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1화 (171/175)

 “…야, 나 포션 안 써봐서 그런데 이거 마시는 거야? 아니면 뿌려도 되는 거야?”

-게임을 얼마나 어화둥둥 곱게 했으면 포션 먹는법을 모름?

-이게 그 버스비 50원이냐고 물어본 국회의원이랑 머가 다르냐

-포브스 선정 말 한마디로 천냥빛을 만드는 방송인 1위

-아니 님 마법사 겸 연금술사자나욬ㅋㅋㅋㅋ

-연금술사(포션 복용법 모름)

그러면서 슬쩍 중얼거리는 모습이 기가 차네. 슬슬 짠해좌가 필요 없을 정도로 성장한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멀었나.

한세아가 시청자들에게만 말을 하며 포션을 내밀자 모험가 중 한 명이 그걸 낼름 채가서 신전 기사의 투구를 벗기고 입가에 흘려 넣는다. 미리 사 둔 저층용 포션이라 효과가 대단하지는 않지만 반쯤 기절한 사람에게 기력을 북돋아 줄 정도는 되겠지.

새하얀 투구를 벗기자 드러나는 갈색 더벅머리와 순박한 인상. 미녀가 아니라고 아쉬워하는 시청자들을 무시한 채 한세아가 시골 야채 가게에 어울리는 순박한 인상의 기사에게 한 걸음 다가가 질문을 던진다.

 “형제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노, 놈들이 끝없이, 몰려와…, 서는. 성역을, 성역을 갉아 먹….”

 “쉬세요, 기사님. 설명은 저희가 하겠습니다.”

형제님이라는 단어가 무슨 암구호라도 되는지 제대로 눈도 못 뜬 신전 기사가 한세아를 향해 입을 열다가 모험가들의 만류로 다시 바닥에 몸을 뉜다.

그래도, 저 말만 들어도 대충 상황이 짐작 가네. 

모험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31층의 테마는 오염과 침식인 것 같았다. 판타지 세상에 없으면 서운한 존재인 언데드들과, 이에 맞서기 위한 신성력을 카운터치는 덩굴들까지.

 “…성역은 신성력의 순환을 응용하는 대규모 성법입니다. 사제들로부터 흘러나온 신성력이 하늘로 치솟아 공간 자체를 정화하고, 비처럼 내려와 땅 위에 있는 생명에게도 은총을 내려주는 방식이죠.”

물이 구름이 되었다가 빗방울이 되어 땅으로 내려오듯 성역 또한 신성력을 하늘로 올려보내 지상을 광역으로 정화한다고 설명해주는 모험가. 신전과 연이 닿아 있는 모험가인지, 아니면 마법사라서 성법에도 관심을 가진 것인지 말이 좀 많지만, 알아듣기는 쉽게 설명을 이어나간다.

문제가 있다면 저 덩굴 놈들이 아이린의 신성력을 보고 달려들었듯이, 성역에서 내려오는 신성력을 보고 징그러울 정도로 몰려왔다는 점.

케이티의 검에 맥없이 잘려나갈 정도로 연약한 놈들이지만 그 수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30cm 남짓한 덩굴 따위는 인간에게 있어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지만, 그 덩굴이 쌓이고 쌓여 톤 단위가 된다면 사람이 깔려 죽을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하니까.

 “사제들과 신전 기사들이 성역을 휘감는 기괴한 덩굴들을 최대한 처리했지만… 놈들은 재생이라도 하는 건지 계속해서 나타나더군요. 성역의 신성력이 전부 고갈되고 신전 기사들과 사제들의 신성력까지 전부 사용할 때까지.”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덩굴에 휘감겨서 박살이 나 버린 성역. 신전 기사와 모험가들이 버티고 있는 이 땅이 이상할 정도로 넓고 평평하다 싶었는데 안전지대가 있었던 곳이어서 그런가 보다.

조금 이상한 점은 평평한 땅이 아주 멀쩡하다는 점. 성역이 붕괴하고 신전 기사들이 기절할 정도로 달려드는 덩굴을 상대했는데 지반이 멀쩡하다니?

 “이봐, 그 덩굴들이 신성력만 빨아 먹고 사라졌나?”

 “덩굴? 촉수를 말하는 거라면, …예. 정확하게 말하자면 휘말려 끌려간 모험가나 사제도 몇 명 있지만, 놈들이 관심을 보이는 건 신성력이었지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신성력이 고갈된 뒤 모험가들끼리 모여 저항을 하니 포기하고 돌아갔습니다.”

물량 말고는 딱히 무서울 게 없는 놈들인가. 하기야 35층에서 일어난 일이니 중간 보스라고 지레짐작을 했을 뿐이지, 단순한 이벤트성 퀘스트일 가능성도 있구나.

그 덩굴인지 촉수인지 기생충일지 모르는 놈들은 성역의 신성력을 쪽쪽 빨아먹고, 그걸 보고 기겁해서 신성력을 뿜어내는 신전 기사와 사제들도 무게로 파묻어버려서 납치해 간 다음 텅 빈 공터에 만신창이가 된 모험가만 남자 관심을 꺼버리고 물러갔다는 말에 아이린의 안색이 어둡게 변한다.

몇몇 모험가들이 멀쩡하게 살아 있다지만 대부분의 신전 기사와 사제, 수녀들은 촉수 덩어리에 파묻혀 끌려간 상황. 말이 끌려갔다지 성역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덩어리라면 신성력이 고갈된 뒤 무게에 짓눌려 으스러지고 박살 나서 죽었을 거다.

 “…그렇군요. 감사해요.”

 “그래서, 부탁이 있는데요. …보시다시피 이곳에 남은 게 하나도 없어서 그런데 탑 밖으로의 호위를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어지는 마법사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설명을 이어나가던 마법사는 마나만 고갈된 상태인지 초췌해 보일 뿐 다친 곳은 없어 보이지만 몸으로 싸워야 했던 모험가들은 하나같이 만신창이.

다들 마음씨가 고운 사람들인지 한 명 남은 신전 기사라도 지키겠다고 몸을 사리지 않고 날뛰었는지 팔다리 중 하나는 부러지거나 꺾인 모양새다.

치료를 할 수 있는 신성력도 없고 텐트에 있어야 할 물자도 통신용 마도구와 함께 쓸려나갔겠지. 주변의 잿빛 나무를 대강 자르고 텐트 조각으로 팔다리를 묶어 둔 모양새가 처량하기 짝이 없다.

 “그야 당연하죠. 신전은 여러분들의 노고를 외면하지 않을 거예요.”

 “다들 걷는 데 문제가 없으시니 바로 내려갈까요?”

아이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일행들. 플레이어인 한세아가 이 와중에 NPC를 싹 다 버리고 간다는 선택지를 고를 리 없거니와, 마음씨 착한 우리 일행들이 알 바 아니라고 외면할 일도 없다 보니 그걸 알고 있는 아이린이 곧바로 수락한다.

일말의 주저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린과, 이에 군말 없이 받아들이는 우리 일행들을 보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모험가들. 물자를 전부 잃었다지만 장비는 챙겨 입은 상태고, 상처를 입었다지만 후유증이 심각한 큰 부상은 아닌 것으로 보이니 안도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일단 포션 있는 걸로 부상은 최대한 치료한 다음… 밖으로 나가기 전에 34층의 안전지대로 향하죠. 모험가 길드와 신전에 정보를 전해야 할 것 같으니까요.”

 “아이린 언니 말대로 하자. 부상자가 여덟 명이나 되는데 전부 데리고 탑 밖까지 이동하긴 힘들 것 같아.”

다리를 다친 사람을 한세아의 포션으로 응급처치를 한 뒤, 의식을 잃은 신전 기사는 내가 업었다. 다친 모험가 일곱 명과 기절한 신전 기사 한 명. 전투는 최대한 피해서 이동해야겠네.

신성력을 사용하지만 않으면 상관없다는 듯, 34층으로 되돌아가는 길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안전지대로 향할 때 느낀 것처럼 신성력을 양분 삼아 증식하는지 그쪽에만 잿빛 나무와 덩굴이 빼곡히 자라 있었으니까.

통로에 가까워질수록 잿빛 나무는 가로수보다 드문드문 나 있는 모양새였고 담쟁이덩굴처럼 빼곡하던 놈들도 눈에 띄게 줄어든 모양새. 대충 봐도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모습에 모험가들의 몸에서 긴장이 탁 풀리는 게 보였다.

그렇게 전투를 최대한 피해 도착하게 된 34층의 안전지대.

 “그런 일이 있었단 말입니까? …신전이 여러분들의 노고를 기억할 것입니다.”

기절한 채 내게 업혀 온 신전 기사를 보고 화들짝 놀란 34층의 신전 기사들. 모험가들을 치료하는 동안 사정을 들은 그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저건 신전의 공식적인 멘트라도 되는 건가 싶네.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부르는 만큼 집단의식이 끈끈한지 모험가들을 돌보던 사제와 수녀들의 손짓이 조금 더 정중하게 바뀌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환자를 치료하던 의사에서 귀빈을 모시는 수행원처럼.

물도 대신 떠먹여 줄 것 같은 극진한 대접에 모험가들이 되려 황송해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일행들이 슬쩍 다가온다.

 “일단 길드와 마탑에도 상황을 전달했어. 인제 어쩌지? 35층으로 가서 그 기괴한 덩굴들의 뿌리를 찾아볼까?”

 “뿌리?”

 “응, 뿌리. 모험가들은 촉수라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덩굴류 식물처럼 보였거든. 그렇다면 놈들이 그렇게 자라나게 만드는 뿌리가 있지 않을까 해서.”

자신만만한 한세아의 말에 일행들이 일리가 있다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천재 마법사 한나의 이미지를 굳게 믿어서 그런가 의심 따위는 하지 않는 모양. 그 모습에 나는 고민을 하는 척 슬쩍 시선을 돌려 한세아의 방송 창을 쳐다보았다.

-퀘스트 창으로 컨닝 미쵸 ㅋㅋㅋㅋ

-인벤토리로 깝치더니 이제는 퀘스트 창으로?

-그래도 퀘스트 창이 알려줬다고 말할 순 없자너 ㅎ

-그냥 성좌한테 간택받아서 정보를 얻었다고 하면 안되냐?

-그러면 신성모독으로 여신교가 메달아서 불태울듯?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낄낄대며 한세아를 놀려 먹는 시청자들. 그 모습에 눈동자를 굴려 일행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한세아를 슬쩍 쳐다보니 귓가가 붉어진 게 보인다. 거짓말하는 실력이 늘어 말을 더듬지 않는다고 해도 몸은 솔직하구나.

[신성력을 흡수해 증식하는 기괴한 기생 덩굴 식물들]

[길드의 모험가들도 마탑의 마법사들도 정체를 모르는 기괴한 놈들이 성역을 덮쳤다]

[신성력을 흡수해 증식하는 식물형 몬스터라니, 언데드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

그다음으로 보이는 건 한세아가 제 방송에 시청자들을 위해 띄워 둔 퀘스트 창. 생존자들의 증언을 들어서 그런지, 34층으로 복귀해서 그런지 갱신된 문구는 35층의 그것들이 기생 덩굴 식물이라고 단언하고 있었다.

이래서 한세아가 뿌리를 찾을 생각을 했구나.

확실히, 기생형 덩굴 식물이 증식한다고 쓰여 있으니 뿌리를 찾아 뽑아버려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드네. 담쟁이덩굴이나 칡뿌리 같은 건 뿌리를 뽑지 않으면 줄기가 계속 올라와서 제거되지 않는다고 들었으니까.

 “확실히, 일리가 있는 것 같네. 놈들이 안전지대로 가까이 갈수록 늘어난 것도 있고, 잿빛 나무도 덩굴과 함께 증식하는 모양새였잖아. 통로 주변에는 나무가 거의 없어서 시야가 트여 있었지만, 안전지대 주변에는 덩굴들이 물리적으로 휩쓸고 지나갔음에도 나무가 많이 남아 있었지.”

 “아, 아아! 그러네, 마도구도 텐트도 밀고 지나갔다고 했는데 잿빛 나무는 빽빽하게 자라 있었어.”

한세아의 의견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시해주자 화들짝 놀라며 호들갑을 떠는 케이티. 나무를 휘감고 있다가 무슨 용수철처럼 몸을 날려 달라붙는 놈들이 식물이라는 게 꽤 놀라운가 보다.

 “그러면 35층으로 다시 갈까? 전투도 거르고 최대한 빨리 올라와서 물자는 아직 풍족해.”

 “그러는 게 좋겠어요. …혹시라도, 살아 있는 형제자매님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아….”

 “그래도 휴식은 취해야 하니까, 하루는 이곳에서 머물고 가죠.”

다양한 감정이 뒤섞인 아이린의 말에 그레이스와 케이티가 슬그머니 그녀의 양옆으로 달라붙는다. 모험을 같이하고 여신에게 사명을 함께 받아서 그런지 사이가 돈독한 모습이 보기 좋네.

솔직히 말해서 생존자는 거의 없을 것 같지만, 이런 상황에 그런 꿈도 희망도 없는 말을 하기에는 좀 그래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급하다 해서 멋대로 움직이면 죽는다.

금전적인 손해를 본다든가, 상처를 입는다는 수준이 아니다. 탑은 생명의 여신조차 모르는 불경한 몬스터들이 가득한 야만의 공간. 크게 다치는 수준은 운이 좋은 거고, 모험가 대부분은 그저 탑 안에서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뿐이다.

먹을 것은 구현되지 않았지만, 식욕은 구현되어 굶주림에 난폭해진 몬스터의 한 끼 식사가 되거나, 파괴된 지형지물이 복원되며 휩쓸려 사라지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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