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으로 물든 물웅덩이, 생명력이 느껴지는 울창한 숲이라기보단 귀신이 들린 것 같은 잿빛 나무들, 덩굴이나 뿌리가 아니라 촉수처럼 끈적한 진흙탕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까지.
“이게, 대체 무슨…?”
“이, 이봐! 멍하니 서 있지 말고 내려가!”
그렇게 통로 주변을 둘러보며 멍하니 서 있자 저 멀리서 들려오는 절박한 외침. 자연스럽게 일행들의 시선도 한세아의 카메라도 그쪽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딱 봐도 전위로 보이는 덩치 큰 남자 둘이 옆구리에 체구가 작은 여자와 청년을 끼고 열심히 달려오고 있었다. 보라색 독 웅덩이 사이로 나 있는 좁은 흙길 위를 자연스럽게 달리는 걸 보니 상급 모험가는 맞나보네.
“어, 어쩌지 롤랑?”
“일단 비켜줄 자리가 없으니 다시 통로를 사용해 30층으로 내려가자.”
“알겠어!”
열심히 달려오는 모습을 자세히 보니, 옆구리에 껴 있는 여자와 청년의 얼굴이 푸르스름하게 물든 게 보인다. 보라색이라 자연스럽게 독 웅덩이라 생각했는데 진짜 독이 맞나보네.
뒤로 자연스럽게 물러나 통로로 진입하자 역겨운 냄새 가득한 늪지대의 공기 대신 다시 퀴퀴한 동굴의 공기가 코끝을 찌른다.
달려오던 덩치 큰 남자를 생각해 통로의 옆으로 슬쩍 비켜나니 잠시 뒤 헐레벌떡 뛰어온 모험가들이 통로 안쪽에서 툭 튀어나온다. 독에 중독된 청년과 여자는 둘째치고, 이 두 사람도 갑옷 여기저기가 부식되어 있는 등 상태가 좋질 않네.
“이봐, 31층이 왜 저렇게 변한 거야?”
“그건, 후우, 나도 모르지. 그보다 일행에 수녀님이 계신 것 같은데, 정화를 부탁해도 될까? …당연히 사례는 할 생각이야.”
마법사도 사제도 없는, 탱커와 검사와 궁수와 도적 4인 파티인가. 딱 봐도 늪지대의 독을 해독할 능력이 없는 구성이긴 하네. 덩치 큰 남자의 말에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서는 아이린. 슬쩍 일행들에게 시선을 보내는 그녀에게 모두가 고개를 끄덕여준다.
여신을 위한 사명감 때문에 탑에 오르는 게 사제와 수녀들이니 모르는 사람이라도 치료를 해 주는 게 당연하니까.
“네, 여러분께 여신의 자애가 함께하기를.”
작게 읊조리는 아이린의 목소리와 함께 반짝거리는 신성력이 마치 별 무리처럼 내려앉는다. 그와 동시에 푸르스름하게 질린 얼굴에 붉은 기운이 돌아오며 길고 깊은숨을 내뱉는 두 환자.
회복 능력이 미약하고 버프 능력이 없는 대신, 정화와 보호에 특화된 예비 성녀다운 실력이었다. 누군가 목을 조르기라도 하는 듯 쌕쌕거리며 힘겨운 호흡을 이어가던 두 사람이 곧바로 숙면에 빠져들 듯 편안해졌으니까.
어둑한 동굴에 내려앉는 아름다운 신성력의 향연에 모두가 온기를 만끽하듯 잠시 침묵이 흐른다. 은은하게 빛나던 신성력이 갈무리되어 아이린이 손을 거둘 때까지.
“31층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을 해 줬으면 하는데.”
“그래, 은인들에게 그 정도 정보쯤이야. 그런데 우리도 30층에 새로 생긴 게이트를 타고 올라와서 처음 겪은 현상이라 정확히 아는 건 없어.”
“경험담이면 충분하다.”
검사로 보이는 비교적 갑옷이 가벼운 남자가 기절한 두 사람을 챙기는 동안, 부식된 중장갑을 입은 덩치 큰 남자가 돌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한다.
“우리도 처음 31층에 발을 내디뎠을 때 너희처럼 깜짝 놀랐어. 생명력이 가득한 원시림은 온데간데없고 무슨 저주받은 숲 같은 게 나타났으니까. 어릴 적 들었던 사악한 마녀가 사는 숲이 아닌가 의심을 할 정도였지.”
이야기꾼의 자질이 있는지, 아니면 그냥 수다쟁이인지 뭔가 미사여구를 잔뜩 덧붙여 말하기 시작하는 탱커. 그래도 그의 이야기를 듣자 31층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파악할 수 있었다.
일단, 발목까지 잠기는 물웅덩이는 미약한 독성을 띤 보라색 웅덩이로 변했다. 피부에 닿자마자 중독이 되는 수준은 아니지만 오래 접촉하면 피부가 가려워지고 몸 상태가 나빠지는 게 느껴지는 정도.
끈적한 타르 늪은 마비 독이라도 포함되었는지 실수로 밟으면 온몸이 마비되어 뻣뻣하게 굳은 채 가라앉아 익사하게 되고, 몬스터들은 대부분 독기에 당했는지 언데드화 되었다고 한다. 좀비가 된 이끼악어와 뼈만 남은 리저드맨 따위의 몬스터들이 독 웅덩이 안에서 사람을 습격한다고.
“그래서 말인데, 덩굴뱀이 뱉은 부식 독에 무기를 잃었거든. 바깥으로 나가는 30층 게이트까지의 호위를 의뢰하고 싶다. 지금 지급할 수 없으니 게이트 밖으로 나가면 보고도 할 겸 같이 길드로 가자고.”
“…어쩔까, 한나.”
“어, 나? 으음… 해독제 같은 걸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일단 같이 나가는 게 좋겠어.”
-빛나는 활약(포션정수기)
-짐꾼에 조명에 미니맵에 포션셔틀까지? 이게 랭킹 1위의 위엄이지
-마법사(조명) 연금술사(자판기) 플레이어(짐꾼) 기능을 알뜰살뜰하게 챙겼네
-포브스 선정 따까리에 제일 잘 어울리는 플레이어 1위
-걍 아이린 마망 믿고 몸으로 뚫어도 되지 않냐
일단 한세아의 말에는 태클을 걸고 보는 시청자들도 꽤 있었지만, 시청자 대부분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상황. 누가 봐도 맹독지대인 보라색 물웅덩이는 해독제가 필요할 것이라는 건 게이머라면 부정할 수 없는 풍경이었으니까.
거기에 곤란에 처한 사람을 무시할 수 없는 우리 예비 성녀님도 걱정이 가득한 눈빛을 보내오고 있었으니 애초부터 대답은 정해져 있던 것과 마찬가지. 그렇게 한세아의 첫 31층 모험은 2분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
여궁수를 업은 탱커, 남도적을 업은 검사. 31층의 대격변에 당한 동업자들을 호위하며 길드로 향하자 그곳에는 주둥이가 오리 주둥이처럼 댓 발 나와 있는 레베카가 있었다.
“뭐야, 레베카. 안 올라갔어?”
“이 씨발, 31층 봤냐? 보급 마차 또 막혔어. 마차 끌던 말이 다 중독돼서 뒤졌다고.”
아무래도 담뱃잎을 챙긴 김에 보급 물자의 마차에 올라타서 편하게 가려 했지만 31층의 대격변에 당한 모양. 하기야 마른 길이 너무 좁은 관계로 얕은 물웅덩이를 파악해 진창을 이동하는 방식이었는데, 독 웅덩이로 변한 장소에 발굽을 담그고 있으면 말이 중독될 수밖에.
안절부절못하는 접수원 아가씨 앞에서 파이프로 담배를 뻑뻑 피워대던 레베카가 테이블을 껑충 뛰어넘어 내 곁에 착 달라붙는다. 할 말이 있다는 듯 어깨동무를 하며 귓가에 속삭이는 그녀.
“그런데 말야….”
“음?”
“저 은발 머리는 누구냐? 우리 앤 어디 가고.”
“……진지하게 물어보는 거야?”
“뭔데, 시발아. 그럼 농담으로 물어보겠냐.”
에르트타에서 모험가의 도시로 오는 동안 케이티와 마주 앉은 상태로 멀뚱히 바라보길래, 사실 레베카는 용병단의 대장으로서 속사정을 알고 있나 보다- 싶었는데. 그냥 전투의 열기가 식으면서 주변에 관심이 없는 거였나.
흥분하면 눈앞에 있는 걸 전부 때려 부수고, 흥분이 식으면 주변에 관심도 가지지 않는 게 사람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행동거지 아닌가. 그 모습이 웃겨 그녀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쟤가 케이든이야. 정확히는 쟤가 남장한 모습이 케이든, 남장을 풀면 케이티.”
“뭐어?!”
내 말에 제자리에서 어깨가 펄쩍 뛸 정도로 화들짝 놀란 레베카. 한세아가 중독된 모험가 파티원의 치료비와 호위 임무에 대한 대가를 정산받는 동안 테이블에서 말없이 기다리던 케이티가 화들짝 놀라 이쪽을 쳐다볼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였다.
주변 모험가들의 시선이 집중되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또 테이블을 풀쩍 뛰어넘어 이번에는 케이티의 옆으로 향한 레베카.
“니가 케이든이냐?”
“예? 어, …응.”
용병단 막내로서의 태도와 북부 대공의 딸로서의 태도 중 고민을 하던 케이티가 반말로 대답을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휘감더니 위협적으로 왁! 소리를 지르는 그녀의 모습에 케이티의 어깨가 움츠러든다.
“근데 왜 인사를 안 해, 이 새꺄!”
“어, 어어…?”
“이 새끼, 내가 소개해준 롤랑 파티에 들어갔다고 이젠 아는 척도 안 해? 이젠 용병도 아니다, 이거지?”
“그건 아닌데요….”
뭔가 핀트가 어긋난 몰아붙임에 우리 북부 잼민이가 도움을 요청하듯 나를 바라보지만, 나로서도 딱히 해 줄 말이 없었다. 알고 지내던 사이인데 변장 풀었다고 모르는 척 한 게 아니꼽다는 데 내가 뭐라고 도와줄 수 있겠는가?
교복만 입혀두면 고등학생 삥 뜯는 불량한 대학생 언니처럼 보이는 장면에 시청자들의 채팅이 어지럽게 올라온다. 한세아 얘는 그 와중에 카메라는 일행들 쪽에 붙여놓고 갔구나.
웬일로 테이블마다 사람이 잔뜩 앉아 있는 길드의 로비. 평소엔 얼굴 보기 힘든 상급, 최상급 모험가들이 또다시 길드에 잔뜩 모여서 왁자지껄 떠들자 상대적으로 짬이 덜 찬 접수원들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다.
왕고 언니 엘리스는 귀찮은 일을 피해 자연스럽게 우리 테이블에 다가왔지만, 다른 접수원들은 테이블에 앉아 정보를 요구하며 시끄럽게 구는 상급 모험가들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다. 목숨이 걸린 일이긴 하지만, 하는 꼴이 식당에서 술에 취한 진상 손님들 같네.
“이봐! 마탑과 길드 간에 이야기한 게 없나?”
“이번 보급은 어쩔 생각이야?”
“30층에서 조사하고 있던 마법사들을 올려보낸다는 이야기는 없었나?”
“마탑이나 연금 공방 거리에 해독용 마도구가 있던가?”
짬이 좀 찬 접수원들은 능숙하게 모험가들을 어르고 달래서 잘 모르는 질문은 회피하고, 아는 건 대답해주며 거의 조련하듯 사람을 대했지만 그건 경험이 많고 능숙한 접수원들 이야기.
대부분의 접수원들은 그 고운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상태로 그저 모험가들에게 시달리고 있을 뿐이다.
모험가들의 태도도 이해가 가는 게, 평생 밥줄이어야 하는 탑의 31층에 갑자기 대격변이 일어난 상황. 끓이면 마실 수도 있던 깨끗한 물웅덩이가 보라색 독 웅덩이로 변했으니 당황스러운 건 당연하다.
-길드가 개판이 나 있네
-스토리 분기점 같은 건가? 탑이 확 변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