너무 놓고 다닌다며 스스로를 타박하다가 문득 지석이 보냈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마침 다들 늦게 돌아오는 날이니 집에서 친구와 함께 조별과제를 하겠다는 통보 같은 메시지였다.
설마 했지만, 역시나 집 안에는 신우서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3년 전보다 훨씬 어른스러워지고 키도 약간 큰 것 같았다. 하얀 피부와 또렷한 이목구비는 그대로인데 전체적으로 풍기는 분위기는 아직도 덩치 큰 어린애 같은 지석과 달리 좀 더 묵직해졌다.
이젠 다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우서의 눈을 마주한 순간 내가 틀렸다는 걸 알았다. 시선을 맞대지 않은 게 3년이 넘었는데도 이리저리 요동치는 심장이 어색했다. 그간 바쁜 와중에도 잠깐씩이나마 인연을 가졌던 애인들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완벽히 잊어버렸으면서 왜 신우서는 그게 안 되는 건지 모르겠다.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는 사이, 우서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눈이 마주치면 부드럽게 웃어주던 과거와 달리 그의 입가에는 미소 한 조각 없었다. 긴장한 내색까지 보이는 우서의 눈을 보며 그게 내가 만든 벽의 결과라는 걸 알았다.
우서의 긴장한 눈동자가 지석을 향함과 동시에 서글서글한 분위기를 낼 때는 당장 그에게로 다가가 날 바라보게 하고 싶었다. 그간 억눌러온 감정이 머리를 치켜드는 순간이란, 생각보다 더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감정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감각은 결코 기분 좋은 게 아니었다. 우서의 시선이 닿아있는 지석을 보이지 않는 어딘가로 치워버리고 싶다는 과격한 생각이 들자, 더는 견디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일에 집중하자. 빨리 USB만 챙기고 나가버리자.
그 생각만 가득했다. 그래서 USB를 챙겨서 밖으로 나올 때 마음이 급한 나머지, 부엌에서 걸어 나오던 우서와 그만 부딪힐 뻔했다. 우서의 몸을 지탱해주고 물컵을 떨어뜨리지 않게 잡아주는데, 큰일 날 뻔했다는 것에 놀랐던 건지 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안기 좋을 정도로 품에 쏙 들어와 안겨 있던 우서가 그 눈동자에 나를 담아 올려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죄송해요.”
순한 눈동자와 듣기 좋은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졌다. 그러면서도 아닌 척, 힐끔 지석을 신경 쓰는 게 느껴졌다. 아마도 무의식적인 버릇 같은 행동인 듯했다.
‘날 봐.’
강지석은 그만 보고, 날 보라고.
입 안에서 맴도는 말을 어렵사리 삼켜냈다. 잠깐의 접촉만으로도 심장이 미친 듯 뛰는 걸 애써 무시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우서의 머리를 쓰다듬듯 토닥여주었다.
‘다시는 보지 말자.’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을 삼키며 집을 나섰다. 그때까지도 내 품에는 우서의 온기가 남아, 사라질 줄 몰랐다.
다음날.
지독한 열병의 괴로움과 함께, 왜인지 신우서의 얼굴을 그리며 눈을 떠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