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지석아, 몸은 좀……. 어? 누구?”
문 쪽에서 들린 목소리를 듣자마자 긴장이 탁 풀려버렸다.
고개를 돌린 내 눈에 보이는 건 하늘거리는 밝은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긴 생머리를 하나로 내려 묶은 20대 여성이었다. 이 집 유전자는 왜 이렇게 강력한지, 척 보기에도 그녀가 지석과 남매 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고등학생 때 지건 형에게 과외를 받는 도중에 종종 만난 적이 있다.
강지연 누나는 날 단박에 알아본 듯,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너 혹시 우서 아니니? 신우서.”
“안녕하세요, 누나. 오랜만에요.”
지건 형이 어느 날부터인가 바쁜 일 때문에 보이지 않게 된 무렵, 누나 역시 유명 디자인 회사에 취직하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사회인이 되면 저렇게나 바쁘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 두 사람 중 하나이니 오랜만일 수밖에.
지연 누나가 연신 눈을 반짝이며 날 위아래로 꼼꼼히 훑어보며 ‘그새 많이 컸네’라는 말을 하는 사이, 기운이 좀 난 것처럼 죽을 몇 숟가락 더 떠먹던 지석이 물었다.
“누나는 또 왜 이렇게 빨리 왔어?”
“건이 오빠가 너 아파서 죽어간다고 하길래 좀 일찍 퇴근하고 달려와 봤지.”
지연 누나는 지석의 모습과 그의 다리 위에 세팅된 음식들, 그리고 책상 위에 있는 약을 순서대로 훑어보다가 내 팔을 기특하다는 듯 툭툭 두드렸다.
“우서는 여전히 사람 잘 챙기는구나. 나보다 낫네.”
지석이 진지한 얼굴로 누나에게 장난을 건다.
“맞아, 누나보다 나아. 누나였으면 아파 죽겠는데도 라면을 먹였을……!”
“뭐, 이 새끼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누님.”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걸 보며 웃고 있다가 뒤늦게 시간을 체크했다.
‘아, 이럴 때가 아닌데.’
더 머물다가는 지건 형과 맞닥뜨리게 될 것 같다.
“누나, 그럼 전 먼저 가볼 테니까 지석이 좀 부탁드릴게요.”
“그래, 챙겨줘서 고마워.”
연신 웃는 얼굴로 대하는 지연 누나와 고맙다며 손을 흔들어주는 지석을 뒤로한 채 방을 나섰다. 뒤에서 지연 누나의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안 변했네’라는 말과 ‘귀여워’라는 말이 들렸다. 변하지 않았다는 것에는 동의해도 지석에 비하면 몸집이 조금 작을 뿐인 건장한 남자에게 귀엽다고 하니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불안한 마음이 발걸음을 점차 빠르게 만들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초조함을 달랬다. 사실 지금도 잠깐 방심하면 비틀거릴 정도로 잠이 부족하고 예민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기에 지건 형을 피하고 싶었다. 태연하게 ‘내가 형의 짝이래요’라고 말할 자신도 없고 말한다고 한들 그 후로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머리만 복잡해져서 두통이 더 심해지는 느낌이 든다.
오른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대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상태로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한숨부터 흘러나왔다.
그러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짧은 알림음을 울렸다. 곧 문이 좌우로 스르르 열린다. 안으로 걸어 들어가려다 누군가 타 있는 것을 보고서 걸음을 멈췄다.
“……!”
엘리베이터 안에 타고 있던 건 다름 아닌 지건 형이었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 한층 어두운 톤의 정장 차림이라서 그런지, 그를 둘러싼 분위기가 너무 묵직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니 건드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 정도로 무서운 느낌이 덮쳐왔다.
놀란 얼굴로 지건 형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보니 그새 시간이 흘러 엘리베이터 문이 저절로 닫혀갔다. 열림 버튼을 눌러 문을 열어준 형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우서야, 안 타?”
묻는 목소리는 예전과 달리 차가웠으나,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얼른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며 눈을 굴렸다.
“안녕하세요, 형.”
“응. 안녕한데, 안 탈 거냐고.”
“아뇨, 타긴 타는데…….”
형의 날카로우면서도 피곤한 눈매가 한 번 까딱거렸다.
“데려다줄게. 타.”
“예? 괜찮은데요.”
“형이 지금 좀 피곤하거든. 빨리 데려다주고 싶으니까 타지 않을래?”
내용만 들어보면 예전처럼 상냥한데, 목소리나 분위기는 왜 살벌한지 모르겠다. 마른침을 삼키며 어쩔 수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나는 왼손 약지가 그의 시선에 닿지 않도록 슬쩍 등 뒤로 숨기기 바빴다.
1층 대신 지하 2층 버튼을 누른 지건 형은 이쪽을 한 번 힐끔 보다가 다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내게 시선을 주는 일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내 심장은 불안함을 못 이겨 점차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나와 접촉했던 건 기억 못 하는 걸까?’
만약 기억하고 있다면 링에 관해 물어봤을 텐데.
긴장한 눈으로 힐끔 지건 형의 옆모습을 보았다. 그는 피곤한 듯, 미간을 손끝으로 눌러 주무르고 있었다. 죄책감과 불안함이 함께 밀려와 가슴을 무겁게 만들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 지하 2층에 멈추고 문이 열리고 나서야 그곳이 주차장이라는 걸 깨달았다. 데려다준다는 게 설마 내 집까지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내 예상대로라고 말하는 것처럼 지건 형은 그의 차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형, 저는 그냥 걸어갈게요.”
지건 형의 차에 태연히 타고 있을 자신은 없어서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애써 웃어 보이며 여기서 가깝다는 말도 했지만, 나를 돌아본 지건 형의 눈빛은 왜인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전 괜찮으니까 지석이 좀 살펴주세요.”
“지석이 아픈 건 지연이가 알아서 할 거야.”
애초에 강지석이 아픈 것 때문에 빨리 돌아온 게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성큼성큼 가까이 다가온 지건 형이 갑자기 덥석, 내 왼팔을 붙잡았다. 숨을 삼키며 놀란 내 눈에, 그의 왼손 약지에 자리 잡은 선명한 붉은 띠가 보였다. 그걸 보자마자 심장이 미친 듯 뛰어대는 게 느껴졌다.
“사실은 내가 너한테 볼일이 좀 있거든.”
펄떡거리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붙잡힌 팔이 강하게 땅겨지고, 지건 형의 왼손이 내 왼쪽 손목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그의 힘이 워낙 강해서 팔을 빼거나 물러날 새도 없이 왼손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지건 형의 눈이 순간적으로 강하게 흔들렸다.
형은 내 왼손 약지에 있는 붉은 띠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도 몰랐다고 할까. 설마 형이 이 링과 연결된 사람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짐작도 하지 못했다고 말하면 될까. 아니면 곧 말하려고 했었다고 미안하다고 하는 게 좋을까.
입을 꾹 다문 채 뭐라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지건 형이 내 팔을 그대로 붙잡아 끌고 갔다.
“저기, 형, 잠깐만요.”
“…….”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 큰일 났다는 생각에 눈앞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지건 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날 끌고 그의 차로 향했다. 나는 조수석에 밀어 넣어지는 순간에도 형에게 뭐라 말해야 할까를 한참 고민하고 있었다. 차라리 생판 모르는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면 당당하게 뭐든 말해볼 텐데, 하필이면 상대가 지석의 친형이니 머릿속만 새하얘진다. 언젠간 밝혀야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형태로 왼손 약지를 보여주게 될 줄은 몰랐다.
운전석에 지건 형이 올라타고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세게 닫혔다. 어깨를 흠칫하며 굳어 있으니, 옆에서 참았던 숨을 토하는 것처럼 긴 호흡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답답했던지, 목을 옥죄고 있던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뒷좌석에 내던진 형이 셔츠 단추를 두 개 풀어 낸다.
“진작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지건 형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왜 말 안 했어?”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의 형이기 때문에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고 솔직하게 말할 순 없잖아.
침묵으로 일관하자, 지건 형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서야.”
“…네.”
고개를 숙인 채 시선을 내리깔고 어렵사리 대답했다.
대역 죄인이 된 느낌이다. 동생의 친구와 뜬금없이 링이 이어진 지건 형도 나만큼이나 마음이 불편하겠지. 그걸 알면서도 숨기고 있었던 내게도 화가 날 테고.
어렴풋이 갖고 있던 미안한 마음이 점차 확실한 형태가 되어 내 어깨를 짓눌렀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지건 형은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긴말하지 않을 테니까, 잠깐 실험 좀 하자.”
지건 형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예? 실험요?”
지건 형이 손을 뻗어 내 왼손을 꽉 그러쥐었다. 손아귀 힘에 압박당한 왼손이 삽시간에 뜨거워지는 것 같다.
“1시간만 자보자.”
지건 형은 어느새 휴대폰을 꺼내 알람까지 맞추고 있었다. 내 손을 쥔 그의 손아귀는 날 절대 놓지 않을 것처럼 강하고 단단했다.
사실 푹 잠들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다. 링이 발현하기 전부터 불면증을 앓아왔기 때문에 기껏해야 잠깐의 선잠이 다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잠에서 깬 직후, 내 입에서는 허탈한 숨이 흘러나왔다.
고작 1시간이었다.
지건 형이 맞춰둔 알람 소리를 듣고 눈을 뜨기 전까지 그야말로 꿀을 발라놓은 것 같은 잠을 체험할 수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잠들어 있었던 것뿐임에도 그간 쌓여 있던 피로의 절반 이상이 송두리째 날아간 것 같은 개운함과 기분 좋음이 밀려왔다. 이대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다시금 눈을 감은 채 잠들고 싶다.
“하….”
기분 좋은 몽롱함을 느끼다가 옆에서 들려온 헛웃음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잠들기 전의 날카롭게 곤두선 분위기가 사라진 지건 형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연신 헛웃음을 흘리고 있다. 그 모습마저도 지석과 참 닮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참 어이가 없다.
지건 형은 잠에서 깼음에도 여전히 내 손을 꼭 쥔 채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신우서.”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음성이 조금 부드러워져 있다.
“너, 알바 좀 할래?”
“무슨 알바요?”
지건 형이 그때까지 붙잡고 있던 내 손을 보란 듯이 들어 올렸다.
“하루 한 시간이어도 좋아. 같이 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