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5화 (175/175)

 “주변에 덩굴도 많고. 그저 덩굴을 늘려 영역을 확장하기 위할 뿐인가?”

회백색 덩굴을 끝없이 쏟아내는 거대한 잿빛 나무. 그건 마치 나무도 몬스터도 아니고 그저 콘크리트로 만든 공장 같다는 느낌이 들 지경. 그 웅장한 자태를 보던 일행들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지다 자연스럽게 멈춰 섰다.

딱히 의논하지 않았지만 점점 더 치켜 올라가는 고개의 각도에 모두가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이건 우리 파티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혼자 부수려면 농담 안 하고 한 달은 꼬박 걸리겠는데.’

고작해야 덩굴을 만드는 생산 공장이라면, 나 혼자서도 부술 수는 있다. 근처에 있는 나무들을 다 때려 부수고 달려들어 뿌리부터 파고들면 되니까. 공격 능력이 대단한 녀석이 아닐 테니 차근차근 휴식을 취하며 부순다면 거인종을 상대하듯 아래부터 위까지 박살을 내놓을 수 있다.

문제가 있다면 당연하게도 효율.

내가 아무리 대단한 육체를 가지고 있다지만 한 달이라는 시간 내내 퀘스트를 위해 나무를 벌목할 정도로 무식하지는 않다. 그 정도면 차라리 마탑에서 아는 마법사들을 고용해 와서 연금 시약을 때려 붓고 말지.

인간의 몸으로 건설용 중장비처럼 강력한 힘을 낼 수 있다고 해서, 굴착기 딱 한 대로 초고층 빌딩을 철거하는 미치광이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폭탄을 쓰고 더 많은 장비를 가져오면 될 걸, 굳이 굴착기 1대로 건물 철거하기 챌린지를 할 이유가 있나?

 “여기까지 하고, 마탑의 마법사들을 데려오는 게 좋겠지?”

 “딱히 마법에 반응하지 않는 것 같은데, 차라리 마법사들과 함께 안전지대를 복원하고 나아가는 게 좋겠어.”

사람 하나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을 커다란 나무의 모습에 일행들이 하나둘 의견을 내뱉는다. 케이티는 흘낏흘낏 나를, 정확히는 내 철퇴를 바라보지만 이내 입술을 꾸욱 깨문다.

상급 모험가인 나 혼자서도 부수려면 부술 수 있다고 생각은 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혼자서 부수고 오라고 말할 수는 없을 테니까. 자연스럽게 물러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술렁이는 건 채팅창의 시청자들이었다.

-저건 진짜 아니야 얌전히 마탑으로 돌아가자

-롤랑센세면 될거같긴한데

-아니시발 덩굴처리에만 반나절이었는데 저거 롤랑한테 맡기면 일주일휴방이야 빡통들아

[관리자에 의해 삭제된 채팅입니다]

-애들 머리도 짠해지나 몸으로 밀 생각을 하는 놈들이 있네;;

채팅창은 ‘일단 롤랑을 던져보자’ vs ‘결과가 뻔히 보이는데 왜?’라는 두 가지 의견으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다.

아니, 사람을 무슨 철거용 폭탄처럼 취급하고 앉아있네….

웃긴 점은 ‘롤랑이라도 저건 불가능해’라는 의견을 내세우는 게 아닌, ‘롤랑한테 시키면 존나 오래 걸리니까 지루하다’ 쪽의 의견이 우세하다는 점. 아무래도 어제 내가 덩굴들을 처리하느라 방송이 애매하게 종료돼서 여론이 안 좋은가 보네.

결국, 시끄러운 채팅창과 함께 우리 일행들은 다시 탑 밖으로 향했다. 신전과 마탑에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신성력을 흡수하는 덩굴, 마석을 주지 않는 식물형 몬스터, 그리고 덩굴을 무한대로 증식시키는 초거대형 몬스터의 등장. 이야기만 들어도 귀찮기 짝이 없는 놈들이지만 모험가들은 딱히 위기 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결국, 신성력이 아니면 반응을 하지 않는다는 특성 하나 때문에.

 ‘저거 본체 때리면 100% 반격 패턴이 시작될 것 같은데….’

애초에 퀘스트 창에서 마탑의 도움을 받아 들어왔다고 하지 않았던가? 회백색 덩굴과 그걸 무한대로 찍어내는 초대형종 몬스터에 대해 뭐라도 연구가 진행되어야 퀘스트가 정상적으로 진행된다는 뜻이겠지.

막말로 무식하게 진행하려면 40층 너머에 있을 인맥들을 불러오면 된다. 신전 세력이 당한 봉변에 관해 설명하며 주머니를 열면 명분도 있겠다 흥미도 돋겠다 우르르 몰려 내려오겠지.

혼자서 때려 부순다면 한 달이 넘게 걸리는 무식한 행위지만, 최상급 모험가가 대충 20명 정도 모여서 뒷 일을 생각하지 않고 대놓고 때려 부수면 일주일 안에 처리가 가능할 테고. 막말로 43층급 고위 마법사 열댓 명 모아서 마나 탈진할 때까지 스킬 꼬라박아버리면 35층 따리 주제에 자기가 뭘 어찌할 건데.

문제가 있다면 그 짓을 하다 또 30층에서처럼 퀘스트가 꼬일까 봐 걱정된다는 점.

그냥 오픈 월드식 RPG면 퀘스트가 꼬이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무식하게 밀어붙이겠지만, 스토리 라인에 존나게 수상쩍은 여신이 엮여 있는 게 문제다. 누가 봐도 내 홀로그램 창과 연관이 있는데 무시를 할 순 없지.

……이름 모를 신의 축복 이후엔 퀘스트도 보상도 없이 멈춰 있긴 하지만.

 “그래서, 길드는 어떻게 하겠대?”

 “길드야 뭐, 신전 따라가는 거지. 신전은 난리가 났고.”

그리 생각하며 테이블에 축 늘어져 있으니 자연스럽게 다가와 입을 여는 엘리스. 꽤 커다란 사건을 물고 와서 그런지 그녀의 눈동자가 흥미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모험가 길드에서 잔뼈가 굵은 그녀라지만 이런 사건은 처음 겪을 수밖에 없지.

애초에 플레이어와 엮여 시작된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 때문이니 역사상 최초 따위의 타이틀을 남발해도 틀린 말은 아니니까.

아이린이 심각한 얼굴로 신전으로 떠나고, 모험가 길드는 난리가 나서 마탑과 신전에 사람을 보내기 시작했다. 안전지대라는 건 그만큼 모험가들에게 있어 절대적인 공간이었으니까.모험가들은 별 생각이 없지만 길드 측에서는 난리가 난 거다.

몬스터는 안전지대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안전지대를 향해 딱히 덤벼들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안전지대에 있는 경비들은 값비싼 마탑의 마도구를 지키기 위한 경비원이지 몬스터를 대비하기 위한 수비병이 아니다. 이는 탑에 모험가가 발 디딘 최초의 순간 이후 지금까지 변하지 않던 룰.

그런 룰이 깨져버렸고, 룰이 깨지면서 마탑의 마법사와 신전의 사람들이 죽어 나갔으니 죄지은 게 없어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움직일 수밖에.

 “그래서, 분위기상 어떻게 될 것 같아?”

 “뭘 어떻게 할지는 몰라도… 길드장 아저씨 얼굴에 주름이 왕창 생겼더라. 아낌없이 쏟아 부을 생각인 것 같던데.”

 “아마 신전이 대대적으로 움직이고, 길드가 재정이 휘청일 정도로 지원을 할 것 같네. 모험가 길드가 아무리 자유롭다 해도 신전의 피해 앞에서 고개를 떳떳이 들 순 없을 테니까.”

말없이 엘리스의 설명을 듣던 케이티가 고개를 끄덕인다. 귀족 출신인지라 명예와 보복에 대해 좀 더 민감해서 그런지 모험가 길드와 신전이 발작하듯 움직일 거라며 설명을 덧붙이며.

그런 케이티의 말이 맞는다는 듯 우리가 탑에서 나온 지 몇 시간 만에 난리가 났다.

 “――따라서, 여신의 이름으로 우리는 그 사악한 흉물을 토벌하고자 하니! 여신의 뜻 받드는 이들은 필히 무기를 들고――”

언데드 때문에 신전이 참전하는 건 알았어도, 35층 중간 이벤트가 성전 선포 이벤트일 줄은 몰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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