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6화 (166/175)

-보고만 있어도 질리는데 얘는 어케 저 더러운 곳에서 게임을 계속 하냐

 “그래도 35층까지 왔으니까 슬슬 탑 바깥에서 쉬고 와야겠다. 나 진짜 게임이 아니라 노동을 하는 기분이야. 그나마 트롤은 멀리서 화살로 잡거나 스파크로 지져서 쉽게 처리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진즉 때려치우고 휴방했을지도 몰라.”

당연한 이야기지만 장기간의 모험은 한계를 불러오기 시작한다. 일행들의 정신적 피로뿐만 아니라 한세아의 인벤토리와 방송 사정과 시청자들의 지루함까지.

식량이 들어 있던 인벤토리는 슬슬 마석과 부산물, 채집물로 가득 차기 시작하고 시청자들의 채팅에는 슬슬 ‘트롤 폭발 원툴’ 따위의 내용이 올라오는 상황. 좀비 악어도 리자드맨 스켈레톤도 딱히 볼 맛이 나는 건 아니니까.

차라리 탑승형 골렘처럼 전투가 묵직하고 볼 맛이 나는 거면 몰라, 징그럽고 느릿한 주제에 튼튼하기만 해서 오래 때리는 게 전부인 전투를 즐겁게 지켜볼 사람은 없을 수밖에.

 “음, 35층의 통로 입구를 기록했으니 슬슬 내려가야 할 것 같아. 인벤토리 안에 넣어 둔 식량이 다 떨어져 가거든.”

 “어머, 그런가요…? 그렇다면 정비를 위해 탑 바깥으로 나가야겠네요.”

통로 앞에서 한세아와 아이린의 눈치를 보던 일행들. 먼저 입을 연 한세아에게 고개를 끄덕여주는 아이린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평소 생긋생긋 웃던 아이린인지라 언데드를 보고 분노한 모습에 은근히 겁을 먹었으니 이제 좀 숨통이 트인다는 듯 구는 그레이스와 케이티.

특히 케이티는 실제로 일행 중 나이가 가장 어려서 그런지 공녀의 지위고 나발이고 아이린의 눈치를 보느라 딱딱하게 굳어 있었으니 나가자는 말에 안색이 밝아지는 게 보인다.

 “그러면, 35층은 올라가지 않고 다시 돌아가는 거지? 나도 슬슬 검을 손질하고 싶었는데 잘됐네. 기름 먹인 천이 거의 다 떨어졌거든.”

 “나도 연금 화살촉을 거의 다 썼어. 트롤을 상대할 걸 생각해보면 다른 잡다한 화살촉은 빼고 화염과 폭발 계열만 잔뜩 챙겨와야 할 것 같네.”

공기 중에는 독기와 시취가 가득하고 길은 비좁으며 상대해야 할 몬스터는 역겨운 언데드. 아무리 여신의 계시 때문에 사명감을 불태운다 해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 그나마 안전지대가 신성력으로 가득한 성역이라 참을 수 있던 게 아닐까.

솔직히 말해서, 신성력과 가챠 버프 때문에 깨끗한 거지 슬슬 과거의 레베카처럼 머리가 엉겨 붙고 피부가 지저분해지며 사람과 짐승의 경계선에 들어갔어야 할 기간이긴 했다. 안전지대에 정화가 끝난 샘물이 없었다면 모두 그런 꼴이 되었겠지.

부족한 물자와 식량 덕에 몬스터와의 전투도 최대한 회피하며 빠르게 30층을 향해 이동하는 일행들의 발걸음이 가볍다 못해 경쾌하다. 시야가 탁 트여 있는 데다 언데드 특유의 느린 속도 덕분에 전투를 회피하는 것 자체는 동굴 지형보다 훨씬 편하네.

 “다들, 내일 아침 길드에서.”

 “알겠어. 오래간만에 뜨거운 물로 푹 씻고 자야지….”

 “하으으… 오늘은 바로 씻고 싶어. 내일 길드에 들린 다음 탑으로 가기 전에 시장을 방문하는 게 좋겠어. 내 화살촉도 그렇고, 한나 인벤토리에 식량도 채워야 하니까.”

그렇게 30층의 게이트를 통해 밖으로 나오자 시취 섞인 공기나 동굴의 퀴퀴한 공기 대신 코끝을 찌르는 구수한 빵 굽는 향기. 그 달콤한 향기에도 일행들은 기지개를 켜며 숙소로 돌아갈 생각밖에 없어 보인다.

다음 날, 길드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게 무엇인지 짐작도 못 한 채.

장기간의 모험으로 인해 피로가 가득 쌓인 일행들. 신성력이 가득한 성역에서 불침번도 서지 않고 편안하게 잠을 잤다고 해도, 처음으로 10일을 넘긴 모험은 알게 모르게 육체를 좀먹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전투의 뒤풀이고 뭐고 탑에서 나오자마자 흐느적거리며 각자의 숙소로 흩어진다. 그 늘어진 모습에 한세아가 몰래 카메라를 붙이지도 않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그렇게 각자 숙소로 흩어져 뜨거운 물로 진득하게 씻었는지 다들 뽀송뽀송한 얼굴로 맞이한 다음 날 아침. 길드의 테이블에 모여 35층과 관련된 의뢰를 찾아볼 생각을 하고 있으니 모험가 길드의 문이 벌컥 열린다.

 “모험가 롤랑, 모험가 롤랑 경 계십니까?!”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은 새하얀 갑옷 차림의 신전 기사. 투구를 눌러 써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갑옷으로 무장한 건 마찬가지지만 이번에는 투구 밑에서 듣기 좋은 미성이 울려 퍼진다.

보기 힘든 신전 기사, 그것도 아름다운 여성의 목소리를 내는 신전 기사의 등장에 모두의 시선이 입구를 향해 쏠린다. 그 직후 다시 내게 날아오는 몇몇 시선.

아무래도 늪지대의 이변 때문에 내려온 상황인지 내 이름과 얼굴을 알고 있는 상급, 최상급 모험가들의 시선이 따갑게 날아든다. 대체 뭘 하고 지내면 신전 기사가 너를 찾아다니냐고 물어보는 듯이.

 “제가 롤랑입니다만…?”

 “오오, 롤랑 경! 듣던 대로 훤칠하신 분이로군요.”

다짜고짜 사람을 찾는 신전 기사지만 상대가 누군지 몰라 조심스럽게 입을 여니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녀. 중세 판타지 세상에서 신전과 척을 지어서 좋을 게 하나 없다는 걸 알기에 조심스럽게 대하려 들었지만, 들뜬 목소리에선 적개심과 분노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거, 아무래도―

 “그, 신성력을 사용한다고 들었습니다.”

신성력 때문이겠지.

평생을 여신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보니 마치 생일 선물 앞에서 들뜬 것처럼 보이는 신전 기사. 절그럭거리는 새하얀 건틀릿이 내 손목을 거리낌 없이 덥석 쥐어 잡는 게 조금 당혹스러울 지경이다.

신전 소속이 아닌, 평민 모험가가 신성력을 사용한다 해서 배척하거나 아니꼬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게 아닌가? 따위의 생각을 했는데 너무 판타지 소설에 절여진 현대인의 감상이었나.

적대심 따위 하나 느껴지지 않는 순수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붙잡힌 양손으로 신성력을 응집시켰다.

 “오, 오오! 정말 순수한 기운입니다!”

-대체 상황이 어케 흘러가는건데

-35층 중간 이벤트 기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신전 이벤트임?

-신전 기사 눈나 목소리 뭐야…

-오늘 장보고 연금술 길드가서 트롤 폭탄 만든다며 ㅋㅋ

-그래서 폭탄주머니는 어디로 가고 주접 떠는 아가씨만 있음

[트롤여드름척탄병한세아님 10,000원 기부!]

실수인 척 신전 기사 투구 벗기면 십만원

 “어허, 어련히 스토리 진행되면 알아서 벗겠지. 괜히 지금 투구 벗기려고 슬쩍 다가가 봐야 팔뚝 꺾여서 지하철 치한처럼 개같이 제압당하는 미래가 훤히 보이는구만.”

[한세아의백합파티님 5,000원 기부!]

여기사 눈나가 알아서… 벗어…? 넘모 야해…

마치 한정판 피규어를 바라보는 오타쿠가 되어 내 주먹을 살살 쓰다듬는 신전 기사와 그걸 카메라로 찍으며 시청자들과 어지러운 내용의 대화를 나누는 한세아까지. 10년의 세월 간 산전수전을 다 겪은 베테랑 전사로서도 쉽게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테이블에 앉아 있던 일행들 또한 이게 뭔 일인가 싶어 아이린에게 시선을 던지지. 물론 일행 중 유일하게 신전과 연이 닿아 있는 아이린도 신전 기사단의 내부 소식까지 아는 건 아닌지 똑같이 혼란스러워하는 모양새.

이대로 놔두다가는 하루 종일도 할 수 있다며 계속 내 신성력을 감상할 것 같아 기운을 흩어버리고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저를 왜 찾아오셨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오염된 늪지대에 관한 의뢰라도 하실 생각이신지.”

 “아, 아아- 그렇군요! 너무 들떠 말씀드리는 걸 잊어버렸습니다.”

손을 강화하던 신성력이 사라지고 나서야 투구 쓴 얼굴을 들어 올리는 신전 기사. 신전 기사는 다들 엄격하고 딱딱하며 규율에 맹목적이라 생각했는데, 눈앞의 여성은 너무나도 자유로운 거 아닌가 싶다.

내 당혹스러운 시선에 그제야 팔뚝을 잡은 손을 놓더니 흠흠, 주먹 쥔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목소리를 고른다.

 “흠흠, 아이린 자매님의 고행길에 어울려주시는 롤랑 경. 여신님의 이름으로 신전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물론, 일행분들과 함께 오시는 것 또한 가능하죠.”

그러더니 어깨를 쭉 펴고 아가씨를 에스코트하듯 팔을 내미는 그녀. 그나저나 얘들은 일단 대접을 해 주려고 마음먹으면 무조건 경이라고 부르며 기사 취급을 해 주는 건가.

무협지에서 대협, 대협 거리는 거랑 비슷한가?

그렇게 문득 떠오른 엉뚱한 생각을 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30층의 퀘스트 보상으로 얻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차원의 파편과 관련이 있을 것 같아서.

원래대로였다면 마석을 판매한 뒤 의뢰를 받고, 시장에서 스튜와 수프 재료를 사서 한세아의 인벤토리를 채운 뒤 그레이스의 연금 화살 따위를 구매하며 정비 시간을 가져야 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건 정중하기 짝이 없는 신전 기사들. 초대에 응하겠다고 하자 귀빈을 엄호하듯 새하얀 갑옷의 신전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우리를 에워싼다. 마치 시민들의 시선조차 갑옷으로 가려 주겠다는 듯.

물론 티 하나 없이 새하얀 갑옷을 입은 덩치 열댓 명이 우르르 몰려다니면, 그것도 여신교의 심볼을 가슴에 큼지막하게 달고 다니면 시선이 모이는 건 당연한 이야기.

탑을 향해 가던 모험가들도, 바삐 움직이던 상인들도, 가게 앞을 쓸거나 매대를 정리하던 주민들도 모두가 우리를 향해 시선을 보낸다.

-이거 한세아 공개처형임?

-천재 마법사 한나님의 파티 나가신다

-중전마마납시오오오오오오

-신전 기사들 광신도일줄 알았는데 나사 하나 빠진거 커엽네

-그래서 이게 먼 상황인지 짐작은 감?

 “음, 아무래도 롤랑의 캐릭터 퀘스트가 신전이랑 연관이 있나 봐. 예비 성녀인 아이린만 연관이 있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신전 기사들이 롤랑을 찾네. 역시 칭호가 팔라딘이라 그런가?”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한 한세아와 귀족 아가씨인 케이티에 비해, 그레이스와 아이린은 이목이 쏠리자 움츠러들었다.

시청자들과 대화를 나누느라 태연해 보이는 모습 때문인지 두 사람이 한세아를 바라보는 시선이 묘하게 변하는 걸 봐선 천재 마법사 한세아설 따위를 생각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신전 기사들의 호위 아닌 호위 속에서 도착한 신전.

신전 기사들이 시민들에게 개방된 기도용 홀이나 고아들을 돌보는 놀이방보다 더욱 깊숙한 곳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오, 여기 미니맵에 표시 안 되는 구역이던데 스토리 밀어야 올 수 있는 곳인가 봐. 자유도 생각해보면 스토리로만 온다기보단 교회와 연이 닿아야지, 그 뭐냐, 인연 레벨 같은 느낌으로다가.”

 “어머,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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