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9화 (159/175)

-오감까지 전부 구현해놓고 필드를 저렇게 만들면 어우…

-마망의필드가열렸나

-그 와중에 5★성녀 있어서 태연한 얼굴 보니까 개꼴받네

 “어허, 태연한 얼굴이라니. 나 지금 퀘스트 시작은 안 되고 필드만 난리 나서 긴장하고 있는 게 안 보여?”

[‘장’님 10,000원 기부!]

그러네 얼굴이 잔뜩 긴장했네

 “…그래, 신빙성이 확 오르는 닉네임이네.”

구해준 모험가에게 금화와 은화가 뒤섞인 주머니를 받고 시청자와 만담을 즐기며 한세아가 테이블로 돌아올 즈음에는 길드의 문이 벌컥 열리며 마법사들도 들어왔다.

아무래도 31층의 대격변이 게이트가 완성되고 얼마 안 된 시점, 그러니까 우리 파티가 도시로 돌아오기 직전에 일어났는지 소식을 듣고 잔뜩 흥분한 마법사들이 마탑에서 길드까지 뛰어온 것이다.

 “31층! 31층에 이변이 생겼다고 들었소만?”

 “혹시 31층에서 샘플을 가져온 모험가 있는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챙겨온 마석이나 채집물 따위가 있다면 비싸게 구매하겠다!”

 “31층 위에서 내려온 모험가가 있다면 정보를 살 의향이 있다!”

길드에 정보를 요구하는 모험가들, 모험가들에게 경험담을 요구하는 마법사들. 목소리 큰 거로 경쟁하는 두 집단이 모이니 무슨 도떼기 시장판이 되어버리네. 엘리스가 질린 표정으로 우리 테이블에 딱 달라붙는 이유가 있었어.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는 걸 아랑곳하지 않고 케이티의 어깨에 팔을 감은 레베카가 31층과 관련 없는 질문을 꼬치꼬치 캐묻고, 엘리스가 나와 상담하는 척 농땡이를 피우며 시간을 보내고 있자 길드의 2층 사무실에서 커다란 노호성이 튀어나온다.

 “그마안――!”

태생 5★ 그레이엄의 고함이었다.

 “31층에서 벌어진 사건은 모험가 길드 차원에서 모험가에게 의뢰를 발주하여 조사를 시작할 것이오! 그리고 이 정보는 계약에 따라 마탑의 마법사들에게 제공될 터! 난동은 그만 부리고 정 궁금하다면 직접 올라가시오!”

평소에는 길드 건물에 없는 아저씨인데, 오늘은 사건이 사건이다 보니 보고를 받고 정보를 정리하느라 길드 사무실에 있었나.

마력을 듬뿍 담은 고함이 건물 내부를 쩌렁쩌렁 뒤흔든다. 마법사의 로브 자락을 휘날리게 할 정도로 물리력을 담았지만, 건물 밖으로는 흘러나가지 않는 섬세한 컨트롤. 어쩌면 그레이엄에게 사자후 스킬이 있는 게 아닐 정도로 정교한 외침이었다.

단순무식하게 육체만 강화할 줄 아는 나와는 전혀 다른 모양새. 내가 저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가는 테이블이 박살 나고 마법사들이 나뒹굴며 창문 따위가 깨졌을 텐데. 역시 칭호에 있는 ‘노련한 노익장’이라는 말에 걸맞은 실력이네.

-이게 그 기차 화통을 삶아먹었다 그거지?

-그래도 아죠씨 늙어서 그런가 롤랑센세보단 목소리가 작은듯

-근데 롤랑은 건물 밖에서 외친거고, 얘는 지 건물 안에서 외친거자너

-얘들은 뭔 vs놀이하는 초딩인가 목소리 크기로 캐릭터를 비교하네

-ㅋㅋ 아무튼 6★이 5★보단 쎄겠지 븅신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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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뭐 니들은 지금 그게 중요하냐? 길드가 마탑이랑 손잡고 탑의 이변을 조사하네 마네 하는데 길드장이랑 롤랑 목청배틀을 왜 진지하게 이야기해…?”

그레이엄이 마치 선포하듯 크게 고함을 지르자 조용해지는 길드의 로비. 테이블에 쥐 죽은 듯 숨어있던 엘리스가 그제야 슬쩍 일어나 우리 파티와 레베카를 향해 흠흠, 헛기침하며 목청을 가다듬고 입을 연다.

그 모습에 열심히 케이티를 갈구던 레베카도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그녀를 바라보자, 품 안에서 미리 작성해 둔 서류를 꺼내 드는 그녀.

 “31층의 조사 의뢰 목록이야. 일단 쉽고 편한 건 미리 챙겨둔 상태인데, 어때? 할 거지?”

 “의뢰 목록을 미리 짜 둔 거냐?”

 “비교적 간단한 것만 미리 챙겨둔 거야. 연금술 시약병에 웅덩이의 물과 독성이 생긴 늪지 진흙 채취해 오기, 잿빛이 된 나무 표본과 변이한 몬스터의 마석 채취 등등.”

당연한 이야기지만, 채집 의뢰는 한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마석도 너무 많으면 안 팔려서 서쪽으로 들고 가는데 그보다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물과 나뭇가지 채집 따위는 어떻겠는가.

아무리 마법사들이 실험에 쓴다 해도 상급 모험가들이 리터 단위로 퍼 오면 전부 구매할 순 없겠지. 품 안에서 꺼내든 서류에 주머니에서 꺼내든 도장을 콩 찍는 엘리스의 모습에 레베카의 눈매가 얇게 일그러진다.

 “야, 그렇게 해도 괜찮은 거 맞냐?”

 “어차피 발주해야 할 의뢰서, 아침에 미리 써 둔 것뿐이에요. 접수원들끼리 이야기를 해서 오늘 발주할 의뢰서의 수량을 정해 놨고, 그 중 첫 번째 의뢰서가 여기 있을 뿐이죠.”

 “그럼 한 장 더 줘. 설마 롤랑만 챙겨줄 생각은 아니지?”

 “당연히 아니죠. 제 분량이 딱 다섯 장이고, 의뢰를 받을 사람 중 두 명이 제 앞에 우연히 있네요.”

대놓고 주어지는 특혜에 조금 불편함을 표시하려던 레베카지만, 품 안에서 자연스럽게 의뢰서 한 장을 더 꺼내는 엘리스의 모습에 얼굴이 다시 곱게 펴진다.

상급 모험가든 최상급 모험가든 쉽고 편하게 돈을 벌 수 있는 걸 거부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테이블에 앉아 있는 대부분의 상급 모험가들은 접수원들을 재촉하다가 마석 채취 의뢰 정도만 받고 돌아가겠지.

 “그러면 연금 공방 거리로 갈까. 한나, 해독제를 만들 수 있어?”

 “어, 일단 시판되는 걸 사서 쓰다가 가격이 너무 비싸지면 만들어야 할 것 같은데. 내가 만들려면 31층의 진흙이 있어야 분석해서 만들 수 있거든.”

 “흐음, 확실히 그렇겠네. 연구 샘플도 없이 해독제를 만드는 건 불가능하겠군. 그런데 레베카, 우리랑 같이 다닐 생각이야?”

 “당연히 아니지. 너넨 31층 돌아다닐 거잖아. 난 해독약 종류별로 사서 일단 위로 올라가 봐야겠지. 시발, 말이 40층에 도착 전에 싹 다 죽어버릴 줄이야. 말한테 먹일 해독제도 연금술사 놈들이 파려나?”

길드 테이블이 실시간으로 작성되는 의뢰서로 시끄러워질 무렵, 작게 투덜거린 레베카가 케이티의 어깨를 팡팡 두드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입이 험하고 짐승처럼 구는 데다, 남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레베카지만 그래도 용병단의 대장.

제 부하만큼은 끔찍하게 아끼는 녀석이니 공방 거리에서 구매한 온갖 해독제와 마비 치료제 따위를 바리바리 싸서 들고 맨몸으로 40층 위까지 뛰어가겠지.

 “그리고 너, 다음에 만났을 때도 나 무시하고 인사 안 하면 진짜 죽어?”

 “아, 알겠어요….”

 “그래, 인마. 칼질 잘하고 싹바가지 있어서 추천해준 건데 파티 옮겼다고 인사를 안 하고 있어, 괘씸하게.”

귀족에게 대하는 태도치고는 매우 무례하지만, 원론적으로는 맞는 말처럼 들리는 묘한 정신 공격에 어느새 존댓말을 사용하는 우리 북부 잼민이. 움츠러든 어깨를 다시 한번 강하게 두드린 레베카가 특유의 날렵한 몸놀림으로 사람들을 제치고 길드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 모습을 보며 나 또한 일행들과 함께 길드 밖으로 나섰다. 그레이엄의 고함에 도떼기 시장판 같은 외침은 줄어들었다지만, 길드 접수원들과 모험가들과 마법사들이 가득 찬 혼잡한 공간이 좀 답답했거든.

 “그러면 우리도 연금술사들이 있는 공방 거리로 가서 해독제를 좀 구매해 볼까.”

 “음, 롤랑?”

길드의 문을 등지고 만월 늑대 습격 당시에 난리가 났던 공방 거리로 향하려 들자 살그머니 다가와 내 소매를 톡톡 잡아당기는 아이린. 마치 길을 막아서는 모양새가 되자 일행들의 의아한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날아든다.

시선을 받자 잠시 뺨이 붉어졌지만, 어깨를 쭈욱 펴며 입을 여는 그녀.

 “아까 전, 정화를 시도해봐서 느낀 건데요. 모험가들이 언데드가 된 몬스터에게 당한 수준의 독이라면 포션 없이 제 신성력으로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런 말 하기엔 조금 부끄럽지만, 제가 정화의 성법에는 자신이 있어서요.”

 “가능하겠어?”

 “사흘 밤낮으로 독 웅덩이에 서 있는 게 아니라면, 가능해요.”

마망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자애롭지만, 그만큼 자신의 능력을 내세우거나 잘난 척하는 것 없이 조용히 뒤에서 파티원들을 돕던 아이린. 그런 그녀가 이번에는 어깨를 쭉 펴고 자신의 능력을 어필하고 있었다.

그 덕에 두꺼운 수녀복에 가려져 있던 웅장한 신성력 주머니가 잠시 부각되어 시청자들이 난리가 나고 나조차도 잠시 시선을 빼앗겼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해독제를 준비해가는 게 당연할 텐데, 그조차 막아 세운 걸 보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질문은 눈치껏 파티의 리더인 한세아가 던져야 하는데 얘는 왜 자기 시청자들이랑 같이 아이린의 몸매에 시선 강탈을 당했을까.

 “상대가 언데드라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네. 어째서 생명체도 아닌 마왕의 피조물들이 언데드가 되었는지, 아니면 그것들이 언데드의 탈을 쓴 건지는 몰라도… 여신님을 모시는 사람으로선 가만히 있을 수가 없네요. 불경한 장소에 있는 저주받은 것들은 마땅히 정화되어야 해요.”

아이린의 목소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단호하고 냉철한 목소리. 시청자들을 상대로 숙소에서 가벼운 옷차림이 된 아이린의 대단함을 가지고 시청자들을 약 올리는 한세아조차 깜짝 놀랄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였다.

으음, 아무래도 난이도가 올라간 31층부터의 스테이지에 우리 예비 성녀님의 캐릭터 퀘스트가 있을 것 같은데. 그레이스, 케이티에 이은 아이린이면 3★-4★-5★ 순서도 딱 맞네.

31층이 악어떼 대신 좀비 떼가 나오는 죽음의 늪지로 변한 덕에 까먹고 있던 나의 능력 하나가 떠올랐다. 홀로그램이 준 퀘스트 보상 덕분에 마나의 일부가 신성력으로 변화되었다는 것.

동굴의 고블린 무리 따위를 상대로 실험을 해 봤을 땐 별거 없었다. 마력을 통한 강화가 반사뎀에 특화되어 있다면 신성력을 통한 강화는 받피감에 특화된 것 같다는 느낌 정도? 하지만 이런 열악한 환경에 오게 되니 한 가지를 추가로 알게 되었다.

마나 대신 신성력으로 육체를 강화하면, 저런 미약한 필드 디버프 따위가 내 육체를 침범하지 못한다는 것.

 “롤랑, 괜찮아요?”

 “나야 튼튼하니까. 너희들은 실수로라도 밟지 않도록 조심해.”

그러므로 31층에 다시 돌아와 앞으로 나아갈 때, 나 홀로 보라색 독 웅덩이를 찰박찰박 밟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건 꽤 즐거운 기분이었다. 비 오는 날 장화를 신고 빗물 웅덩이를 밟는 어린아이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미약한 독성을 띠고 있다 해도 기본형 스킨 갑옷이 부식될 정도는 아니고, 갑옷 너머로 스멀스멀 새어 들어오는 독성 디버프는 신성력이 지져버리듯 막아내는 상황. 찝찝하다는 듯 필사적으로 메마른 땅 위에 서 있는 일행들과는 전혀 다른 모양새였다.

마력으로 갑옷을 코팅하듯 강화할 수 있는 나와 달리, 그녀들은 이런 웅덩이를 밟으면 푹 젖어버리니 어쩔 수 없지.

 “일단 채집할 수 있는 건 전부 채집했으니까, 위로 올라가는 통로를 찾으며 몬스터를 확인해 보자.”

 “그런데, 지형이 이렇게 바뀌었으면 텐트를 칠 곳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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