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라딘이자너 빡통아
-즈그 파티 탱커가 뭐 하고 다니는지도 모르죠?
-그렇게 쓸거면 롤랑 나 달라고…
-그래서 롤랑 캐릭터 퀘스트가 대체 뭔디 신전 기사가 저래
-신전 기사들이 팔라딘이 아니고, 롤랑만 팔라딘이면 롤랑이 아이린 마망이랑?
그렇게 던져진 질문에 입구의 신전 기사들은 물론 시청자들도 일행들도 호기심 어린 시선을 내게 던진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여신과 만나 신성력을 얻은 뒤, 혼자서 실험을 했지 일행들에게 ‘나 신성력 쓴다’라고 말해 주진 않았구나.
쏟아지는 시선의 세례가 부담스럽지만, 안타깝게도 내 머리는 이런 상황에 말을 정교하게 지어낼 깜냥이 되지 않는다.
“축복받은 숲에서 여신의 계시를 받았을 때, 신성력이 제게 깃들었습니다.”
“계시! 계시를 받으셨습니까?”
“예. 여기 아이린 수녀님과 저희 일행들이 여신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땐 정면 돌파를 하는 게 제일이겠지. 신전에 무슨 타락한 사제 무리가 암약하는 중도 아닐 테니 지원을 받을 수 있으면 몰라, 방해될 일은 없을 것이다.
대놓고 말해버리자 감격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신전 기사들과 당황한 듯 나를 바라보는 일행들. 아무래도 다들 감수성 넘치는 여성들이다 보니 여신의 계시를 ‘우리 파티만 아는 비밀’ 따위로 생각하고 있었나 보네.
…특히, 그런 쪽으로 감수성이 넘치는 우리 북부 잼민이의 눈총이 매섭다 못해 따갑다.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신성력이 깃든 모습을 보니 거짓일 리 없겠군요. 아이린 자매님과 그, 모험가 형제자매님들의 앞길에 여신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인 뭐라도 꼬치꼬치 캐물을 줄 알았던 신전 기사가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길을 비켜 주었다는 점. 안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화덕을 중심으로 설치된 텐트촌이 보인다.
아무래도 빈 텐트를 골라잡아서 휴식을 취하고, 가운데 있는 커다란 공용 화덕을 사용해 각자 식사를 준비하는 모양새인가.
“롤랑! 그걸, 그걸 막, 말해도 되는 거야?”
신전 기사들의 시선이 떨어지고, 주변에 다른 모험가들도 없자 가장 먼저 내게 달려든 것은 뺨이 팅팅 부어오른 케이티. 우리 일행들만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사명에 취해 있었는지 내 폭로에 불만을 잔뜩 가진 모양이다.
옆에 착 달라붙어 매서운 눈총을 보내는 케이티를 매달고 빈 텐트 앞에 털썩 주저앉자 일행들도 둥글게 자리를 잡는다. 마치 설명 좀 해 보라는 듯 포위를 하는 모양새.
“늦든 빠르든 밝혀졌어야 할 일이야. 그리고 신성력은 조금씩 늘어나는 중이라 말하지 않았을 뿐이고.”
“대체 언제부터?”
“말했잖아, 여신님을 만난 다음부터라고. 내 몸 안에 있던 마나가 점차 신성력으로 뒤바뀌기 시작하던데.”
꾹 쥔 주먹 위로 푸른 마나를 보여주었다가, 새하얀 신성력을 띄워 올리니 눈이 동그랗게 변하는 일행들. 이 세상의 상식으로 두 가지 기운을 사용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보니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든가 보다.
하긴 히로인즈 크로니클에 폼 체인지형 캐릭터들이 있다 해도, 히어로즈 크로니클에서의 10년 동안 만나본 적은 없었지.
나야 지닌 마나에 비해 신성력이 워낙 미약한 데다, 차원 이동에 환생에 홀로그램에 한세아 돕기 퀘스트 까지 겹쳐 별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한세아를 제외한 NPC 일행들이 보기에는 여신의 신탁에 이어 특별한 능력을 갖추게 된 것처럼 보이는 모양.
“이건, 마치….”
감격에 찬 눈으로 내 신성력을 바라보던 아이린이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퍼어어어엉―!
“뭐, 뭐야!”
“폭발? 누가 마법이라도 잘못 사용한 거야, 뭐야?!”
“아아아아악, 도, 도와줘!”
굉음과 함께 후끈한 바람이 안전지대 내부로 훅 몰려든다.
심상치 않은 폭발음과 고통에 차서 울부짖는 소리. 성역을 지키는 신전 기사들이 가장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서는 게 보인다. 순식간에 작은 점으로 변하는 새하얀 갑주를 보며 뛰쳐나갈지 말지 잠시 고민에 빠지자 옆에서 팔뚝을 톡톡 두드리는 아이린의 손길.
“무슨 상황인지 보고 오시는 게 좋겠어요.”
“그래, 알겠어.”
이벤트성 전투 따위로 일행들이 위험에 처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생각해보니 이곳은 신전의 성역. 신전의 성역에서 5★ 보호 특화 성녀가 순식간에 당할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새하얀 갑옷을 뒤따라 폭음이 울려 퍼진 곳으로 향했다.
그저 가까이 다가갔을 뿐인데 마치 모닥불 앞에 앉은 것처럼 얼굴에 훅 끼쳐오는 열기. 굉음이 폭발음이었다는 걸 증명하는 듯 후끈한 공기가 매캐한 냄새와 함께 독 웅덩이의 보라색 연기를 밀어내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자매님, 마법사에게 습격을 당하신 겁니까?”
거기에 더해 검게 그을린 웅덩이는 딱 봐도 폭심지처럼 보이니, 현대였다면 가스 폭발 사고나 폭탄 따위가 터진 게 아닐까 싶은 모양새. 한발 먼저 도착한 신전 기사들이 신음을 흘리는 모험가들을 껴안고 신성력으로 응급 처치를 하며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할, 유일하게 멀쩡한 여성 모험가는 패닉에 빠진 듯 창백히 질린 채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도와달라고 소리친 게 이 여자인 것 같은데 왜 저러고 있을까.
솔직히 말해서 상급 모험가쯤 되면 사람 죽는 걸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초급 모험가 시절부터 죽어 나가는 동료 모험가들과 몬스터에게 살해당한 시민 등 다양하게 죽음을 접하는 직업이니까. 그러니 동료가 죽은 것도 아니고 죽어가는 모습에 당황하는 건 조금 이상한데.
“자매님? …흐음, 많이 당황하신 것 같은데 치료부터 해야겠어.”
“그게 좋겠군. 응급 처치만 한 다음 성역으로 이송하자고, 치료는 우리가 하는 것보단 다른 형제님들에게 맡기는 게 좋겠지.”
폭발에 휘말려 상체, 특히 갑옷이 없는 양팔과 얼굴 쪽에 심각한 화상을 입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말도 못 하고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 장궁을 든 여자. 근접을 담당하는 두 사람이 폭발에 휘말렸고, 뒤에 있던 궁수가 비명을 질러 도움을 요청한 건가.
내 쪽을 슬쩍 바라본 신전 기사들이 도움을 요청하는 일은 없이 두 환자를 번쩍 들고 황급히 걸음을 옮긴다.
화염 계열의 마법을 사용하는 몬스터라도 있는 건지, 아니면 언데드의 저주 따위에 진짜 미쳐버린 마법사가 저 파티를 습격한 것인지 당사자가 입을 안 여니 알 수가 없네. 주변을 보면 다친 모험가 말고는 딱히 뭐가 없는데.
“으, 아으, 내가, 나는….”
“흠, 실례 좀 하지.”
상처를 입은 두 남녀를 신전 기사가 둘러메고 사라지는데도 제자리에 망부석처럼 굳어 있는 여성 모험가의 허리를 휘감고 짐짝처럼 들어 올렸다. 아무리 안전지대가 앞이라지만 의문의 폭발이 일어난 장소이자 독 웅덩이 바로 옆에 가만히 세워 둘 수는 없으니까.
원래부터 멘탈이 약한 건지 내가 허리를 휘감아 어깨에 둘러메는 동안에도 반항 따위 하지 않는 여자. 그래도 32층에서 사냥을 할 정도면 육체적인 능력이 뒷받침될 테니 부담 없이 짐짝처럼 들고 다시 안전지대로 이동했다.
“롤랑, 그 사람은…?”
“부상자들의 일행인데,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는지 선 채로 기절했길래 데려왔어.”
그렇게 돌아온 안전지대의 입구에는 신전 기사와 부상자, 부상자를 치료하는 사제들과 폭음을 듣고 구경을 나온 모험가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 인파 틈바구니에서 슬쩍 질문을 던지는 한세아.
당연하지만 내 머리 위에 카메라를 달아 놔서 상황을 전부 알고 있는 주제에 천연덕스럽게 모르는 척을 하는 게 조금 어처구니없으면서도 웃기네.
-딱 봐도 트롤이네 ㅋㅋ 불화살 다 뒤졌다
-이게 근캐를 위한 기믹인가 근캐를 죽이기 위한 기믹인가?
-암튼 명확한 대처법 있으니까 상관 없지 않나
-보조 무기로 연금 화살이랑 석궁 챙겨야겠네
-나중에 40층 보스한테 트롤을 던져서 딜을 하는 건 아니겠지?
채팅창에선 한세아의 카메라 덕에 상황을 전부 알게 된 시청자들이 이런저런 추측을 내밀기 시작한다. 그중 가장 우세한 여론은 누런 가스 트롤이 폭발한다는 의견. 트롤의 매캐한 가스가 가연성이라면 말이 되긴 하네.
단순히 때려죽이기만 해도 가스가 푸쉬식- 하고 주변을 가득 채우니, 그 가스가 폭발을 일으킨 거라면 사건이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으음…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걸까요?”
시청자들이 트롤의 폭발을 진실이라고 확신하는 동안 슬그머니 다가온 아이린. 보호 특화, 치유 감소의 능력으로 인해 폭발로 인한 극심한 화상에는 손을 쓸 수 없는 그녀였지만, 놀란 가슴 정도는 진정시켜줄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부드러운 손바닥에 맺힌 은은한 신성력이 마치 아이를 토닥이듯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는 여성 모험가의 가슴팍으로 스며든다.
“내, 내가아….”
“네에, 자매님. 괜찮아요, 괜찮아.”
미약하다고는 해도 신성력은 신성력인가.
※
신성력을 이용한 토닥임에 어린애처럼 와앙 울어버린 여성 모험가.
아이린의 품 안에서 한참을 울던 여성 모험가가 퉁퉁 부어오른 눈을 껌뻑이며 우리를 바라본다. 바깥의 독성 가득한 늪지 대신 신성력 가득한 성역의 모습과 자애롭게 미소지으며 가슴팍이 눈물로 젖어도 아랑곳하지 않는 아이린에게 감동한 걸까.
주변에 슬그머니 모여드는 모험가들과 동료들을 치료하고 다가온 사제들을 향해 여성 모험가가 어렵사리 입을 연다.
“트롤, 온몸에 노란색 종양이 나 있는 커다란 트롤이었어요….”
쉬어버린 목소리 때문에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증언은 바로 시청자들의 말대로 트롤이 범인이었다는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