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급 이상의 모험가들이 초인적인 무위를 발휘한다는 건 직접 두 눈으로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정작 내가 밤도 새고 두 끼 정도 굶으니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정작 나는 신성력에 이름 모를 신의 축복까지 더해져 컨디션이 되려 좋아졌다고 느끼는 중이지만.
그렇게 나무를 부숴 앞으로 나아가다, 중간중간 신성력을 뿜어내기를 반복하자 입질이 왔다.
“…저쪽에서, 뭔가 빠른 속도로 기어오고 있어.”
가만히 있는 덩굴들은 궁수의 탐색에 걸리지 않아도, 뱀처럼 움직이기 시작하면 당연히 알아차린다. 덩굴 주제에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대놓고 몸을 날려오니까. 잿빛 나무 사이를 지나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달려드는 덩굴들.
먹이를 노리고 강을 헤엄쳐 건너는 물뱀처럼 독 웅덩이 위로 회백색 덩굴이 파장을 일으키며 헤엄쳐 다가오고 있었다.
“참, 식물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징그러운 녀석들이야.”
“우와아… 몸을 저렇게 흔들면서 오는데 저게 식물이 맞아?”
“잘라봤으니 알잖아. 내장도 근육도 없더라. 그냥 끈적한 섬유질 덩굴이야.”
그렇다 해도 그 수는 매우 적다. 시야를 가릴 정도로 득실득실하던 놈들이 이제는 물 위를 헤엄치는 뱀처럼 보인다는 건, 고작해야 열 마리도 되지 않는 숫자라는 뜻이기도 하니까.
덩굴 식물 몬스터는 마리라고 불러야 하나, 다른 단위가 있는 걸까?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으니 좀이 쑤신다는 듯 앞으로 나선 케이티가 순식간에 전부 베어버린다. 생김새와 달리 식물이라는 걸 주장하듯 비명도 없이 석둑 잘려나간 덩굴들.
안전지대를 휩쓸어버리던 무시무시한 물량 대신 맥 없이 독 웅덩이를 건너와 차례대로 케이티의 검에 싹둑싹둑 잘려나가는 꼴이 처량하기까지 하다.
“이렇게 보니까 참 별거 아닌데.”
“롤랑이 전부 처리했으니까 그렇지. 나는 반나절 내내 싸웠는데 남아 있는 놈이 있다는 게 더 대단하다고 생각해.”
“그나저나 이놈들, 몬스터면서 마석도 없이 가루가 되어 사라지니 다른 모험가들은 딱히 35층에 들어 올 생각도 안 하겠네.”
누가 봐도 불길하게끔 34층의 통로를 휘감은 덩굴 때문에 모험가들이 발 디디길 꺼리고 있지만, 언제나 모험 정신 넘치는 놈들은 있기 마련이다. 난동을 피우고 덩굴을 뿌리 뽑은 지 하루가 지났으니 누군가는 덩굴에 대해 알면서도, 누군가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35층에 진입하겠지.
그리고 그들이 맞이하게 될 건 몬스터 한 마리 없이 나무만 자라 있는 35층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좀 심각한 문제 같긴 한데.
“…그러네, 마석이 없구나. 만약 34층도 36층도 이렇게 되면 탑에서 마석이 안 나와.”
“대체 탑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마왕이 모험가를 상대로 경제 보복이라도 하는 건가. 그런 어처구니없는 우스갯소리가 잠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물론 현실성을 따져보자면 마석의 유통을 잠가 버리는 경제 보복보다는 플레이어의 수입을 막아버리는 악랄한 게임사의 기믹일 뿐이겠지만.
오크 사태 땐 마석의 유통을 폭증시켜 보부상들이 돌아다니게 하고, 그걸 탑 밖으로 뛰쳐나간 오크들이 습격하더니 이번엔 정반대의 이벤트가 벌어지는 게 아닐까. 물론 무식하게 뚫고 들어와 35층을 수색 중이니 마석 고갈 이벤트가 벌어질 것 같지는 않네.
“저 늪지 너머에서부터 왔으니, 이쪽으로 돌아가야 하나?”
“아니, 내가 길을 만들게. 어차피 몬스터가 한 마리도 없는 것 같으니 전투를 가정하고 마나를 아낄 필요는 없어 보여.”
-한세아가 머리를 쓰기 시작함 ㄷㄷ
-35층쯤 오니까 애가 발전이라는 걸 하네
-포브스 선정 걸음마가 가장 늦은 방송인 1위
-그냥 불지르는 거 보고 싶은데 시원하게 질러버리자
-삐쩍 말라서 잘 탈것 같게 생기긴 하네
내가 무식하게 때려 부수는 걸 보고 웃고 떠들던 채팅창도 슬슬 뾰족한 놈들이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가시를 세우기 시작하는 걸 보니 지루한가 보네. 이 사이버 망령들은 심심하고 지루하면 한세아를 갈구기 시작하는 게 일종의 놀이로 자리 잡은 상황.
하기야 나로서는 반나절 내내 전투를 한 상황이지만, 시청자들의 시선으로 보면 좀 다르지. 그 단순 반복에 가까운 파괴 행위에 질렸다는 듯 한세아가 방송을 종료하긴 했지만, 그 외에는 볼 게 없었을 테니까.
아마 방송으론 2일 차인데 35층에서 NPC들을 구출한 이후 진척된 게 하나도 없네~ 같은 느낌 아니려나.
“아니이, 뭘 머리를 쓰기 시작해 그 전부터 머리 엄청나게 썼거든? …물론 짠해좌 글을 많이 써먹긴 했는데 그래도 여기까지 진행을 해 왔으면 좀!”
솔직히, 나도 채팅창에 시청자로서 퀘스트 창 갱신된 거 없냐고 질문을 도배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있긴 해. 설마 30층에서 벌어졌던 일처럼 진도를 건너뛰어서 퀘스트에 오류가 난 거라면?
골렘을 잡아 팰 땐 진도를 너무 건너뛰어서 김석현의 방송을 보고 차근차근 포인트를 되짚어 나가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내가 몸으로 뚫어버린 일 때문에 비슷하게 꼬이는 건 아니겠지?
그런 내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시청자들과 툭탁툭탁 말로 싸우며 지루함을 달래주던 한세아가 갱신된 퀘스트창을 띄워 올린다.
※
[마탑의 도움을 받아 진입하게 된 35층에는 어째서인지 몬스터가 존재하지 않았다]
[언데드로 변한 몬스터 대신 우리를 반겨주는 건 무수히 많은 덩굴 몬스터들]
[마석이 단 하나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건… 이 많은 녀석이 군체 일부라는 뜻인가?]
식물형 몬스터라는 힌트에 이어 군체 일부라는 단어까지 나오자, 지루함에 시달리던 시청자들이 왁자지껄 시끄럽게 제 추리를 채팅창에 올리기 시작했다. 읽기 힘들 정도로 난리가 난 상황이니 틀리든 말든 일단 제 생각을 표현하고 보는 거지.
-대형종보다 큰 거 오냐 ㄷㄷㄷㄷ
-큰 거(물리적)
-큰거오냐, 큰거오냐 하면서 진짜 큰게 올 줄은 몰랐는데
-롤랑센세가 반나절동안 때려부순게 딱 잔가지 정리였다는거임?
-숱 치는데만 반나절이 걸리는 극한의 풍성충
가장 많은 의견이 모인 건 다름 아닌 초대형종의 출현. 중간 이벤트다 보니 별것이 없을 줄 알았지만 사실 아니었던거임~ 하며 방학 직전 흥분한 잼민이 무리처럼 날뛰는 시청자들이 조금은 어지럽게 느껴진다.
그 유치함은 둘째 치고, 의견 자체는 타당하지만.
‘존나 큰 나무? 아니면 비대한 덩굴 덩어리?’
덩굴은 아무리 잡아도 마석이 나오지 않으며, 이는 덩굴 하나하나가 개별적인 몬스터가 아니라 초대형 몬스터의 일부라서 그렇다. 퀘스트 창에서도 군체 일부라고 했으니 35층의 이벤트는 어딘가에 숨어서 덩치를 불리고 있는 초대형 식물일 것.
짧고 긴 온갖 채팅과 도네이션을 통한 현금술로 자신의 의견을 꽥꽥 내뱉는 걸 종합하면 이런 의견이 되거든.
“…저게, 그건가?”
“이 거리에서 저렇게 보이면, 대체 얼마나 큰 거야…?”
그리고 그 집단 지성이 생각보다 더 높은 확률로 정답을 말한다는 걸 알게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딱히 정교하고 세밀한 탐색 능력도 필요 없이, 덩굴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방향을 향해 이동하다 보이니 눈에 딱 들어오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 분명 독 웅덩이와 마비 늪 몇 개 너머에 있는 놈이지만 이상할 정도로 눈에 들어온다.
주변에 있는 잿빛 나무들을 무슨 솜털처럼 보이게 만들면서.
“그, 엄청 크네. 도시에 있는 건물들보다 커다란 것 같은데.”
“저 정도면 도시에 있는 건물이 아니라, 수도나 북부에 있는 자그마한 성보다 큰 것 같은데?”
하기야 보다 보면 시야 끝자락에 보이는 빌딩처럼 느껴진다. 서울에선 미세먼지 측정기로 사용하는 롯X 타워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커다란 나무. 원근감을 무시한 채 시야에 떡 들어오자 시청자들도 난리가 났다.
-저게 중간보스가 맞음?
-그 누가 봐도 물리적으로 베어 넘기라고 있는 넘이 아닌 것 같은데용
-롤랑이라면 베어넘길 수 있지 않을까
-아니 굳이 몸으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마법 쓰라고 마법;;
-마탑이 있고 연금술사가 있는 판타지 세상에서 힘으로 부술 생각부터 하넼ㅋㅋ
[롤랑의크고우람한철퇴님 10,000원 기부!]
설마 저것도 롤랑에몽 ‘해줘’로 떼울 생각은 아니지?
[퀘스트창좀읽어라님 5,000원 기부!]
퀘창에서 마탑의 도움을 받으랬는데 넌 왜 여기에 있냐고
빌딩에 익숙한 현대인의 시선을 가지고 카메라를 통해 봐도 저 나무는 너무 커다랗다. 차라리 건물이나 골렘 따위라면 상관 없을 텐데 되려 나무라서 더욱 이상하게 느껴지는 거지. 그 나무가 나무라고 부르기엔 조금 어려울 정도로 기분 나쁘게 생긴 점도 있고.
그, 나 어릴 적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계단참에 그늘을 만들어주기 위한 나무가 심겨 있었다. 가지로부터 덩굴 같은 줄기가 아래로 치렁치렁 내려오는 커다란 나무가. 등나무였는지, 다른 나무였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 되게 기분 나쁘게 생긴 걸 봐선 저게 35층 중간 이벤트의 범인이 맞겠지? …아니, 나무한테 범인이라 했다고 단어 하나하나 가지고 씹고 뜯고 즐기시진 마시구요 제발. 저게 딱 봐도 퀘스트의 원흉인 거 아니야.”
한세아의 말대로 기분 나쁘게 생긴 저 커다란 나무에는 회백색 덩굴이 징그러울 정도로 휘감겨 있었다. 커다랗고 풍성한 아름드리 거목의 나뭇잎 하나하나를 전부 덩굴로 바꿔놓은 게 아닐까 싶은 모양새.
바람결에 잎이 떨어지듯 가지에서 투둑투둑 떨어지는 회백색 덩굴들이 마치 뱀처럼 기어가 주변의 잿빛 나무를 휘감는 모습은, 누가 봐도 침식과 감염 따위의 단어를 떠오르도록 만들었다.
점차 가까워질수록 선명해지는 그 모습. 마치 인형에 눈알을 붙여넣듯, 장난감에 건전지를 집어넣듯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에 덩굴을 계속해서 심어나가는 모습은 생동감이 넘치면서도 역겹기 그지없다.
“으음, 역시 전부 죽었나 보네.”
“아아, 여신이시어….”
그리고 더욱 가까워질수록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모험가나 사제, 신전 기사들의 장비로 보이는 것들의 잔해와 새하얀 백골 따위들. 신성력에 반응하는 놈들이지만 사람을 먹지 않는 건 아닌지 고작 하루 만에 뼈만 남아 있는 피해자의 모습들이 보인다.
안전지대에서 이곳까지 강제로 끌려오며 못 볼 꼴을 봤는지 장비는 물론이요 뼈조차 그다지 온전하지 못한 모습을 보자 아이린이 침음성을 흘리며 작게 성호를 긋는다.
살점 하나 남지 않은 뼈다귀라지만 열에 뒤틀린 철근처럼 휘어지고 뒤틀리다 못해 금이 가고 깨진 사람의 뼈는 어떤 참상이 있었는지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조금씩 다가갈수록 일행들의 고개가 점점 위로 젖혀진다.
“…크긴, 무지막지하게 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