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오랜만에 맞닥뜨린 얼굴은 반갑다기보다는 예전과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에 당황스러웠다.
잘 나가는 사회인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잘 빠진 정장 차림의 강지석 어른 버전이 구두를 벗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가까워질수록 고등학생 때 만났던 다정하고 살가운 형이 아니라 차갑고 매서운 느낌만 가득할 정도로 날이 선 모습이었다. 강지석과 그렇게도 닮은 얼굴 중, 유일하게 다르다 할 수 있는 약간 치켜 올라간 눈꼬리도 그런 분위기에 한몫 단단히 했다.
“어? 형이 왜 벌써 와?”
지석이 의아한 얼굴로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4시밖에 되지 않은 화창한 대낮은 멀쩡한 회사원이 퇴근하기에 충분히 이른 시간이다. 앱 개발 회사의 CEO이긴 하지만 지건 역시 회사원인 건 마찬가지라, 시간상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무슨 세미나 같은 거 있다고 늦게 온다며?”
빠른 걸음으로 집 안에 들어온 지석의 형 강지건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어정쩡하게 일어나 고개를 꾸벅하는 나를 잠깐 가만히 바라보다가 지석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챙겨갈 게 있어서 들른 거야. 신경 꺼.”
지석과 달리 좀 더 낮고 무게감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답해준 질문은 지석의 것이었는데, 왜 시선은 아직도 날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예, 예.”
지건 형의 차가운 말에 입을 삐죽이며 장난스럽게 대답한 지석이 날 가리켰다.
“형, 우서 왔어, 신우서. 기억 안 나? 요즘에도 내가 얘 이야기밖에 안 했잖아.”
지석의 말에 화들짝 놀라 그의 허벅지를 발끝으로 툭 찼다.
“야, 무슨 얘기를 해? 내 욕했어?”
“욕했으면 좋겠냐? 원하면 해주고.”
장난스럽게 웃는 지석의 허벅지를 한 대 더 때려주니, 이젠 사람도 팬다며 엄살을 부린다.
그러는 사이 우리에게서 금세 시선을 뗀 지건 형이 부엌을 지나 어느 방으로 향했다. 아마도 저기가 지건 형의 방인가 보다.
그쪽을 힐끔거리다가 다시 자리에 앉으며 내 유리잔으로 손을 뻗는데, 어느새 텅텅 비어있다. 말도 없이 지석이 제 몫까지 다 마셔버렸다는 것보다도 그가 스스럼없이 같은 컵에 입을 댔다는 게 신경 쓰였다. 자주 있는 일이긴 해도 지석의 집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 신경이 쓰이나 보다.
스스로를 바보 같다며 자책하다가 물이라도 마시려고 컵을 들고 일어났다. 그런 내 팔을 지석이 잡아당기며 따라 일어나려 했다.
“내가 한 잔 더 갖다 줄게.”
“넌 하던 거나 마저 해. 난 이미 정리 끝났거든?”
“대박. 완전 빨라.”
일부러 과장된 표정으로 감탄하는 그를 내버려 둔 채 냉장고로 향했다. 홈바를 열어 시원한 물을 꺼내 컵에 담았다. 그 자리에서 홀짝 마셔보니 주스의 오렌지 향이 밴 약간 새콤한 물맛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물을 담아 든 채로 부엌을 나오는데, 때마침 방에서 나와 빠른 걸음을 내딛던 지건 형을 뒤늦게 발견하는 바람에 부딪힐 뻔했다. 그가 얼른 팔을 뻗어 내 몸을 잡아주고 다른 손으로는 물이 든 컵을 함께 잡아줬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비틀대다가 나나 형의 몸에 물을 튀기고 말았을 거다.
“죄송해요.”
“…….”
지건 형은 말이 없었다. 지석과 키까지 비슷해서 나보다 거의 머리 반 정도는 큰 그가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팔을 풀어주며 머리를 툭툭 쓰다듬듯 두드려 주었다. 그러더니 지석에게 간다는 말만 던진 채 금세 집을 나가버렸다.
지건 형이 건드린 머리를 쓰다듬어 보며 그가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한기가 흐르는 겉모습과 달리 지건 형의 손은 기분 좋을 정도의 온기가 담겨 있었다.
* * *
지석의 집에서 과제를 준비하고 돌아온 다음 날.
나는 지독한 열병에 시달렸다.
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열병 때문에 눈앞에 뭐가 보이는 건지 분간도 못 할 지경이었고, 침대에서 일어날 기력도 없었기에 그저 끙끙대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감기인가….’
곧 여름이 다 되어 가는데 이렇게 아무런 전조도 없이 덜컥 감기라니.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감기에 걸릴 때마다 곧바로 시작되던 기침도 없다. 자꾸만 이 열병이 감기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우웅-
작은 진동이 들렸다.
침대에 누운 채 베개 옆을 더듬어 휴대폰을 잡았다. 열 때문에 몸에 힘이 없어서 그런지 휴대폰을 집어 드는 것조차 힘겹다.
흐릿한 눈으로 휴대폰의 알림을 확인하자, 지석이 보내놓은 메시지가 보였다.
[김찬우가 메일로 코딩 샘플 보내놨더라. 너한테도 보내줄 테니까 훑어보고 월요일에 같이 정리 좀 하자.]
열기 띤 숨을 가쁘게 내쉬며 메시지를 확인하다가 톡톡, 자판을 두드렸다.
[너 혹시 잠깐 우리 집에 와줄 수|]
완성하지 못한 문장 뒤로 일자 커서가 깜빡거렸다. 머뭇거리다가 이를 전부 지우고 새로 썼다.
[시간 되면 근처 약국에서 약 좀|]
커서만 바라보다가 또 지웠다.
[지금 혹시 바빠?|]
또 지우고.
[나 아픈데|]
또 지웠다.
남은 건 깜빡이는 커서뿐.
[응.]
결국 완성한 문장은 너무도 짧았다.
혹시라도 답장이 온다면 조금 더 긴 문장을 써볼까 고민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확인했다는 표시만 생길 뿐 뭔가가 더 오진 않았다.
씁쓸함을 느끼며 휴대폰 화면을 끄고 왼손에 든 그것을 베개 옆에 내려놓았다. 그 순간 왼쪽 손가락이 찌릿하게 시큰거렸다.
“윽…!”
짧게 신음하며 왼손을 살펴보았다. 왼손 약지 부근이 얼얼하다. 겉으로 보이는 외상은 아무것도 없는데 뭔가에 베인 것도 같고 조여지는 것도 같았는데 착각인 걸까.
왼손 약지 부근의 이상한 시큰거림은 열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있는 동안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 * *
하루 내내 열병을 앓고 난 뒤.
난 다급히 인터넷을 뒤졌다. 검색어를 입력하자 연관 검색어가 주르륵 나열되는 게 보였다. 초조한 마음으로 검색에 검색을 거듭했다.
수많은 인터넷 기사와 정보들을 눈에 담으면 담을수록 혼란은 더욱 가중되어 갔다. 두통이 느껴져 이마를 짚으려다가 내 왼손을 보며 움찔했다.
왼손 약지의 반지 끼는 자리에 새겨진 선명한 붉은 띠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링.
그것은 수십 년 전부터 도시 전설과 같이 퍼져버린 특이한 현상이었다.
모두에게는 운명의 상대와 연결된 붉은 띠, 링이 있다고 한다. 다만 세계의 수십억 인구 중에서 링이 연결된 운명의 상대와 만날 수 있는 확률은 너무도 희박했고, 만난다고 한들 한 번에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서로가 연결되어 있는 걸 알아보는 방법은 링을 확인하는 것뿐이다. 성인이 된 이후, 운명의 상대와 신체적 접촉을 하면 24시간 이내에 심한 열에 시달리게 되면서 직후에 왼손 약지에 붉은 링이 발현하게 되는데, 그 링은 본인과 상대의 것만 볼 수 있고 타인 또한 그들의 것을 볼 수 없다.
약지의 붉은 링은 보통 한 줄인데, 서로의 애정이 일정 이상 깊이 이어지게 되면 마치 꽈배기처럼 두 줄의 붉은 링이 서로 뒤엉킨 듯한 형태로 변하게 된다. 그때가 되면 떨어져 있어도 불면증 없이 푹 잘 수 있다고 하는데, 누군가 마음이 바뀌게 되면 다시금 링은 한 줄이 되고 또다시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 한다.
개중에는 모든 이들의 링을 알아보고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그저 소문에 불과한가 싶을 정도로 정보가 없었다.
여하튼 이 링의 존재는 오래도록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어느 케이블 채널에서는 이러한 것에 대한 특집 프로그램을 구성할 정도였고 링이 주는 영향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파헤쳐보기까지 했다.
하지만 링이 도시 전설에 비유되는 이유는 타인의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링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서로의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에 의심의 눈초리가 모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만 해도 검색한 것의 절반은 ‘진짜 링이 있기나 한가’라는 의문 섞인 글들이었다.
나도 링 같은 건 믿지 않는 쪽이었다. 그런 운명의 띠가 모두에게 새겨져 있는 거라면 왜 내가 강지석을 짝사랑 중인 걸까. 언젠가 이어질 운명의 상대가 따로 있고, 이건 그냥 잠깐의 속앓이라면 나는 왜 이렇게 힘든 걸까.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노트북 화면 안에 버젓이 떠 있는 게시글이 내 속을 더 아프게 만들었다.
[링이 발현했다면 다른 사람과 이어질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해요.]
[링은 절대 낭만적인 게 아니에요.]
[링을 가진 상대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면 좋죠.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을걸요?]
[애정이 없는 사이끼리는 접촉한 상태가 아니라면 극심한 불면증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수면제도 통하지 않게 되고요.]
[그렇게 잠을 못 자다 보면 병이 생기기 마련이죠. 해외에선 링의 상대와 장기간 떨어져 있다가 불면증으로 인해 암까지 발병한 사례도 있어요.]
[링이 연결된 사람 중 싱글 링(Single Ring) 분들은 죽기 싫어서 어쩔 수 없이 함께 사는 것뿐일 거예요. 사실 저도 그렇거든요.]
[상대가 좋든 싫든, 서로 살기 위해서는 함께 있을 수밖에 없어요.]
[만약 왼손 약지에 링이 생겼다면 주저하지 말고 상대를 찾으세요.]
[일단 사람이 살고 봐야지 않겠어요?]
두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솔직히 불면증은 그리 무섭지 않았다. 강지석을 좋아하게 된 이후부터 잡다한 생각이 워낙 많아져서 그런지 평소에도 쉽사리 푹 자지 못했다. 잠이 오지 않아 새벽까지 전공 서적이나 들여다보기 일쑤였고, 그 덕분에 학점은 우수했으나 가끔 너무 피곤해서 동아리방에 쪽잠을 자다가 강의에 늦을 뻔한 적도 있었다. 지석이 매번 챙기러 와주지 않았더라면 강의 한둘쯤은 출결로 인한 F를 맞지 않았을까.
불면증은 수년간 달고 살았으니 거리낄 게 없었다. 까짓거 좀 더 심해지더라도 지금과 크게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불면증이 아니다.
‘알고 있었잖아.’
강지석과 나는 그렇게 가능성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 일찍이 짐작하고서 여태껏 아닌 척 살아왔는데, 확인사살을 하는 듯한 링의 발현은 내 입 안을 너무도 쓰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그 링의 상대가 누구인지 알겠기에 더 죽을 맛이었다. 열병을 앓기 전에 신체접촉을 했던 사람은 강지석, 그리고 또 다른 한 명뿐이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