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0화 (160/175)

 “롤랑, 늪지대에도 안전지대가 있지?”

 “있지. 그리고 그곳만큼은 변하지 않았기를 빌어야지.”

폭 30cm 정도의 좁은 길 위를 걸으며 일행들이 도란도란 대화를 나눈다. 숨을 쉴 때마다 뭔가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르고, 주변에서 보글보글 독가스 피어오르는 소리가 나지만 몬스터가 등장하지 않은 타이밍에는 그다지 위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31층은 이제 베테랑 중급 모험가를 넘어 이제는 상급 모험가를 노릴 법한 사람들이 도전하는 장소. 육체 바깥으로 마력을 끄집어내지 못한다 해도 중급 모험가가 고작 길이 좁다고 위험에 처할 리 없거든.

그건 우리 일행들도 마찬가지. 플레이어인 한세아는 애초에 운동 방송을 겸업하던 사람으로서, 게임 첫 전투부터 고블린이나 뿔여우 따위를 상대로 몸을 움직이는 센스를 증명한 상황이다. 산골짜기 뛰놀던 그레이스와 어린 시절부터 칼을 휘두른 케이티도 마찬가지.

그나마 조금 불안한 건 신전에서 나고 자란 아이린뿐인데 그래도 태생 5★의 기초적인 능력치 덕분인지 비전투 상황에서는 무리 없이 늪지대를 건너고 있었다.

 “음, 롤랑? 저 앞에 있는 웅덩이에서 뭔가 찰박거리는 게 느껴져. 언데드가 되어서 그런지 정확한 수를 파악하긴 힘들지만 그래도 다섯은 넘는 것 같아.”

그렇게 나아가던 중 처음으로 만나게 된 몬스터들. 31층부터 일종의 하드 모드가 되어서 그런지, 아니면 언데드라는 종족 특성 때문인지 동굴 때와는 달리 정확한 숫자를 가늠하지 못하는 그레이스가 커다란 독 웅덩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딱 봐도 발목까지 오는 얕은 웅덩이가 아니라 낚시도 할 수 있을 것 크기인데, 웅덩이보다는 저수지나 호수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넓었다.

 “앞장설 테니 조심하고. 한나, 발판 만들 수 있겠어?”

 “가능할 것 같아. 흙길을 넓히고 우리는 그 위에서 포대 역할을 맡을게.”

그 넓은 웅덩이를 보고 곧바로 한세아가 지팡이를 치켜든다. 30cm짜리 좁은 흙길에 기차놀이를 하듯 줄지어 서서 전투를 진행할 수 없기에, 30층의 보상으로 얻은 그녀의 스킬 포인트는 이번에도 비전투 마법을 위해 소모된 상태.

주문을 외움과 동시에 지팡이 끝에 맺힌 마력이 물방울처럼 똑똑 흘러내려 바닥으로 스며들자 좁은 흙길이 옆으로 무럭무럭 자라나며 네 사람이 편안하게 움직일 수 있을 크기로 넓고 평평하게 펼쳐진다.

-어떻게 스킬 이름이 어스컨트롤

-한세아가 입으로 스킬명 외칠 때 마다 마법사가 아니라서 다행인 것 같음

-조명, 가방, 지도, 포션 자판기에 이은 발판…

-그 일본 웹소쪽에 발판전생자라는 단어가 있는데 여긴 발판플레이어네여

-상급 모험가 되어서도 공격 마법은 쓰지도 못할 것 같아서 마음이 짠해

 “아 씨, 이래 봬도 이거 중상급 마법이거든? 컨트롤만 잘하면 이걸로 뾰족한 가시를 만들어서 적을 꿰뚫을 수도 있다… 라고 스킬 창에 적혀있기는 함!”

원래대로라면 바닥에 구덩이를 만들거나 암석 가시를 뽑아내 상대에게 데미지와 CC기를 동시에 처박는 마법, 어스 컨트롤. 이름이 좀 직관적이고 유치한 건 히로인즈 크로니클 탓이긴 한데 아무튼 성능 하나는 괜찮은 마법이다.

모바일 게임에서는 그저 데미지만 주는 마법이었지만, 가상 현실 게임으로 오면서 지금처럼 다양하게 써먹을 수 있으니까.

물방울 생성 마법인 워터로 고블린을 익사시키거나, 불 피우는 데 사용하는 스파크 마법으로 뿔늑대의 코나 눈을 지져서 전투를 방해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응용법이다. 운동 신경도 괜찮은 편이지만 한세아의 진짜 재능은 마력 컨트롤이라 볼 수 있지.

 ‘애가 묘하게 엉성하고 변태적인데 마법 실력 하나는 진짜 괜찮네….’

조합 생각해서 대충 후열에 있어야 하는 마법사를 추천했는데, 진짜로 마법에 대한 재능이 펼쳐지는 걸 보니 오묘한 기분이 든다. 미니맵 가지고 사기를 치려고 스킬을 응용해서 마력을 보여주기식으로 모았다 흩어지게 하는 것도 그렇고, 컨트롤 하나는 진짜 잘하네.

정교하게 다져진 바닥 위에 나란히 선 일행들. 자연스럽게 케이티가 지나쳐 온 웅덩이 쪽을 다시 경계하기 시작하고, 그레이스는 웅덩이를 노려보며 시위에 화살을 메긴다.

부글부글- 가끔 몇 개 터지는 수준이 아니라 수십 개의 거품이 퐁퐁 터지며 수면 위로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는 이끼 악어들. 아니, 이끼 악어였던 좀비 악어들.

좀비가 되었음에도 마치 사슬갑옷과 솜 갑옷처럼 단단한 비늘과 두꺼운 이끼로 몸을 보호하는 모습은 그대로였다. 대신 눈알이 흐리멍덩하거나 쩌억 벌린 아가리에서 기분 나쁜 녹색 점액질이 질질 흐르는 게, 누가 봐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네.

 “…저거, 내 화살이 먹힐까?”

 “눈알이나 아가리를 쏴서 머리를 꿰뚫어 봐. 좀비가 되지 않았어도 이끼 악어의 몸통은 날붙이로 타격을 줄 수 없는 수준이거든.”

 “골렘이랑 다를 바 없다는 거네, 알겠어. …연금 화살은 넉넉하지 않으니까.”

21~30층의 골렘들처럼 특이 개체도 아니고 평범한 몬스터를 잡겠다고 연금 시약 바른 화살을 펑펑 쏠 순 없겠지. 숨을 깊게 들이마신 그녀가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를 놓자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내 옆을 스쳐 지나간다.

퍼억-! 공격형 스킬이 없다 해도 4★으로 승급한 그레이스의 궁술 실력 덕분일까. 늪지에서 흐리멍덩한 눈알만 띄워둔 채 나를 탐색하던 놈의 눈알에 화살이 빨려 들어가듯 정확히 꽂힌다.

그어어억―

 “조금 얕았나?”

 “으음, 머리뼈가 두꺼운 것 같기도 하고.”

누가 봐도 독처럼 보이는 녹색 침을 질질 흘리며 아가리를 쩌억 벌리는 좀비 악어. 그러나 튼튼한 몸뚱이에 좀비 특유의 무감각함을 무기로 앞세워 느릿하게 달려드는 놈들은 내가 상대하기 가장 좋아하는 부류의 적이다.

날렵하고 잽싼 몸놀림으로 까부는 게 아니라 저렇게 느긋하게 웅덩이를 헤치고 전진해 온다면 그대로 내리찍어 버릴 수 있으니까.

상대가 언데드인 만큼 마력이 아니라 신성력을 철퇴에 때려 박은 다음 번쩍 추어올린 철퇴를 내리찍는다. 떠엉- 하는 소리와 함께 느껴지는 묵직한 손맛. 속도를 포기한 대신 튼튼함을 얻은 몬스터라 그런지 손바닥이 징징 울리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일반 화살로는 뚫지도 못하겠는데?”

 “그 정도야? …아이 씨, 그러면 폭발 화살을 쏠까?”

철퇴로 악어 대가리 하나를 부순 여파가 뒤까지 튀었는지, 어느새 쉴드를 펼친 한세아의 곁에서 그레이스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다. 탐색형 캐릭터답게 난이도가 올라간 필드에서의 공격력 부족이 체감되는 상황.

물론 애초에 원샷 원킬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양심이 없는 행위긴 했기에 불만은 없었다. 당장 칼질하는 검사들만 보더라도 최상급이 아닌 상급 모험가라면, 저 이끼악어를 일검에 토막 낼 수 없는 게 당연하니까.

 “으악, 독 튄다! …진짜, 쉴드 마법 배워두길 잘했네. 이런 걸 가지고 보호의 성법 펼쳐 달라 할 순 없을 거 아니야.”

-이제는 우산이 되어버렸 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마법사가 만능이긴 하다

-근데 놀려먹는거 빼고 존나 유능하긴 함 ㅋㅋ 딜러가 아니라 서폿이라 그렇지

-ㄹㅇ ㅋㅋ 칼잽이 하다 마법사 플레이 하는거 보면 존나 부럽긴 함

-근데 공격 마법 하나 정도는 배워두지, 아예 안배우니까 할 게 없자너

 “아니, 님들. 마법사를 안 해봐서 그렇게 말 하는 거지 이게 쉬운 게 아님. 초반 마법사 설명할 때 롤랑 센세가 공격 마법 두세 번이면 마나 다 떨어진다고 말해 주지 않았나? 이게 마법사가 데미지는 존나 쎈데 스킬 횟수 제한이 존나 빡세. 연금술 찍고 토할 때까지 포션 처먹는 거 아니면 하루에 다섯 번 정도가 한계야.”

순식간에 휴대용 조명에서 마법사 호소인이 되어버린 한세아가 시청자들에게 하소연하는 걸 흘려들으며 다시 철퇴를 치켜들었다. 스켈레톤이 되었다는 리저드맨도 그렇고, 어째 궁수와 검사에겐 상성이 좀 안 좋은 필드네.

초원과 숲이 사냥꾼 그레이스를 위한 필드였다면 늪지대는 명확하게 둔기 전사와 사제를 위한 필드라는 게 느껴진다. 원래 게임에는 맵마다 우세 직업군이 있는 법 아니겠는가.

 ‘장비, 또 바꿔야 하나. 화살이 아니라 활을 최상급 수준으로 맞춰주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좀비 악어의 머리통을 하나 더 깨부쉈다. 워낙 놈들의 움직임이 느릿한 덕에 그레이스의 화실이 집요하게 눈구멍만 노려 처음 화살 맞은 놈을 처리하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악어가 물속에서는 빠른 편인데, 좀비가 되면서 튼튼함을 얻고 속도를 포기한 모양인지 거의 걸음마를 뗀 아이 수준의 속도로 다가오니 빗맞히는 게 더 힘들겠다. 저 속도면 케이티와 아이린이 할 일이 없겠네.

 “…마석이 물에 뜨니 다행이라 해야 할까?”

 “어, 물로 닦아서 인벤토리에 넣으면 괜찮겠지?”

 “아니면 마석을 신성력으로 정화해 볼까요?”

물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죽어버린 좀비 악어 때문에, 놈들의 마석이 독 웅덩이 위에 둥실 떠다니는 것 빼고는 아주 손쉬운 전투였다.

…한동안 마석은 내가 주워야 하겠네.

언데드로 변한 몬스터들은 생김새는 제각각이지만, 하나의 특징을 보였다. 느려진 대신 엄청나게 튼튼해졌다는 점이다.

푹신하고 두꺼운 이끼를 완충재 삼고, 그 아래 딱딱한 비늘을 숨기고 있는 이끼악어는 좀비가 되며 안 그래도 튼튼한 몸이 더욱 튼튼해졌다. 대신 물에서도 육지처럼 느릿하게 움직인다는 부작용이 생겼지만, 좀비가 되며 눈과 목구멍 등 생명체로서의 약점이 전부 사라져버린 상황.

마비 독이 듬뿍 함유된 진흙 늪에서 기어 나온 리자드맨 스켈레톤 또한 마찬가지다. 파충류의 비늘은 물론이요 피와 살까지 버리고 뼈만 남은 녀석들은 검사와 궁수가 상대하기 정말 귀찮은 상대가 되었다. 뼈만 남은 주제에 칼 휘두르는 솜씨는 여전해서 날붙이로 사냥하기 힘든 상대가 되었거든.

그중 가장 기괴한 녀석은 덩굴뱀이었는데, 원래 나무에 똬리를 틀고 위장색을 통해 기습적인 휘감기 공격을 하던 녀석은 좀비보다는 돌연변이에 가까운 모양새가 되어 머리통에서 여러 가닥의 길쭉한 촉수를 덜렁거리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좀비 악어의 아가리처럼 독액이 뚝뚝 흐르는 촉수를.

 “…여신이시어.”

 “와, 언데드라는 게 이렇게 역겨운 놈들일 줄이야.”

그 모습에 항상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던 아이린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질 정도. 덩굴뱀 이었던 촉수뱀을 발견하자 경멸하는 표정을 보고 헤으응 거리는 시청자가 수백을 넘어 수천 단위는 되는 것 같았으니 말 다 했지.

물론 일행들의 반응은 둘째치고 변해버린 필드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 또한 격렬했다. 남 이야기일 땐 놀려 먹기 좋아 보이지만, 시청자들도 게임을 하다 보면, 정확히 말하자면 엔딩을 보기 위해선 결국 31층에 와야 할 것 아닌가?

평생 탑 공략 안 하고 판타지 세상의 주민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면, 한세아의 방송을 보고 상층의 정보를 얻어 스킬 트리 따위를 최적화하려 드는 공략형 플레이어라면 저 끈적하고 역겨운 모습에 진저리를 칠 수밖에.

-끈적한마비촉수와경멸하는마망헤으응

-선생님들의 이상성욕에는 저도 관심이 참 많습니다

-아니 후각 괜찮음? 나 비위 약한데 걍 탑 바깥으로 갈까

-겜 하다가 캡슐에 토하면 질식사하냐?

-동굴방송에서 쫄렸는데 독늪방송하니까 역겹네 걍;;

 “어… 후각은 생각보다 빠르게 마비되어서 괜찮은 것 같은데, 저 질퍽질퍽한 시체들이랑 근접전으로 싸울 자신은 없네. 둔기를 사용하는 게 언데드를 무찌르기 쉽다 해도, 결국 손으로 때려잡아야 하는 거 아님? 감촉 되게 이상할 것 같아.”

징그러운 몬스터와 악취 나고 불편한 필드. 모니터 너머로 볼 땐 역병 지대니 저주받은 땅이니 다양하게 접해봤겠지만, 그곳에 직접 가서 오감으로 만끽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렇게 시청자들에게 31층을 샅샅이 보여주며 좀비 악어의 대가리를 깨부수고, 리자드맨 스켈레톤을 곱게 빻아주고, 징그럽기 그지없는 촉수 뱀은 그레이스가 손수 고슴도치로 만들어준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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