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냐, 덕분에 좋은 걸 알게 되었잖아. 이 덩굴 놈들이 신성력을 빨아 먹는다는 거. 안전지대로 향할수록 나무가 빼곡히 자라 있고 덩굴도 이렇게 많다는 건… 이놈들이 안전지대의 신성력을 빨아먹었다는 뜻이겠지.”
“그, 그런…!”
자신 때문에 일행이 위험에 처했다고 생각하는지 머리를 꾸벅 숙여 보이는 아이린을 토닥여주는 그레이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추측 때문에 되려 아이린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려버린다.
그야 신성력에 반응해서 피를 빠는 거머리처럼 저렇게 달라붙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예측이지만, 그걸 종교적 형제자매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조급해진 아이린에게 대놓고 말해버리면 좀….
히끅-! 하고 숨을 들이마시다 딸꾹질까지 아이린의 모습에 그제야 제 말실수를 깨달아버린 그레이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한세아가 슬그머니 다가와 내 팔뚝을 톡톡 건드린다.
“무슨 일이야?”
“롤랑, 이놈들이 너무 많아서 스파크 마법 정도로는 처리가 안 될 것 같아…. 결계 밖으로 나가서 마력 방출 같은 거로 전부 날려버릴 수 있어?”
확실히 신성력 보호막 바깥에 빼곡히 들어찬 걸 보면, 스파크 마법이나 발화 화살촉 따위가 아니라 기름통과 폭약이 갤런 단위로 필요하겠네. 이러면 이름 모를 신의 축복을 실험해 볼 기회인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온몸을 마나로 코팅하고 신성력 보호막 밖으로 걸어 나섰다. …으음, 웜 아가리에 씹힌 것처럼 기분이 나쁜데. 축축하고 물컹한 감촉이 느껴지는 건 아니지만 수백 갈래의 촉수가 갑옷을 핥아대고 있으니까.
촉수와 어울리는 건 남자 기사가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주저 없이 철퇴에 마나를 때려 박듯이 모았다. 신성력은 마나에 비해 양이 적고, 놈들이 흡수할 수 있으니까,
마나를 전력으로―!!!
컨디션이 좋아 날아갈 것 같다느니, 몸이 새것이 된 것 같다는 등 다양한 표현을 들어본 적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게 솔직히 과장 섞인 이야기인 줄 알았지. 그래서 육체에 신의 축복이 깃들었다는 말을 가볍게 여기고 평소대로 행동한 게 잘못이었나보다.
‘……하늘?’
평소처럼 무식하리만치 마나를 집중시킨 철퇴. 게임의 기본 아바타인 만큼 불괴 속성이라도 있는지 10년의 세월 간 나와 함께하던 무기를 늘 하던 대로 휘둘렀는데, 갑자기 세상이 뒤집히고 감각이 뒤섞인다.
귓가에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머리가 멍하고, 육체를 감싼 마력 코팅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눈앞에는 끈적한 진흙 늪과 회백색 촉수가 아닌 탁 트인 잿빛 하늘이 음울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내가 날고 있다고? 아니, 추락하고 있다고?’
철퇴를 내려친 반발력 때문에 허공으로 부웅 떠오른 모양.
등허리에 힘을 줘 허공에서 몸을 뒤틀어 자세를 바꿨다. 그렇게 하늘에서 땅을 내려보니 아래쪽에 있던 회백색 촉수의 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문제는 주변에 있던 진흙 늪도 독 웅덩이도 잿빛 나무의 군락도 온데간데 없다는 거지.
그나마 다행인 점은 마비 진흙과 독액과 덩굴 파편이 비처럼 쏟아져 개판이 난 지면에 새하얀 보호막이 꿋꿋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 직접 후려친 것도 아니고, 딱딱한 파편이 아니라 물컹한 진흙과 독액이 튀어서 그런지 보호막이 깨지진 않은 모양이다.
…깨지기 직전의 유리창처럼 금은 잔뜩 갔지만.
“로, 롤랑?! 괜찮은 거 맞지!”
-아니 시발 ㅋㅋㅋ 촉수를 날리라구요 필드가 아니라
-그 시발 20층 쓸어버린 번개 마법보다 이게 쎈거 아님?
-팔라딘(물리)의 신성 마법(물리력)
-카메라 좀 돌려봐라 주변에 머 남아 있는게 없네
-지금 걍 스플뎀에 5★ 보호막에 금이 간거임? 건들면 깨질것같은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올랐다가, 속도가 느려지고 다시 추락을 시작하는 순간 자세를 바로잡고 시야 구석에 있던 한세아의 방송 창을 흘깃 쳐다봤다.
난장판이 된 주변과 금이 간 방어막 너머로 보이는 허공에 떠 있는 자그마한 푸른 점. 점프할 때보다 더 높은 곳까지 올라온 걸 봐선 힘 조절을 잘못해도 단단히 잘못한 모양이네. 육체에 축복이 깃들었다는 게, 마나를 통한 육체 강화 효율도 올려 준 모양이다.
…지난번 만월 늑대를 상대할 땐 주변의 땅을 뒤집어 엎어버리고 흙의 파도를 만들어 내긴 했지만, 무기와 함께 강화한 내 몸이 튕겨 나갈 정도는 아니었다고. 들고 있던 수류탄이 다이너마이트가 되었다고 해야 하나.
“롤랑! 너, 너무 강하게 날려버리는 거 아니야?!”
“이게 상급, 아니 최상급 모험가…?”
진흙과 독액과 마른 흙이 뒤섞여 질퍽해진 땅에 쿵- 하고 착지하자 무릎까지 땅에 박혀버린 내게 우르르 달려오는 일행들. 이름 모를 신의 축복에 대해 모르는 그녀들로서는 이게 실수가 아니라 의도한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달려오던 중 바닥이 움푹 팬 뻘밭이 되어버린 탓에 일행들이 휘청거리는 게 보인다. 그제야 바닥 상태를 확인하고는 급히 어스 컨트롤을 사용해 좁고 기다란 오솔길을 만들어주는 한세아.
“아우, 바닥이… 일단 여기를 벗어나서 이야기할까?”
“직접 닿지 않았는데도 발목이 저릿한 것 같아. 독액과 늪지가 뒤섞이면 독성이 강화되기라도 하나?”
소란의 중심에서 벗어날 생각이 가득한 그레이스와 뻘밭에 휘청이다가 마른 오솔길 위에 올라서서 발목을 휘휘 털어내며 투덜거리는 케이티. 그 모습을 보니 미안한 마음과 창피한 마음이 뒤섞인다.
아니, 이렇게 강해질 줄은 몰랐지. 안 그래도 몸뚱이 하나는 더럽게 튼튼하고 강한데 거기에 마력 효율까지 늘어나니 컨트롤이 안 되네. 마치 거미에 물려 초능력을 얻은 대학생이 문손잡이를 부순 것과 같은 상황이다.
…물론 실수의 스케일은 비교도 할 수 없긴 하지만.
※
전력을 다해 내려친 일격. 사람이 펀치 머신을 때렸다고 힘이 쭈욱 빠져 기절하지 않듯이 마력이 탈진되고 모험이 불가능할 정도로 힘이 빠지는 일은 없었다.
“크흠, 놈들이 신성력에 반응하길래 달라붙어서 신성력을 흡수한다고 생각했어. 그렇다고 저 많은 걸 일일이 쳐서 날려 보낼 순 없으니 여파만으로 날려 보내려고 했는데….”
“놈들이 끈적끈적해서 독하게 달라붙은 줄 알았구나?”
“그리고 지반이 생각보다 약했어.”
다만 미사일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진흙 늪과 독액이 사방팔방으로 날아가고 지면이 움푹 패버렸을 뿐. 충격파를 이용해 날려 보내려 했을 뿐인데 덩굴들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애초에 곁가지로 육체 또한 강화했는데 몸이 부웅 떠서 하늘로 날아오를 줄이야.
흩날리는 진흙 사이로 부웅 날아오르는 내 모습이 퍽 재미있었는지 일행들의 얼굴에 공포나 두려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발목을 질척하게 만드는 진흙에 볼멘소리할 뿐.
힘 조절 미숙이 아닌 지반의 문제라고 둘러대자 고개를 끄덕거려주는 일행들을 보며 부끄러움을 참아내고 있으니 그레이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어느 한쪽을 바라보더니 나를 보며 배시시 웃는다.
“그래도 목적은 달성한 것 같은데? 저쪽이 조금 소란스럽고 인기척이 좀 느껴지네.”
“신성력보다 확실히 주변의 시선을 끈 것 같아요! 고립된 형제님들일까요?”
인기척이라는 이야기에 해맑게 웃으며 그레이스에게 달라붙어 이것저것 캐묻는 아이린을 보니 가슴 한구석이 따끔거리긴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35층에 고립되어 있을 미지의 생존자들.
마음이 급해진 아이린의 모습에 한세아가 그레이스의 안내에 따라 어스 컨트롤로 늪지를 가르는 길을 직선으로 만들어낸다.
[연락이 끊긴 35층은 기괴할 정도로 고요했다]
[모험가와 사제들은 물론이고 몬스터들 조차 보이지 않는 기묘한 상황]
[마나에는 반응을 하지 않지만, 신성력에는 반응해 흡수하려 드는 덩굴이라니…?]
내가 하늘로 붕 떠오르는 동안 퀘스트 창도 갱신이 되었는지 아낌없이 마나를 쭉쭉 사용하는 그녀. 자신의 마나가 조금 소모되어도 내가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인지, 아니면 조금 늦었다가 사람이 죽어서 퀘스트를 조지는 꼴이 보기 싫어서인지 모르겠네.
그 덕에 한세아에게 추가적인 별명을 붙이기 시작하는 시청자들.
-빛나는 활약에 이은 든든한 활약 ㄷㄷ
-이게 마법사야 토목공사 일꾼이야?
-조명에 이은 보도블럭공사… 지역 친화형 일꾼… 든든하다 갓세아!
-롤랑이 부수면 한세아가 만드는 재개발 콤비임? 뭔 용역도 아니고
-어이고 마나 쭉쭉 쓰는거 봐라 하긴 공격 마법 배워봐야 빠따질에 밀리니 이게 맞따
“뭐가 용역 콤비야! 퀘스트 갱신된 상태에서 빙 둘러가면 게거품 물고 왜, 왜 직선으로 안가냐고옥! 하면서 꼽 존나 줄 거면서!”
[경계석시공일등인부한세아 10,000원 기부!]
탑 공략 막히면 롤랑이랑 같이 영지 타이쿤이나 허쉴?
“너 같으면 하겠냐! 애초에 저런 동료를 데리고 막히면 니들은 게임 어떻게 깨려고?”
케이티도 한세아도 눈앞에서 벌어진 파괴 현상 때문인지 은근 흥분한 것 같네. 형제자매에 대한 걱정과 기대 때문에 달뜬 아이린과는 다른 의미로 안절부절못하는 두 사람 덕분에 파티에서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는 건 그레이스뿐.
그렇게 마나를 쭉쭉 사용하며 도착한 곳에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신전 기사가 한 명 있었다.
“혀, 형제님!”
“크으윽….”
정확히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신전 기사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상처를 입은 모험가들이.
신전 기사는 의식을 반쯤 잃은 채 바닥에 누워 있었고 모험가들은 지친 모습으로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 이상한 점은 그들이 있는 이 장소가 아주 넓은 공터라는 점. 여기가 안전지대였던 장소인 걸까?
“수, 수녀님! 신성력을 사용하면 안 됩니다!”
“물러섯!”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화들짝 놀란 모험가들이 우르르 달려와서 아이린의 손목을 붙잡아 만류하려다 케이티의 위협에 뒤로 물러나는 게 보인다. 악의를 가지고 아이린을 공격하려 한 게 아니라, 정말 공포를 느낀 것 같군.
그 모습에 짐작이 가는 게 있는지 곱게 손을 내리는 아이린. 대신 한세아가 인벤토리에서 비상용으로 챙겨둔 체력 포션을 꺼내 모험가에게 슬쩍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