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7화 (167/175)

그렇게 도착한 곳은 신전 기사들의 갑옷처럼 새하얀 기둥이 세워져 있는 장소였다. 바깥의 공개된 장소가 성당을 모티브로 삼았다면, 이 장소는 마치 그리스의 신전 따위를 모티브로 삼은 것 같은 장소였다.

그래도 아이린은 예비 성녀답게 이곳에 와 본 적이 있는지 주변을 둘러보며 묘한 감탄성을 내뱉는다.

새하얀 기둥이 잔뜩 세워진 넓은 홀. 그리고 기둥 사이사이에 자리를 잡고 조각상처럼 서 있는 신전 기사들. 일행들에게 정중하게 손을 뻗어 멈춰 세운 여기사가 나를 홀 중앙으로 정중하게 인도한다.

 “롤랑, 롬바르도의 롤랑 경. 여신의 부름을 받아 신성력을 개화하여 어둡고 험난한 길을 개척하시는 분.”

 ‘롬바르도가 어딘데.’

그렇게 홀 중앙에 서자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온다. 내 앞이 아니라 마치 허공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는 사람이 말하는 게 아니라 스피커를 통해 방송하듯 마법이나 성법 따위로 목소리를 전하는 것 같았다.

문제가 있다면 허공에서 울리는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 당연한 이야기지만 내가 롤랑의 몸으로 떨어진 건 성인의 육체인 상태였으니 나의 출신이나 고향 따위는 알 리 없다는 거다.

…그리고 롤랑의 캐릭터 설정은 읽지도 않고 커뮤니티에 장문의 글을 작성한 뒤 매크로를 통해 도배하다가 이 세상에 떨어졌으니까 배경 설정도 몰라.

10년을 이 세상에서 살았는데 모르는 동네가 튀어나오는 걸 보면 북부 대공 때와 같이 업데이트된 설정인 모양이다. 한세아가 시청자들에게 말하는 걸 필터 없이 들을 수 있는 대가로 NPC들이라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패치 노트는 내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걸까.

 “…….”

모르는 이야기를 꺼내니 대꾸를 할 수도 없어 말없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럴 땐 몰라도 분위기만 묵묵히 맞춰주면 절반은 가겠지.

 “현실에 안주한다면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을 겁니다. 어둠으로부터 등을 돌린다면 안락하고 평온한 삶을 살 수 있을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불경한 탑의 높디높은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으니, 그 누가 당신의 노고를 부정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 아이린 자매님?”

 “네, 녜엣!”

퀘스트 깨야 하니까 그렇지- 따위의 생각을 하며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자 갑자기 옆으로 튀어버린 불똥.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아는지 화들짝 놀라서는 벌벌 떠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안쓰러울 지경이다.

그렇게 곁눈질을 해서 바들바들 떨며 홀 중앙으로 다가오는 아이린을 바라보는 것도 잠시.

[출처를 알 수 없는 차원의 파편을 확인했습니다]

[이름 모를 신의 축복이 육체에 깃듭니다]

 “……?”

지난번과는 달리 환상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내게 확인하겠냐는 시스템 메시지가 떠 오른 것도 아닌데 확인을 했다는 시스템 창이 떠오른다.

아니, 내가 대체 뭘 확인했냐고.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시스템 창. 이를 통해 내 목 위의 투구 걸이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몇 가지 없다.

첫 번째는 나의 출신이 아주 중요한 떡밥일지 모른다는 것. 롬바르도의 롤랑 경이라 부르는 걸 보니 롬바르도가 어디 시골구석에 처박힌 화전민 마을 따위는 아니겠지. 전생에서도 정선의 아들이니 뭐니 부르는 일은 있었어도 읍면리 수준으로 내려가서 부르는 건 없었잖아.

두 번째는 지금 신전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의 주인공. 신전 기사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으며 신전의 비밀 구역에 손님을 불러올 수 있는 직위라면 꽤 높으신 분이 아닐까. 그리고 그런 높으신 분이 나에 대해 알고 있다는 듯 말하고 있고. 

물론, 그 이상으로 내 머리가 굴러가는 일은 없었다. 몸이 연약하면 머리가 고생한다는 말처럼 추리하거나 머리를 쓰는 일 없이 육체와 마나의 힘으로 온갖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가는 것에 익숙해졌으니까.

 “아이린 언니, 뭐에요, 아니, 누구예요?”

 “예, 으, 네? 뭐가요?”

내가 굴러가지도 않는 머리로 끙끙 앓고 있을 때, 일행들의 시선은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아이린에게 향했다. 축복을 받고, 신전의 지원을 약속받고, 신전 기사들의 박수 세례와 부담스러운 눈빛 속에서 신전을 빠져나오자마자 아이린의 양팔을 연행하듯 휘감는 한세아와 그레이스.

올라간 난이도에 맞춰 신전의 치료비가 공짜가 된다든가, 신전 기사들이 늪지대의 이변을 해결한다면 41층 고원으로 진출하여 모험가들의 탑 공략을 돕기 위해 합류한다는 등의 변화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채팅창이 아이린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으로 가득 찬다.

그야 그럴게, 누가 봐도 아이린은 허공에서 들려온 아름다운 목소리를 알고 있다는 듯 행동했으니까. 허공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와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인 일행들과 달리 어째서 이 목소리가 지금 여기서 들리는지 모르겠다는 반응.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잖아요, 언니. 부르니까 황송해서 혀도 막 씹던데.”

 “아, 아니, 아닌데요?”

 “수녀라서 그런가, 거짓말은 진짜 못하는구나….”

-그걸 한씨가 말해도 되는 건가?

-근데 누가 봐도 수상해서 미칠 것 같긴 하더라

-형이 왜 거기서나와를 몸으로 표현했다면 100점 만점에 110점

-대답할때 혀씹는거 넘모 귀여워서 벌써 클립퍼짐

-반응 보면 거의 사단장한테 불린 일병수듄이더라

대답할 땐 혀를 씹지 않나, 홀 중앙으로 걸어 나갈 땐 다리를 바들바들 떨어 신전 기사 중 하나가 부축을 하려다 말았다. 지원을 약속받을 땐 어느 한 방향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기까지.

 “그, 그게에… 길드 같은 곳에는 이야기하면 안 되는데.”

 “에이, 언니! 우리가 이걸 뭐 하러 길드에 보고하겠어요. 괜히 질투하고 귀찮게 구는 사람만 늘어날 텐데.”

자기가 생각해도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여신의 사명을 부여받은 동료 의식 때문인지 머뭇거리던 아이린이 결국 양옆에 달라붙은 한세아와 그레이스를 떨쳐내지 못한 채 입을 연다.

 “그, 그분은…… 성녀님이세요. 늘 수도에 계신 분인데 목소리가 들려서 깜짝 놀란 거고.”

판타지 세상이 있고 여신이 있으며 신전 세력이 있다면 빠질 수 없는 그 이름, 성녀.

그래서 그런지 아이린의 입에서 성녀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시청자들과 한세아는 물론이고 그레이스와 케이티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야 신전 출신의 수녀가 고개를 꾸벅 숙여 절을 할 정도면 어지간히 높으신 분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을 테니까.

 “신전에서는 여신님의 계시를 직접 받아 행하시는 분들을 성인, 성녀라고 불러요.”

그렇게 조곤조곤한 특유의 말투로 이어진 아이린의 설명. 성녀와 성인에 대해 말문을 연 그녀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성녀와 성자는 꽤 많은데, 조금 전 목소리는 성인 중 가장 고명한 성녀의 목소리라고.

가장 유명한 성녀가, 예비 성녀에게 기대를 거는 상황인 것이다.

 ‘나는 곁가지고, 아이린 캐릭터 퀘스트는 성녀 승급 퀘스트인가보네.’

말린 곡물을 구매하기 위해 식료품점으로 향하는 길에서 듣게 된 그녀의 이야기. 여신의 계시를 받은 수녀가 성녀가 되는 것이라는 설명을 들은 일행들의 뺨이 발갛게 물든다. 단순히 탑을 오르라는 사명을 부여받은 게 아닌, 성녀 탄생의 여정을 함께한다는 고양감 때문에.

특히 케이티는 이야기 속 주인공 일행이 된 기분이라도 드는지 뺨이 발갛게 달아오르다 못해 어깨가 들썩이고 발걸음도 슬쩍 빨라지는 게 보인다.

 “아이린 언니가 예비 성녀여서 이런 시나리오가 뜬 건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도 사제 수녀 캐릭터랑 스토리 밀면 이렇게 되나 궁금하긴 하네. 아무튼, 탑이 고난이도가 된 만큼 신전 세력도 붙고 플레이어 쪽 세력도 이것저것 강해지나 봐.”

-그러면 롤랑은 머임?

-마왕 잡으라고 나뭇가지 하나 쥐어주는 건 좀 옛날 이야기긴 하지

-신전에서 성녀 밀어주고 머시기 하면 플레이어가 나중에 용사됨?

-마망성녀 아이린 헤으응

-콤퓨타 게임에서도 연합이니 머니 나와서 플레이어 밀어주자늠

그렇게 잔뜩 들뜬 케이티가 잡화점에서 검 손질용 기름과 천을 구매하는 것조차 깜빡하고 아이린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동안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한세아와 시청자들. 다행인 점은 아이린에게 어그로가 끌려 내게 던져진 질문이 쉽사리 무시당했다는 점이려나.

 “아무튼, 이 망할 늪지대를 밀어버리면 뭐라도 결과가 나오겠지, 뭐. 근데 설마 신전 쪽 NPC가 보스 막타 치는 일은 없겠지? 30층은 메카 덕분에 편하긴 했는데, 20층에서는 레베카한테 막타 털릴까 봐 좀 많이 쫄렸거든.”

곱게 빻은 곡물가루와 말린 고기 등을 사서 인벤토리에 가득 채우고, 그레이스의 화살통에 값비싼 연금 화살촉을 채워 넣은 뒤 무구 손질용 기름과 천 조각 따위를 구매하는 동안 일행들의 입은 다물어질 생각이 없어 보인다.

 “살 건 전부 산 것 같은데, …길드에 가서 의뢰를 확인해야겠네.”

 “아, 그러네. 신전 기사가 찾아와서 의뢰를 확인 못 했구나. 애초에 어제 정산하지 않은 마석과 채집물도 정리하고 가야 해.”

아이린에게 매달린 케이티와 웃으며 거드는 그레이스. 대화의 흐름이 갑자기 꺾여 판타지 클리셰에 대해 떠들기 시작한 한세아. 그렇게 웃고 떠들며 길드로 향하자 또다시 예상하지 못한 소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롤랑! 아직 탑에 들어가지 않았구나, 다행이네!”

 “무슨 일이야, 엘리스?”

길드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점심 무렵임에도 불구하고 바글바글한 모험가들과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길드의 직원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짜증이 잔뜩 난 표정으로 서류 더미를 품에 안고 있는 엘리스였다.

길드의 실세이자 사무원들의 맏언니인 엘리스의 평소 업무는 인맥 관리와 간식 섭취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 그녀가 직접 허드렛일까지 하고 있다니?

생글생글 웃던 일행들도 그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입을 꾸욱 다물었다. 모험가 길드에서 이렇게 난리가 날 일이라면 탑에서 이변이 벌어졌다는 뜻이고, 높은 확률로 모험가들이 우수수 죽어 나갔을 테니까.

 “35층의 안전지대와 연락이 끊겼어. 35층에 간 모험가는 물론이고, 통신용 마도구를 관리하는 마탑의 마법사도, 성역을 펼치고 있던 신전 기사들과의 연락도 싸그리.”

 “…36층 이상에서는 연락 온 게 없고?”

 “34층과 36층은 연락이 정상적으로 되고 있어. 연락이 끊긴 건 오직 35층뿐이야. 그래서 인접한 층에서 35층으로 모험가를 보내야 할지, 기다렸다가 대규모로 탐색대를 보내야 할지 이야기가 나오는 중이고.”

역시나, 엘리스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퍽 부정적이었다. 평범한 안전지대도 아니고 신전 기사와 사제와 수녀가 모여 만든 성역이 연락 두절이라니. 그리고 하필 34층도 36층도 아닌 35층?

10층 단위로 보스가 나오는데, 5층 단위로 이벤트가 터진다면 마치 중간 보스가 등장한 것 같지 않은가.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엘리스가 상황을 이어서 설명해준다.

 “물론 다른 모험가들도 35층을 확인하러 가겠지만, 반대로 35층을 위험하게 여겨 발을 빼는 모험가들도 꽤 있을 것 같아서 그런데… 오늘 탑에 들어갈 거라면 35층의 조사를 부탁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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