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8화 (168/175)

폭발 트롤이 등장하고 몬스터들이 언데드로 변하는 등 31층부터의 모험이 확연하게 어려워진 만큼, 안전을 위해 발을 빼는 모험가들이 많은 모양이다. 하긴, 트롤이 없는 늪지에서 안전하게 사냥을 하던 중급 끝자락의 모험가들이 꽤 많을 테니까.

폭발이라는 명백한 약점이 있다 해도 난이도가 오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보니 신전이 나선다 해도 중급 모험가들이 발을 빼는 건 어쩔 수 없는 이야기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놈들에게 트롤 사냥을 강제할 순 없지.

 “네, 알겠어요!”

 “형제님들을 위해서라면….”

중급 모험가들은 발을 빼고, 소수의 상급 모험가들에게 35층의 조사를 맡겨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꽤 바빠 보이는 엘리스. 그녀의 부탁에 한세아와 아이린이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받아들인다.

엄밀히 따지자면 나를 제외한 우리 파티의 전력도 중급 끝자락이라 봐야 하겠지만, 여신의 사명을 받고 정체불명의 성녀에게 격려까지 받은 상황에서 뒤로 뺄 순 없잖아.

좋게 말하자면 사명감, 조금 속되게 말하자면 종교적 뽕 맛에 잔뜩 취한 일행들 또한 의견을 나누지 않고 곧바로 수락해버리는 두 사람의 모습에 딱히 별다른 반대 의견을 던지지 않는다. 여신의 환영과 성녀의 목소리라니, 중세 판타지의 주민 중 누가 저 무시무시한 콤보를 거역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일행들이 35층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중간 보스 포인트 도박 열어주면 안댐?

-아니 그래서 트롤 폭탄 언제 만드냐고오오오오오

-일단 존나 크고 역겨운 게 나올 것 같은디

-딱 봐도 중간 보스 각이쥬?

-연금술 길드는 웨안가는데

 “아이 씨, 이 상황에 어떻게 연금술 스킬 좀 찍겠다고 반나절만 쉬겠다고 말하겠냐고. 마망한테 볼기짝 맞는다?”

수상할 정도로 트롤 폭탄에 집착하는 시청자들과 함께.

게이트를 통해 30층으로 진입한 뒤, 보스전 이벤트가 끝나 자이언트 웜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되돌아온 장님뱀 따위를 전부 무시한 채 빠르게 진입한 31층.

이변은 35층에서만 일어났다는 듯 31층에는 별다른 일은 없었다. 보라색 독 웅덩이는 여전히 보글보글 끓어오르고 있었고, 마비 진흙이 가득한 늪지대에서는 진흙 목욕을 하는 하마처럼 언데드 들이 느긋하게 몸을 담그고 있었으니까.

 “31층에도 트롤이 나오긴 하네. 화살로 처리할까? …그런데 지금 터트려버리면 독이 다 튈 것 같은데.”

 “허우적거리는 꼴을 보니 굳이 상대할 필요는 없겠다. 아무래도 늪이 생각보다 깊어서 빠져나오질 못하나 봐.”

우리를 발견하고 직선으로 늪지를 헤치며 다가오다가 진흙 늪 아래로 가라앉아버린 트롤을 지나쳐 랜턴에 기록된 32층의 통로로 향하는 동안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도 않았고, 한세아의 퀘스트 창이 갱신되지도 않았다.

 “일단 메인 퀘스트는 35층에서 시작되려나? 퀘스트 창은 아직 변한 게 없네. 그나저나 갑자기 뭐가 휙휙 바뀌니까 좀 어지럽긴 하다. 생각 없이 보스 몬스터 대가리 뚝딱스 할 때가 편했는데.”

[갑작스럽게 연락이 끊긴 35층의 안전지대]

[35층으로 향한 모험가들도, 마탑의 마도구 관리인도 연락이 닿지 않는다]

[신전 기사들의 지원으로 인해 성역이 펼쳐진 곳인데, 대체 누가…?]

-그야 롤랑 옆구리에 끼워진 워킹인벤토리니까 편했겠쥬

-어허 우리 세아 응애하지 마세요 동굴에서의 빛나는 활약을 잊으셨읍니까

-ㄹㅇㅋㅋ 30층 보스 공략법 : 로봇 어깨위에 서서 조명들고 있기

-그래서 폭탄도 없는 니가 뭘 할 수 있는데?

-석현이가 뿔늑대한테 철판펼친것처럼 트롤폭탄 인벤토리에 가득채워서 자폭병이나 하지

길드에서 엘리스의 말을 듣고 시작된 메인 시나리오 창을 띄워 보인 한세아. 생각해보니 31층에 도착하면서 참 여러 이벤트가 한꺼번에 몰아닥친 기분이다.

일단 늪지대라는 필드 자체가 역병 지대로 변했고, 몬스터들도 그에 맞춰 언데드로 변했다. 40층에 있어야 할 네임드 몬스터가 31층부터 출현하기 시작했고 신전 세력이 탑 공략을 선언했으며 35층에서는 중간 보스로 생각되는 놈이 튀어나온 상황.

거기에 한세아 처지에서 생각해보면 거기에 더해 아이린과 롤랑의 캐릭터 퀘스트가 동시에 진행된다고 생각할 테니 확실히 많긴 많네.

그렇게 느릿한 몬스터들을 최대한 무시하며 도착한 33층의 안전지대. 아무리 몬스터를 무시하고 나아간다 해도 모든 몬스터를 완벽히 따돌릴 순 없는지라 슬슬 휴식을 취해야 할 시간이었다.

 “안녕하세요, 형제님들. 혹시 35층과 연락이 닿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아직 연락이 닿지 않고 있습니다, 자매님. 35층의 상황을 확인하러 가시는 길입니까?”

사건이 터진 건 오직 35층뿐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안전지대 앞에 떡하니 서서 주변을 둘러보는 신전 기사들. 그들에게도 35층의 이야기가 전해졌는지 목소리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절절히 묻어난다.

당장이라도 형제자매들을 구하러 올라가고 싶지만, 성역을 지키는 일 또한 중요하기에 움직일 수 없는 처지. 그래서 그런지 아이린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더니 우리 일행들을 향해서도 강렬하고도 간절한 시선을 보내온다.

 “험난한 여정을 생각한다면 휴식 또한 전투만큼 중요하겠죠. 푹 쉬시고 곤경에 처해 있을 형제자매님에게 도움의 손길을 부탁드립니다. 아, 안전지대는 35층의 통로를 기준으로 우측으로 쭉 가면 나올 겁니다.”

 “네에. 당연한 일인걸요, 형제님.”

그렇게 입장하게 된 안전지대 내부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몇몇 모험가들이 텐트 몇 개를 차지하고 편히 앉아 무기를 손질하고 있을 뿐. 실수로 부식 독에 얻어맞았는지 자글자글 일어난 갑옷 표면을 잔뜩 찡그린 채 문지르거나, 창대와 검날 따위를 삭삭 닦아내는 모습이 퍽 익숙하게 느껴진다.

33층에서 저렇게 장비가 상한 걸 보니 상급 모험가는 아닌가 보네. 딱히 서로에게 간섭할 이유는 없으니 우리도 적당히 빈 텐트 몇 개를 차지한 뒤 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가 언데드를 붙잡아 주고 있는 데다가, 아이린의 보호의 성법까지 더해지니 우리 파티의 방어구는 부식되거나 상한 곳은 없는 상황. 그래도 흙길을 오랫동안 걸어왔으니 부츠와 각반 따위가 더럽혀지는 건 막을 방법이 없었다.

 “지형이 오염되어서 그런지 마른 흙도 좀 기분이 나쁘네.”

 “그래도 한나가 어스 컨트롤을 쓸 줄 알아서 다행이야. 아니었으면 흙을 털어내는 게 아니라 발목까지 적신 독액을 씻어내고 정화해야 했을걸.”

그렇게 텐트 앞에 털썩 주저앉아 장비를 손질하기 시작한 일행들. 나야 신성력으로 갑옷을 코팅하고 돌아다닌지라 부츠에 흙이 조금 묻은 게 전부지만 우리 일행들은 그게 불가능하니까 종아리 아래가 더러워질 수밖에.

전투를 피할 수 없을 때마다 흙을 끄집어 올려 평평한 땅을 만든다 해도 독액이 질척한 채 기어 올라온 언데드를 상대한다면 흙바닥이 독액과 뒤섞여 진흙탕이 되는 건 당연한 이야기.

좁았지만 바닥은 메말라 있던 동굴과 다른 환경인지라 다들 부츠를 벗고 한세아의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든다. 미약한 독성을 띠고 있는 진흙이라 워터 마법으로 씻어 낼 생각인가.

-엄마난커서발닦개가될래요

-근데 가죽 장화를 물로 씻어도 되던가?

-아니 마법 장비인데 방수 기능은 있겠지 ㅋㅋ

-포브스 선정 발 페티쉬를 이해할 수 있는 참고 자료 1위

-무슨 시장에서 산 오천원짜리 운동화도 아니고 연금술로 만든 가죽 부츠인데;;

…참 한결같은 놈들이야.

33층의 안전지대에서 하루를 머문 뒤, 아침 일찍 일어나 다시 길을 나섰다. 탑 내부인 만큼 해가 떠오르는 건 볼 수 없었지만, 사제와 수녀들의 아침 기도와 한세아의 접속 시간 등으로 칼같이 시간을 지킬 수 있었거든.

33층에서 34층으로, 그리고 다시 34층에서 35층의 통로 앞으로.

 “한나의 마법 덕분에 생각보다 빨리 왔네.”

 “그러게. 마력 쐐기라니, 언제 봐도 신기한 것 같아.”

지난번 랜턴에 기록한 직후 되돌아갔던 그 장소에 서게 된 그레이스가 작게 중얼거리자 케이티가 맞장구를 친다. 새로운 지역을 탐색하는 게 아니라 이미 왔던 장소로 돌아오는 건 미니맵을 사용할 수 있었기에 이틀도 채 걸리지 않았으니까.

이대로 놔뒀다가는 또다시 천재 마법사 한나에 대한 칭송이 시작될 걸 예감한 걸까, 한세아가 황급히 내 쪽으로 다가와 내 팔뚝을 잡아 이끌며 통로 쪽으로 슬슬 밀어낸다.

고작해야 중위급 마법사의 악력 따위에 밀릴 내가 아니지만, 지금은 못 이기는 척 앞으로 나서 줘야 하긴 하겠네. 한세아가 놀림 받는 모습을 보는 건 꽤 재밌지만, 엉뚱하게 작동한 내 시스템 창과 한세아의 메인 시나리오가 궁금한 마음이 더 크다.

 “이번에도 내가 먼저 진입할게. 하지만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르니 곧바로 뒤따라 오지 마. 지난번 트롤처럼 입구 쪽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으니… 5분 텀을 두고 따라왔으면 해.”

 “음, 그렇게 하는 게 좋겠어. 그러면 그 이후에는 보호의 성법을 펼칠 수 있는 아이린 언니가 넘어가고, 그레이스 언니, 나, 마지막에 케이티가 넘어가자. 혹시 이쪽에서도 무슨 일이 벌어지면 케이티는 혼자서도 대응할 수 있을 테니까. 괜찮지, 케이티?”

 “당연하지.”

주먹으로 흉갑을 퉁퉁 두드리는 케이티를 보며 앞으로 한 걸음 나서 통로로 향했다. 크게 걱정은 되지 않는 이유는 자연스럽게 내 머리 위에 달라붙은 한세아의 카메라 때문이겠지. 말이야 5분이라 했지만, 카메라로 엿볼 수 있는 한세아라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일행들의 35층 진입을 조절할 수 있으니까.

특정 위치에 보내 맵핵처럼 사용하는 방식이 아닌, 특정 인물의 머리 위에 붙여 놓는 방식이다 보니 동굴 같은 미로 지형에서 써먹을 순 없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다음 층을 엿볼 수 있으니 일장일단이 있다고 봐야겠지.

마지막으로 일행들을 뒤돌아보며 확인한 뒤, 방패를 가슴까지 들어 올린 채 그대로 통로에 진입했다.

 ‘……뭐지, 이건?’

누군가 강제로 눈을 깜빡거리게 하는 것처럼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시야가 어둑해졌다가 밝아진다. 눈 앞에 펼쳐진 건 역시나 오염되어 있는 늪지대. 보라색 독 웅덩이와 잿빛 나무들이 가득한 모습에 긴장이 탁 풀릴 뻔했다.

그 잿빛 나무를 휘감고 있는 기괴한 덩굴이 아니었다면.

늪지대가 오염되며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숲의 나무처럼 비쩍 메마르고 뒤틀린 잿빛 나무들. 그런 나무를 휘감고 있는 덩굴은 식물이라기보다는 마치 동물의 힘줄이나 근육처럼 보였다. 반투명한 회백색에 매끈 축축해 보이는 게 되게 기분 나쁘네.

 “으엑, 저게 뭐야? 나 저거 지난번에 했던 좀비 게임에서 본 거 같은데. 저 줄기를 따라가면 커다란 살덩어리가 있고 걔가 막 좀비를 조종하는 거지.”

-눈나마망이 촉수랑 싸우면 너무 감사합니다 비비게임즈

-솔직히 말해서 도가니탕 끓여도 될 것처럼 생겼음

-그래도 트롤의 누런 고름덩어리보단 괜찮지 않냐

-진짜루 저 덩굴 쫒아가면 살덩어리 괴물이나 언데드 둥지 있을 듯

-그래서 오늘 반찬은 촉수물인가

나무를 휘감고 있는 정체불명의 덩굴을 제외하고는 통로 주변은 멀쩡했다. 통로 앞의 마비 진흙 늪에 파묻혀 있는 언데드 몬스터도 없고, 탁 트인 시야 너머로 나를 발견하고 다가오는 놈들도 없었으니까.

그 덕에 5분이라는 시간 동안 정체불명의 덩굴을 구경하고 있으니 통로로부터 일행들이 하나씩 넘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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