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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고리-3화 (3/99)

3화

“야야, 큰일 났어.”

월요일이 되어 강의실에 들어가자마자 지석이 급한 말을 쏟아 냈다. 그는 걱정과 흥미가 뒤섞인 기묘한 표정으로 내 옆자리에 앉아 입을 열었다.

“우리 형 일인데…….”

지석이 전공 서적을 꺼내며 목소리를 낮췄다.

“왼손 약지에 링이 생겼대.”

그렇게 왼손을 쫙 펼쳐서 약지를 가리키지 않아도 알아. 나도 그렇거든.

입이 바싹바싹 마르고 손끝이 저렸다. 주먹을 꽉 쥐며 저릿한 감각을 잊어보려 했지만, 손바닥에 손톱이 박혀 드는 아픈 느낌이 가슴을 찔러대는 따끔거림과 닮았다는 것만 인식할 뿐이다. 초조한 내색을 감추며 강지석 몰래 마른침을 삼켰다.

“상대를 못 찾아서 요 며칠간 죽어가더라. 도저히 잠을 못 자겠나 봐.”

어깨를 움찔했다. 바쁜 사람이니 나와 달리 사람도 많이 만났을 테고 주말 동안 지석을 통해 링을 물어보지 않은 것만 해도 짐작이 갔지만, 직접 들으니 바짝 긴장이 되었다.

“링이 진짜 있긴 하네.”

모르는 척 담담하게 말하니 지석이 한숨을 내쉬며 책상 위에 엎드려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도 여태 긴가민가했는데, 설마하니 형한테 그런 게 생길 줄은 몰랐어. 어떡하냐, 우서야. 그거 검색해 보니까 낭만적이긴 해도 엄청 무서운 거던데.”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상대를 빨리… 찾아야겠네.”

책상 위에 올려뒀던 왼손을 슬쩍 아래로 내렸다. 허벅지에 얹은 내 손의 약지에선 여전히 선명한 붉은 띠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날, 나는 전날과 같이 전혀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그저 지쳐있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 * *

생각보다 링이 가져온 불면증은 심각한 것이었다. 여태껏 쭉 겪어 오던 불면증과는 확연히 차이가 날 만큼 그야말로 전혀 잠을 자지 못했다.

원래부터 불면증을 앓아왔던 그전까지는 그래도 어느 정도 버티다 보면 서너 시간이라도 잠을 잘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작해야 10분이나 20분 정도 눈을 붙이면 금세 정신이 번쩍 들어 잠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이는 육체에까지 영향을 미쳐, 수시로 닥쳐오는 빈혈과 두통 때문에 신경이 완전히 곤두서 버렸다.

‘진짜 이러다 죽겠네.’

불면증 때문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 건 처음이었다. 이것과 똑같은 걸 지건 형도 겪고 있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강지석이 말하길, 그 날 이후 집이 완전 살얼음판 같다고 한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지건 형은 열병이 일어나기 전날에 만났던 사람들을 전부 이 잡듯 뒤지고 있다는데, 그날 만나서 악수한 사람만 해도 백여 명이 넘는단다. 그 외에 조금이라도 신체적 접촉이 있었던 사람들까지 합하면 도저히 셀 수가 없다고.

그렇다 보니 지건 형으로서는 답답할 수밖에.

‘그냥 만나서 다 말해버릴까.’

괴로운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선뜻 지건 형을 만나 사실을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만나서 링을 보여주면 뭘 어떻게 할 생각인데? 결혼이라도 하자고 해?

생각하자마자 고개를 내저었다.

성별을 무시한 링의 발현과 시대의 흐름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동성결혼 및 동성연애에 대한 시선이 지극히 관대해졌다. 거리에선 대놓고 손을 잡고 다니는 동성 커플을 자주 볼 수 있었고, 그들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아무렇지 않게 된 지 수 년이다.

시대의 흐름에 내가 뒤떨어지는 걸까.

같은 남자, 그것도 친구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죄책감으로 다가와 여태껏 입도 벙긋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그 친구의 친형과 운명의 짝이라니.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좋아하는 친구의 좋아하지도 않는 친형과 손을 맞잡거나 끌어안고 있을 생각을 하니 도저히 내키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라면 지석을 가운데 두고서 지건 형과 서로 형제처럼 지냈을 때라서 그가 그리 거북스럽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버린 데다가 심적 거리도 멀어진 지금은 선뜻 말 한마디 걸기 힘들 정도였다. 마치 만난 적이 거의 없는 머나먼 타인과 마주한 느낌이라고 할까. 그렇다고 이대로 입을 다물고 있을 수도 없으니 답답해 죽을 맛이었다.

그 답답함은 지석의 집 앞에 선 후에도 가시지 않았다. 더하면 더했지.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시선을 내려 내 양손을 보았다. 오른손에 든 쇼핑백에는 근처 죽집에서 사 온 따끈한 소고기야채죽이 있었고, 왼손의 검은 봉투 안에는 아파트 앞 약국에서 산 종합감기약과 데워진 쌍화탕 두 병이 들어있었다.

얼음주머니나 찜질팩이라도 사 올 걸 그랬나 하고 고민하다가 초인종을 눌렀다. 두어 번 눌러봤지만 안에서 누군가 나오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자고 있나?’

햇볕 따뜻한 봄날에 대뜸 감기에 걸려 혼자 누워있다고 하기에 죽과 약까지 챙겨온 건데, 잠들어서 일어나질 못하는 거면 이걸 어떻게 전해줘야 하나. 그렇다고 아직도 기억하는 이 집 비밀번호를 눌러 들어갈 수도 없고.

때마침 휴대폰 진동이 울리기에 꺼내서 확인해보니, 잠들어 있나 싶었던 지석이 메시지를 보내놓았다.

[나 못 일ㄹ어나게써. 비일번ㅅ호 0319]

오타하고는.

그리고 비밀번호는 0319가 아니라 0316이겠지.

짧게 혀를 차며 내가 외워둔 대로 비밀번호를 넣으니 경쾌한 기계음과 함께 부드럽게 문이 열린다.

안으로 들어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막상 지석의 방을 모르겠다. 텔레파시라도 통한 것처럼 굳게 닫혀 있는 방문 중 한 곳 너머에서 지석이 힘없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곳은 지건 형의 방 바로 옆이었다.

지건 형의 방문을 슬쩍 보다가 지석의 방으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서 안으로 들어가니, 침대에 널브러져 숨을 몰아쉬는 지석이 보인다.

“왔냐….”

열이 올라 잔뜩 붉어진 얼굴로 힘겹게 웃어 보이던 그가 비척거리며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양손에 짐이 있어서 팔꿈치로 그의 가슴팍을 툭 치니, 알아서 철퍼덕 도로 누워준다.

“얌마, 환자한테 엘보우를…….”

“앉을 때 되면 도와줄 테니까 입 다물고 누워있어.”

책상에 양손의 짐을 올려놓고 안에 있는 걸 하나둘 꺼내놓기 시작했다.

“점심도 못 먹었지? 너 감기 걸리면 매번 끼니도 거르잖아.”

“안 넘어가는 걸 어떡해. 식사 챙기러 나갈 힘도 없어….”

“그럴 것 같더라. 이거 아직 뜨거우니까 지금 바로 먹으면 돼.”

지석을 부엌에 있는 테이블까지 데리고 나가 앉히는 건 무리가 있을 것 같아, 나가서 무릎 위에 올려둘 만한 사각 쟁반을 가져왔다. 죽과 반찬, 숟가락과 젓가락까지 까서 쟁반 위에 올려두고는 지석을 부축해 그를 앉혀주었다. 등에는 베개를 넣어 기댈 수 있게 해주고, 일자로 뻗은 허벅지 위에는 음식을 세팅한 쟁반을 올려 준다.

“먹을 수 있는 만큼 먹어 봐. 그래야 약을 먹지.”

“이야…. 우리 엄마도 바빠서 이렇게 못 해주는데, 그냥 네가 내 엄마 할래…?”

“헛소리한다, 또.”

피식 웃으며 돌아서서는 이번엔 약을 준비했다. 쌍화탕이 든 병을 쥐어보니 아직 뜨끈뜨끈한 게, 식사 후에 먹어도 충분히 따뜻할 것 같다.

식사 후에 바로 약을 먹을 수 있게끔 알약도 함께 준비해두고서 죽을 한술 뜨고 있는 지석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상당히 뜨거운 게, 머리가 몽롱하고 시야가 흐릴 만도 했다.

‘다 먹고 약 먹이면 얼음이라도 가져와서 찜질해줘야겠네.’

미처 사 오지 못한 얼음찜질팩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서너 번 죽을 떠먹던 지석이 미안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까지 이 꼴이라 미안하다, 야.”

“뭐가?”

“조별과제….”

난 또 뭐라고.

갖은 핑계를 댄 다른 조원들처럼 그 역시 함께 준비하지 못할 상황이라 미안한 모양이었다.

“신경 쓰지 말고 빨리 낫기나 해. 넌 몸집은 커다라면서 한 번씩 감기 걸리면 이렇게 크게 아프더라.”

“응…. 그래도 네가 챙겨줘서 금방 나을 것 같아. 고맙다.”

헤실거리며 씩 웃는 얼굴을 마주하니 가슴이 뭔가에 가볍게 두들겨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분이 좋아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근데 너 잠은 제대로 자는 거 맞냐? 팬더 되겠네.”

지석의 말에 올라가던 입꼬리가 덜컥 멈춰버렸다.

“아무리 과제가 많고 힘들어도 잠은 푹 자. 우리 형 보니까 잠 부족한 것만큼 괴로운 게 없어 보이더라.”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대신 그렇게 티가 나나 싶어서 눈 아래쪽을 손끝으로 꾹꾹 눌러 본다.

“아, 그러고 보니 형이 퇴근하자마자 빨리 온다고 했는데…….”

지석의 말에 어깨를 떨며 흠칫했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새 6시가 조금 넘어있다. 여름이 되어가는 중이라 아직도 해가 쨍쨍한 탓에 시간 감각이 조금 둔해져 있었나 보다.

마음이 급해졌다. 퇴근하고 돌아올 지건 형을 의식한 듯, 왼손 약지가 아릿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자리를 피하고 싶은데 이제야 식사를 시작한 지석을 놔두고 갈 수가 없었다. 숟가락도 겨우 들 정도로 힘이 없는 놈 허벅지 위에 쟁반과 음식을 올려둔 상태로 어떻게 그냥 갈까.

머뭇거리는 사이.

멀리 현관 쪽에서 도어 록의 익숙한 기계음이 들렸다. 곧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집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형 왔나?”

반쯤 열려 있는 문틈을 향해 고개를 내빼며 바라보는 지석과 달리, 난 차마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어느새 난 왼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아 넣은 채 어깨를 굳히며 긴장하고 있었다.

이윽고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상대가 지석의 방문을 더 활짝 열어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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