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린이 곧바로 사용한 정화의 성법 덕분에 겨우 눈을 뜬 일행들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누런 트롤 시체를 노려본다. 퀘스트의 증표인지, 아니면 아래로 내려온 네임드 몬스터라 그런지 사라지지 않고 가스를 계속 뿜어내는 커다란 시체 덩어리.
좀비 악어, 리자드맨 스켈레톤, 마비 촉수 뱀에 이어 가스 폭탄 트롤이라니.
31층부터 40층 까지의 컨셉이 ‘근딜 죽이기’가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악랄한 구성 아닌가. 당장 나만 해도 방패로 후려쳐서 죽였다가 가스를 듬뿍 뒤집어쓰게 되었다. 무의식적으로 신성력을 온몸에 두르지 않았다면, 씻기 위해서라도 탑 바깥으로 뛰쳐 나갔을 거야.
“어우, 나야 마법사지만 근딜 플레이어들은 대체 뭘 어쩌라고 게임 밸런스를 이따구로 만들어 놨냐. 아무리 판타지에서 마법사가 귀하다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이제는 부머도 나오네 시발 ㅋㅋㅋ
-방송 보니까 진짜 초기화 마렵다
-인간적으로 시체폭발은 너무한거 아니냐
-시체폭발이 흑마법 국룰이긴 하지
-눈나마망 울먹이는 얼굴 넘모 꼴려
일행들이 저 트롤 시체도 채취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저 끔찍한 고름 덩어리 사이에서 마석을 끄집어 내야 할지 고민을 하는 사이 눈에 띄는 속도로 휘발되어 사라지는 게 보인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가스를 뿜어내는 시체가 사라지고 마석만 남아 있게 되는 건가.
정화의 성법이 잔류해 면역 버프를 받은 일행들. 머리카락이 신성력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미녀들이 끔찍한 시체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기묘한 모양새가 조금 웃기게 느껴지네.
그렇다 해서 저 끔찍한 고름 더미에 손을 집어넣고 마석을 끄집어낼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원활한 탐색을 위해서는 빠르게 처리해야 하니 내가 신성력으로 코팅을 해서 끄집어내는 게 맞겠지만, 트롤의 덩치를 생각해보면 팔만 들어가는 게 아니라 상체가 다 처박힐 것 같아서.
“…저 시체에도 정화를 사용해 볼게요.”
“그래, 그러는 게 좋겠어. 안 그래도 좁은 길을 저렇게 막고 있으니….”
덩치가 3m인, 아슬아슬하게 대형종이 아닌 게 트롤이다 보니 시체도 크네. 그 앞에서 나조차 머뭇거리는 걸 본 아이린이 성큼 나서 다시 한번 신성력을 휘두르듯 내뿜는다.
마치 더러운 욕조나 싱크대 따위를 세정제로 씻어버리듯 싸악 녹아내리는 누런 고름. 가스를 뿜어내던 시체 덩어리가 녹아 사라지자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은 주먹만 한 마석. 동굴에서 얻던 마석보다 확연히 커다란 크기에 일행들의 시선이 쏠린다.
본디 탑의 트롤은 40층에 나타나는 네임드 몬스터라 37층에서 때려치우고 내려간 나로서는 이 마석이 평범한 트롤의 마석인지, 변이한 마석인지는 모른다.
“통로 앞에서 이 트롤이 자리를 잡고 있던 거야?”
“그래. 원래 트롤은 40층에 나오는 녀석인데, 갑자기 32층의 통로에 있을 줄은 몰랐네.”
“그럼 롤랑도 트롤은 본 적 없어?”
“탑 안에서는. 탑 바깥, 특히 남부 쪽에는 트롤이 많아서 관련된 의뢰가 많이 들어오거든. 마력을 다루지 못하고 덩치도 아슬아슬하게 작아 대형종으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특유의 재생력 때문에 마법사가 없으면 사냥하기 힘들어서 의뢰비가 꽤 비싸지.”
이 트롤이라는 놈은 홈쇼핑의 상술 같은 더러운 몬스터다. 49,990원을 5만 원보다 싸다고 주장을 하는 것 같은 몬스터거든.
5m 이상의 대형종보다는 확연히 작지만 3~4m는 되는 큼지막한 덩치와 덩치로부터 나오는 괴력. 마력으로 피부가 강화된 건 아니지만 날붙이 정도는 버티는 질기고 튼튼한 피부. 거기에 팔, 다리를 잘라도 반나절이면 다시 자라나는 괴랄한 생명력까지.
분류상 대형종은 아니지만, 중급 모험가들끼리 잡으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귀찮은 상대. 그게 늪지대의 트롤이었다. 그런 놈이 죽으면 유독 가스를 주변에 퍼트린다니, 뭐 이런 게 다 있어.
-설명을 들을수록 마음이 꺾이는데…?
-미래시(앞이 껌껌해서 안보임)
-이런 미래는 알고 싶지 않았는데
-혹시 근딜들은 골렘을 구해서 올라오는 게 유일한 해답 아닐까
-그냥 메카물로 장르 변환 ‘해줘’
“으음, 이러면 나중에 더 위로 올라가서 메이지 킬러 같은 게 잔뜩 있는 층이 나오는 거 아니야? 마법 면역 몬스터라던가, 마나 사용 불가능 함정이라던가. 솔직히 이렇게 한쪽에 편향적인 맵이 나오면 반대의 맵이 나오는 게 국룰이니까.”
트롤에 대해 설명을 하니 몸서리를 치는 한세아와 시청자들. 40층도 아니고 32층부터 상급 이하의 모험가는 사냥하기도 힘든 놈이 튀어나오니 진절머리가 날 수밖에. 그래도 언데드가 되면서 재생 능력은 없어진 것 같긴 한데….
‘탑 난이도도 초급 중급 상급인가? 30층 단위로 끊어서 어려워지는 식으로.’
불로 지져버리면 해결되는 재생 능력 대신, 죽으면서 주변을 중독시키는 가스가 폭발하는 것 또한 귀찮기 그지없는 건 마찬가지다.
30층 이하는 맛보기였으며, 31층부터는 난이도를 올리겠다고 선포하는 듯한 게임사의 악의가 느껴지는 오염된 늪지대.
본디 우거져 있던 늪지대의 나무가 잿빛으로 말라붙으며 탁 트인 시야 덕분에, 이 빌어먹을 독가스 트롤은 독 웅덩이를 첨벙첨벙 헤치며 일행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물론 트롤뿐만이 아니라 온갖 언데드들이 전부.
그나마 다행인 점은 시야… 라기보단 감지 범위 내에 생명체가 있으면 무조건 달려드는 언데드지만, 느릿하게 일직선으로만 달려와서 감지하고 상대하는 데에는 별문제가 없다는 점이려나.
“으윽, 징그러워 진짜….”
“오늘 저녁은 아주 가볍게 먹어야 할 것 같아. 평소보다 절반 정도.”
“나는… 그냥 육포만 씹을게.”
“저녁엔 향이 약한 묽은 수프를 끓여드릴게요. 그래도 전투를 하려면 배는 채워 놔야죠.”
그렇게 육체적 피로감보다 정신적 피로를 호소하며 일행들이 저녁 식사 이야기를 하는 동안 성큼성큼 걸어나선 그레이스가 저 멀리 피어오르는 신성력의 기둥을 바라보며 방향을 잡는다. 시야가 트여서 몬스터들이 귀찮게 구는 만큼, 안전지대 하나는 확실히 보이네.
신성력 때문인지 주변에 몬스터들은 보이지 않지만 마비 늪 너머로 안전지대를 향해 바삐 움직이는 모험가들이 몇 명 보인다.
“저 신성력 기둥은 보고 찾아오라고 만든 걸까?”
“그런 의미도 있겠지만, 아마 성법을 펼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저런 기둥 모양이 된 것 같아요. 성역을 펼치면 신성력으로 만든 신전의 기둥이 생기는데, 아마 독기를 중화하느라 모양이 뭉그러진 것 같네요.”
역겨운 공기를 밀어내는 신성력의 기둥을 보자 기운이 나는지 평소보다 훨씬 활발해진 아이린. 그녀의 모습에 기운을 얻은 일행들이 투덜거리는 말을 멈추고 성큼성큼 걸어나선다. 저렇게 해맑게 웃는 사람 옆에서 기운 빠지는 소리를 하는 것도 어지간히 철면피 아니면 못 하는 일이지.
안전지대 겸 성역이 점차 가까워지자 좁은 외길 앞에 우리보다 먼저 걷던 모험가 무리도 보인다. 옆길에 있던 모험가까지 하면 세 팀이 옹기종기 걷는 모양새.
그래도 여느 때처럼 서로를 경계하는 일은 없었다. 눈앞에서 신성력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으며 새하얀 갑옷을 입은 신전 기사들이 눈을 부라리고 있는데 감히 강도로 돌변할 모험가가 있을 리 없으니까.
그렇게 신전 기사의 새하얀 갑옷이 보일 즈음 자연스럽게 그레이스의 앞으로 나선 아이린. 그 모습에 앞장서 가던 모험가 무리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발걸음을 늦추더니 우리 쪽으로 다가온다.
마대 자루에 가까운 통 넓은 회색 수도사복과, 허리춤의 벨트에 매달린 여신교의 심볼. 아이린을 보고 할 말이 있어서 다가오는 사제인가.
“…안녕하십니까, 자매님. 그, 혹시 수상한 걸 보셨습니까?”
“으음, 40층에 있어야 할 트롤이 나타났다는 것 말고는 31층과 다를 바 없네요.”
“트롤? 트롤이라니…. 제가 본 건 회색 나무 안에 있던 기괴한 뱀입니다.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해 휴식을 취하려 했는데, 나무 둥치 속에서 마비 촉수가 기어 나오더군요. 혹시라도 나무 등치 따위에서 휴식을 취하실 땐 조심하시라고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형제님.”
아무래도 수녀인 아이린을 발견하고, 나무 둥치를 파고들어 숨어 있는 뱀에 대해 경고를 해 줄 생각이었나 보네. 하지만 저 파티는 아직 트롤과 만난 적 없는지 아이린의 말에 화들짝 놀라서는 제 일행들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달려간다.
트롤이라는 놈이 중급과 상급을 나누는 경계선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강력한 놈이니, 모험가들로서는 주의할 수밖에 없지. 애초에 40층 네임드 몬스터가 32층을 싸돌아다니는 것부터가 문제다.
가볍게 이야기를 나눈 뒤 발걸음을 재촉한 앞의 모험가 무리가 별다른 문제 없이 신전 기사들과 인사를 나누고 안전지대로 들어가고, 우리 또한 뒤이어 신전 기사들의 앞에 도착했다.
“고행길에 나선 자매님이시군요. 여신님의 뜻을 받드시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안녕하세요, 형제님들. 안전지대에서 주의해야 할 게 있을까요?”
“안쪽에 있는 물웅덩이가 투명하게 변하긴 했지만, 아직 정화가 미흡해 미약한 독성을 띠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불편하시더라도 내부에 있는 샘물은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 같군요.”
검문이 목적이라기보단 안내와 지원을 위한 것인지 별다른 질문 없이 곧바로 우리를 들여보내 주는 신전 기사들.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가는 아이린을 뒤따라 발걸음을 옮기자, 갑자기 입을 다물고 있던 왼편의 신전 기사가 나를 슬쩍 붙잡는다. 나란히 서서 이동하던 중이었기에 허리가 끊긴 모양새가 되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내 앞을 막아서는 새하얀 갑옷.
“으음, 형제님?”
“…무슨 일이죠?”
앞장서 가던 일행들이 우리를 향해 뒤돌아보고, 옆에 있던 설명 담당 신전 기사조차 놀란 눈으로 나를 막아선 동료를 쳐다본다.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위아래로 흩어보는 그.
새하얀 투구 속에서 날카롭게 날아드는 시선을 마주하며, ‘내가 요즘 신전이랑 척 질 일이 있었나?’ 따위의 질문이 문득 떠올랐지만, 신전 기사가 던진 질문은 예상하지도 못한 것이었다.
“혹시, 여신님의 계시를 받으셨습니까?”
“…어째서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
“그야, 신성력을 품은 분이시니까요.”
…레벨이 좀 높아서 그런지, 방패에 깃든 신성력의 흔적을 알아보는 건가?
※
신전 기사는 모험가가 될 수 없다.
그야 여신의 품에 귀의해 신탁과 계시에 따라 움직이는 무력 집단이니, 신성력을 품고 모험가를 본업 삼을 수 없는 건 당연한 이야기 아니겠는가. 그러니 신전 기사의 눈에는 내가 참으로 기이한 존재로 보이나 보다.
궁수가 생명체를 탐지하는 데 특화되어 있고, 도적이 함정 해제의 전문가인 것처럼 신성력을 통한 갑옷과 무구의 강화는 신전 기사들의 기술. 그걸 모험가가 버젓이 쓰고 다니니 의문을 표할 수밖에.
“어, 뭐야. 롤랑이 신성력 쓰면 안 되는 거야? 아니, 근데 신성력? 롤랑이 신성력 쓰는 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