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고리
YumYum
1화
1. 신우서
운명이라는 걸 믿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게 있었다면 내가 이 모양 이 꼴일 리가 없지.
“야, 듣고 있어?”
불쑥 얼굴을 내밀며 눈으로 내 상태를 확인해 주는 강지석을 보면서도 입 안이 썼다. 언제부터인지 강지석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가슴이 기분 좋게 간질거렸는데, 오늘만은 그런 느낌조차 들지 않을 만큼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웠다.
“…듣고 있어.”
피곤한 눈으로 왼손 약지에 시선을 내린 내 눈에, 지석에게는 보일 리가 없는 붉은색 링이 보였다.
‘차라리 너와 연결되었으면 좋았을걸.’
제 형의 ‘운명의 상대’가 누구일까에 대한 추측을 늘어놓는 지석의 옆얼굴을 보며 입속 살을 아프게 짓씹었다.
‘너와 연결된 거라면 링이 주는 불면증도 아무렇지 않게 버틸 수 있을 텐데.’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나는 왼손 약지에 선명히 자리 잡은 붉은 띠를 매만지며 씁쓸히 눈을 내리까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신우서는 강지석을 좋아한다. 친구로서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그 간단한 사실을 깨닫게 된 건 약 5년 전, 이제 막 고2가 되었을 무렵부터였다.
알고 지낸 건 고등학교에 입학한 그날부터였다. 워낙 사교성이 좋고 성격이 시원시원하다 보니 신입생 중에서도 금세 눈에 띄었고 친구들 또한 많아졌다. 그 안에는 나 역시 들어가 있었다. 우린 서로 맞는 게 많다 보니 금세 가까워졌고, 연인보다 더 빈번한 연락을 주고받을 정도의 절친이 되었다.
그래, 딱 절친까지가 좋았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그 이상을 바라고 있는 나였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데에는 큰 이유가 없더라.
고2가 되면서 나보다 머리 반 정도는 더 커진 키와 운동 좀 한 것 같이 보기 좋은 다부진 몸을 보다 보면, 예전처럼 강지석을 마냥 부러워하는 게 아니라 그 녀석 품에 기대어 있는 나를 상상하게 되었다. 강지석이 의미 없이 던진 말에 혼자 설레고 혼자 기뻐하며 혼자 실망한다.
강지석의 행동이나 말 하나하나가 신경 쓰였고 그가 하는 모든 일에 내가 얽혀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웃으면 나도 웃었고, 실연의 아픔 때문에 우울해하면 어깨도 선뜻 빌려주며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놀 것 하나 없이 둘만 있어도 즐거웠고 그의 곁이 너무도 편안해서 딱히 외롭지도 않았다. 머리 좋은 지석의 친형에게 과외를 받으면서까지 그와 같은 대학을 가고자 했고, 강의마저 함께 듣고 싶어서 좋아하지도 않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앞으로의 나날이 설레서 혼자 히죽히죽 웃기도 했다.
욕심이 났던 건 사실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게 그렇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
하지만 내 마음과 다를 게 분명한 지석에게 고백이라도 했다가 그와의 거리가 벌어지는 건 원치 않았다. 친구라는 타이틀만 있으면 옆에 가까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웬만해선 거리가 벌어질 일도 없다. 그러니 그거면 되는 거였다.
그랬는데…….
이렇게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그와 더 깊이 얽히게 될 줄은 몰랐다.
* * *
어느 대학이나 이런 사람들은 꼭 있기 마련인 것 같다.
조별과제의 취지가 정확히 뭔지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은 이기적인 인간들. 자신들의 일정이 훨씬 중요하고 귀찮은 건 질색인 사람들.
하필 그런 녀석들이 우리 조에도 있다.
“…어쩔까? 둘이서라도 할래?”
조장인 강지석이 볼을 긁적이며 내 눈치를 살폈다. 성격 좋은 호구 강지석이라면 갖은 핑계를 대며 빠져버린 조원들의 입에 발린 말을 철석같이 믿어줬을 게 뻔했다. 6명이 모여 앉을 자리를 확보해놓고 한 시간 동안 대기 중인 나도 그만큼이나 호구인 건 부정할 수 없지만.
6인용 자리에 두 명이 앉아 버티고 있기엔 둘 다 태연하질 못했다. 그렇다고 2인용의 작은 정사각형 테이블에서 하기엔 노트북이나 책들을 펴놓고 있어야 해서 비좁은 감이 있었다.
지석은 선뜻 제집으로 가자는 말을 했다. 마침 대낮이라서 집에 아무도 없을 때이기도 했고, 가족들 모두가 늦는 바람에 저녁도 혼자 먹어야 할 판이라며 살살 꼬드겨 왔다.
설마하니 집에서 라면 먹고 가라는 말을 강지석의 입으로 듣게 될 줄이야.
픽 웃으며 지석을 따라 학교를 나섰다.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내 자취방과 달리 지석의 집은 학교에서 걸어서 10분도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다.
도착한 곳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축 아파트였는데, 외관만큼이나 내부 역시 깨끗해 보였다. 지석의 친형이 운영 중인 앱 개발 회사가 나름 대박을 친 덕에 올 초에 이곳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이사할 때 도우면서 보긴 했지만, 직접 건물을 보고 나니 ‘대박’이라는 단어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지석을 뒤따라 멈춰 섰다. 지석은 내가 보든 말든 전혀 상관도 하지 않고 비밀번호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굳이 보고 외워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너무 대놓고 찍어버리니 의도치 않게 눈에 들어왔다. 0316.
굳이 기억하지 않으려고 해도 멋대로 어딘가에 새겨 넣듯 외워버린 비밀번호가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문이 열리고, 약간의 상쾌한 향이 코를 간질였다.
이게 뭐라고 설레는 건지.
‘어린 애도 아니고.’
단순히 지석의 집에 발을 들인 것뿐인데도 심장이 빨라지는 게 느껴지고 발끝 한 번 내딛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졌다. 왜 이럴 때 지석이 말한 ‘집에 아무도 없어’라는 문장이 윙윙 메아리치는지 모르겠다.
발을 내뻗으며 나도 모르게 주변을 살폈다. 현관에서 바로 보이는 널따란 거실보다도 주변에 있는 문들에 더 시선이 갔다. 이사 당시엔 거실에 짐만 쌓아주고서 지석에게 끌려나간 채 일당이라는 명목의 포식을 하느라 그의 방이 어디인지도 몰랐다. 그걸 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지만.
그새 거실 소파 앞에 가방을 내려놓은 지석이 자연스레 내 가방을 가져가며 물었다.
“거실에서 하자. 잠깐 앉아있어. 마실 건 뭐 줄까?”
작은 다정함에 가슴이 또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목구멍이 원하는 건 정신을 번쩍 들게 할 독한 소주였는데, 입 밖으로 튀어나온 건 ‘아무거나’라는 성의 없는 말뿐이었다.
소파에 앉아 지석이 부엌으로 향한 사이, 도저히 가만히 있질 못하는 사람처럼 눈으로 거실 곳곳을 훑어보았다. 그러다 결국 멈추는 건 거실 소파에 앉아서도 훤히 보이는 부엌 쪽의 지석이었다.
유리컵에 두 잔의 주스를 담아 손에 들고 오는 그와 순간 눈이 마주칠 뻔했다. 이런 정도로 당황할 필요는 없었지만, 지레 움찔해서는 시선을 돌렸다. 마침 그곳에 큼직한 벽걸이 사진이 있기에 그걸 신경 쓴 사람처럼 눈짓했다.
“가족사진도 있네, 너흰.”
“그래? 보통 찍어서 걸어두지 않아?”
주스가 든 유리컵을 받아 마시며 사진을 응시하다 보니, 지석의 누나 옆에 서 있는 정장 입은 남자에게 시선이 박혔다. 아마도 내 시선을 사로잡은 이유는 그가 지석과 너무도 닮은 얼굴로 어른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기 때문일 거다.
“최근에 찍은 거야?”
“응. 부모님이 저번에 휴가오셨을 때 찍은 거니까, 한 두세 달 됐나.”
부모님은 여전하신 반면, 어째 강지석네 형은 더 어른스러워진 것 같다. 고등학생 때부터 강지석과 어울리며 자주 보기도 봤지만, 무엇보다도 고3 때는 그에게 한동안 과외를 받아온 만큼 친형제 엇비슷할 정도로 가까웠다. 대학교에 입학할 즈음부터 형이 바쁘기도 바빴지만, 그때쯤 갑자기 내게 벽을 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선뜻 만날 수가 없었다. 지석과 함께 대학 생활을 하는 사이에 자연히 멀어진 지건 형은 어느새 내 관심 밖이 되어있었다.
‘강지석이 서른 즈음 되면 형처럼 되려나.’
강지석은 어릴 때부터 지건 형과 쌍둥이가 아니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했다. 물론 나이 차이가 일곱이나 되니 한눈에 봐도 쌍둥이치곤 키와 덩치를 포함한 분위기의 차이가 확연했지만, 얼굴만큼은 판박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닮았었다. 지금은 강지석도 다 커버려서 지건 형과 뒷모습만 보면 구별이 잘 가지 않을 지경이었으나, 얼굴에서 풍겨 나오는 나이라든지 분위기만큼은 절대적인 차이가 있었다.
사진 속 지건 형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그새 다가온 강지석이 테이블을 두고 바닥에 털썩 앉았다. 그제야 사진에서 눈을 뗀 나도 그를 따라 소파에서 내려와 마주 앉았다.
각자 노트북을 꺼내 들고서 과제에 필요한 자료를 찾아 정리하기 시작한 지 1시간 정도 흘렀을 즈음이었다.
“후아, 벌써 지친다.”
지석이 숨을 깊이 내쉬며 책상 위에 엎드려버렸다. 자료 내용을 보기 좋게 정리하는 작업도 거의 끝났기에 그의 노트북 모서리를 붙잡아 당겼다.
“지치면 좀 쉬어. 내가 같이 정리해둘게.”
엎드려 있던 지석의 손이 뻗어와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됐어. 뭘 네가 다 하려고 해.”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든 그가 기어코 내 손에서 노트북을 빼내고서 느릿한 동작으로 키보드를 두드린다.
지석에게 붙잡혔던 손을 힐끔 보다가 슬쩍 테이블 밑으로 내리는 동안 그가 “적당히 추려서 정리 담당한테 보내. 양심이 있으면 좀 해오겠지.”라고 말했으나, 그다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깨를 늘어뜨린 채 귀찮은 듯 키보드를 두드리던 지석이 그의 컵으로 손을 뻗었다. 이미 진작에 주스를 다 마셔버린 터라 텅텅 비어있는 컵을 뒤늦게 확인한 지석이 돌연 내 컵을 붙잡았다. 아직 반이나 남아 있던 주스가 그의 입을 타고 흘러 들어가는 것을 보며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신경 쓰지 않는 척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돌려보지만 그새 빨라진 심장 박동이 자꾸만 집중력을 흐트러뜨렸다.
그저 친구 걸 스스럼없이 뺏어 먹은 것뿐인데 저런 것까지 의미 부여를 하는 내가 한심스러웠다.
그때, 현관에서 삑삑거리는 기계음이 들렸다. 거실에서도 현관이 보이기에 고개를 빼 그쪽을 바라보니, 불쑥 익숙한 얼굴이 튀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