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9화 (169/175)

 “으음, 저게 뭐야?”

 “윽, 징그러워…. 저게 35층에서 문제를 일으킨 건가?”

그런 그녀들도 넘어오자마자 미간을 찌푸린 채 나무를 휘감은 덩굴을 노려본다. 마비 늪과 독 웅덩이보단 우뚝 솟은 나무를 칭칭 휘감고 있는 덩굴이 더 눈에 띌 수밖에 없긴 하지. 그래도 한세아가 퀘스트 창을 켜지 않는 걸 보면 갱신은 아직인가.

 “일단 안전지대로 가 보자. 신전 기사가 말하기로는 우측으로 가면 된다고 했으니까… 이 웅덩이를 조금 돌아서 저 방향으로 가면 되겠네.”

 “그게 좋겠어요. 형제자매님들에게 안 좋은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르고, 반대로 단순히 통신만 먹통이 된 걸지도 모르니까요.”

마지막으로 넘어온 케이티까지 통로 앞에 모두 모였지만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생명을 감지한 촉수가 뱀처럼 달려들기라도 하려나- 따위의 생각을 했지만 정말 단순한 덩굴일 뿐인가.

그렇기에 덩굴을 노려보다 안전지대로 안내하려는 그레이스의 뒤에 모두가 군말 없이 따라붙는다.

안전지대와의 연락이 끊긴 35층은 34층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였다.

 “이 덩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지 않아?”

 “그러게요. 어째 안전지대로 향할수록 더욱 빽빽해지는 게… 징그럽고 불안하네요.”

 “흐음, 롤랑? 한나? 이거 한 번 베어볼까?”

조금씩 많아지는 잿빛 나무와 정체불명의 덩굴을 제외한다면.

걸으면 걸을수록 탁 트여 있던 시야가 예전의 울창했던 늪지대와 비슷한 수준으로 좁아지는 상황. 잿빛 나무가 독 웅덩이와 진흙 늪 따위에도 뿌리를 내리고 빽빽하게 자라 있으며, 그 나무줄기에는 여지없이 덩굴이 휘감겨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케이티가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허리춤에서 검을 빼 든다. 그래도 베기 전에 허락을 맡으려 하는 모습이 기특하긴 하네.

…그야 모험가로서 리더에게 허락을 받고 행동을 하는 건 당연하긴 하지. 그러나 채팅창 때문인지 잼민이 이미지가 너무 강하게 박혀버렸나. 상식적인 행동을 하며 모험가로서 성장한 모습을 보면 당연한 게 아니라 왜 이리 기특해 보일까.

 “한 번, 미리 살펴보는 것도 좋겠지. 표본도 채취할 겸 하나 베어버려.”

 “그러네, 마탑과 길드에 제출해야 하니까. 한나? 인벤토리에 표본 채취용 유리병 챙겨 왔지?”

날이 시퍼렇게 선 검을 든 채 촉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나서는 케이티의 질문에 한세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인벤토리에서 커다란 유리병을 꺼낸다. 생긴 것만 보면 굉장히 불길해 보여서 그런지 덩굴을 자르면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네.

그레이스도 아이린도 같은 생각인지 활에 화살을 메기고 양손을 모아 성법을 펼칠 준비를 하며 케이티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흐읍-!”

덩굴 하나를 슬쩍 찔러 볼 생각은 없었는지 번쩍 치켜세운 검이 공기를 매섭게 가르며 아래로 내리 찍힌다. 기사단에서 배운 검술 덕분인지 문외한인 내가 봐도 정석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깔끔한 내려 베기.

 “…으음?”

 “뭐야, 그냥 서걱 잘리네.”

그 날카로운 검격에 덩굴이 맥없이 석둑 잘려나간다. 불판 위의 잘 익은 고기를 자르는 것보다 손쉽게 잘려버린 덩굴을 보고 당황하는 일행들. 딱 봐도 수상해 보여 긴장을 잔뜩 하고 있다가 맥이 탁 풀려버린 모습이다.

안에서 독액이 콸콸 터지는 일도 없고, 살아 있는 뱀처럼 달려드는 일도 없었다. 그저 석둑 잘려 바닥에 툭 떨어지자마자 잿빛 나무처럼 바짝 말라버리는 덩굴.

 “이러면 표본을 채집하는 의미가 있나…?”

 “일단 마탑에 보낸다면, 마법사들이 알아서 써먹지 않을까.”

나무에 달라붙어 있을 땐 국밥에서 건져낸 도가니처럼 반투명하면서도 끈적하고 축축하던 놈이, 잘라내는 순간 육포나 황태처럼 바짝 말린 모양새가 되니 어처구니가 없네.

연금술용 장갑으로 보이는 걸 인벤토리에서 꺼내서 착용한 한세아가 유리병 안에 바싹 마른 덩굴 조각을 집어넣자 일행들이 나무를 툭툭 건드린 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공포 영화의 클리셰처럼 우리의 등 뒤에서 덩굴이 몰래 움직인다는 일 따위는 없었고.

그렇게 조용한 역병 지대를 걷기를 한참.

 “너무 조용하지 않아?”

 “어째서인지 몬스터가 하나도 보이질 않네.”

 “형제님들의 신성력 기둥도 보이질 않고, 삿된 언데드들도 보이지 않네요. 저 기분 나쁜 덩굴과 관련이 있을까요?”

-또 걷기 시뮬레이터야?

-산책시뮬레이션-역병지대.ver

-그걸 어떤 변태샛기가 하겠냐고 시발 ㅋㅋㅋ

-지금 한모씨가 돈받고 하는중이자너

-세아야 눈치챙겨 이런거 방송 끄고 알아서 진행해 오라고 했지 내가

정말로 한참을 걸었는데 보이는 게 없으니 일행들은 이상함을 느끼고, 시청자들은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풍경이 보기 좋은 숲도 아니고, 징그러운 회백색 촉수만 가득한 역병 늪지를 누가 재밌게 보겠는가.

거기에 더해 방향은 제대로 잡은 것 같은데 안전지대가 나타나질 않으니 고민을 하던 한세아가 입을 연다.

 “…생존자든 몬스터든 뭐라도 나오라고 소란을 좀 피워 볼까?”

 “뭐?”

한세아의 의견은 안전을 중시하는 모험가로서는 어처구니없다 못해 병신 같은 의견이었지만, 게임 방송인 스트리머로서는 참으로 합리적인 의견이었다. 아무리 현실성 넘치는 가상현실게임이라 해도 그 누가 2~3시간 내내 뚜벅뚜벅 걷는 방송을 보고 싶겠는가.

이걸 10년 차 베테랑 상급 모험가 롤랑으로서 모험가 한나에게 개소리하지 말라고 혼을 내야 하는지, 게이머 출신 빙의자 롤랑으로서 방송인 한세아에게 도움을 줘야 할지 고민을 하는 찰나의 순간.

 “…그게 좋겠어요. 혹시라도 이 주변에 위험에 빠진 형제자매님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럴지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이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그런 그녀의 손에 맺혀있는 새하얀 신성력 덩어리. 성법이라기보단 단순히 기운을 쏘아내는 방식인지 마치 폭죽처럼 신성력 덩어리가 허공을 향해 치솟아 오른다.

아이린이 언데드 앞에서 냉혹해지는 것도 그렇고, 안전지대의 신전 세력과 연락이 끊겨서 그런지 평소보다 훨씬 조급한 모양.

한세아가 의견을 제시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다른 일행들의 의견을 듣지도 않은 상태에서 멋대로 신성력을 갈겨버리다니. 조금 당황스러워하는 내 눈빛을 확인한 것인지 그제야 고개를 푸욱 숙이고 뺨을 붉히는 그녀.

 “아, 으… 죄송해요. 마음이 급해서….”

 “아냐, 괜찮아. 슬슬 안전지대가 보여야 하는데 안 보이면 그렇게 하는 게 맞지.”

-그거지! 이게 꼐임이지!

-아 ㅋㅋ 몬스터가 안나오면 풀링을 해야지

-우리 탱커 뭐하냐 사제가 몬스터를 도발하네여

-이게 다 퀘스트 진행 못한 한세아 때문이다 롤랑형님 음해하지 말아주세요

-아니 6★ 5★ 그렇게 쓸거면 시청자 나눔하라고 ㅋㅋㅋ

그렇다 해도 아이린에게 쓴소리를 할 사람은 없었다. 그레이스도 제 탐색 범위에 잡히는 게 아무것도 없는지 주변을 둘러볼 뿐이고, 케이티도 걷기만 하는 게 지루한지 좋은 생각이라며 허리춤의 검을 빼 든 상황.

한세아야 뭐, 화끈한 마망이라며 날뛰는 시청자들을 어르고 달래다 사이사이 섞여 있는 교묘한 악질 시청자들의 엉덩이를 걷어차 쫓아내느라 바쁘네.

그렇게 모두의 암묵적인 동의 속에서, 허공으로 예쁘게 치솟은 신성력이 마치 폭죽처럼 파앙- 터지며 사르르 흩어지자 곧바로 반응이 왔다.

 “롤랑?! 이 덩굴들, 덩굴이 아니라 촉수웃―!”

사람도 몬스터도 아닌, 칼에 썰려도 얌전히 있던 덩굴들에서.

칼로 썰어도, 지팡이로 툭툭 쳐도, 발로 퍽퍽 걷어차도 그저 나무에 휘감겨 있던 회백색의 덩굴들. 놈들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허공으로 치솟아 오른 아이린의 신성력이 형태를 잃고 주변으로 흩어진 순간이었다.

마치 전원이 끊긴 기계에 전력을 주입하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뱀처럼 달려드는 덩굴들.

 “여신이시어, 가호하소서!”

 “이 새끼들이!”

그렇다 해서 촉수에 당한 일행들이 있는 건 아니었다. 이미 검을 빼 들고 있던 케이티가 순식간에 덩굴들을 썰어버렸으며, 뒤이어 아이린이 양손에 모아둔 신성력으로 보호의 성법을 펼쳤으니까.

마치 야외에서 펼친 모기장처럼 늪지를 둥글게 덮어버린 새하얀 신성력의 결계. 문제가 있다면 이 덩굴들이 신성력에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점이려나.

 “…으윽, 징그러.”

 “내 화살로 불을 질러볼까? 아니다, 한나가 스파크 마법으로 불똥을 소환할 수 있지.”

 “죄, 죄송해요!”

야외에서 펼친 모기장에 더해, 안에 벌레 유인용 등불을 켜둔 상황처럼 되어버린 상황. 주변에 빽빽이 들어찬 잿빛 나무에 휘감겨 있던 모든 덩굴이 징그러울 정도로 아이린의 보호막에 달라붙은 것이다.

평범한 사제나 수녀였다면 그대로 갉아 먹혀 신성력이 고갈되어 덩굴 사이에 파묻히는 엔딩을 맞이했겠지만, 우리 파티는 다르다. 아이린의 특성은 무려 일정 수치 이하의 데미지 면역.

보기에는 징그럽다 해도 고작해야 나무에 휘감겨 있던 덩굴 따위가 5★ 보호 특화 예비 성녀의 보호막을 뚫을 순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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