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카가 스킬 때문에 꼴렸다고 일행들 앞에서 나를 숲속으로 납치해 간 기억이 명확히 남아 있을 테니, 대화가 통할 상대가 아니라는 걸 다들 알고 있는 모양새였다. 화나면 달려들고, 꼴리면 덮치는 짐승 같은 게 레베카니 그녀들의 대응이 정확하다고 봐야겠지.
“아으 씨, 쫓아가긴 귀찮은데 잘 됐다. 뒷정리는 니가 좀 해주라.”
“아니, 뭔 상황이냐고 대체.”
“뭔 상황이긴, 씨발. 내 단골집에서 신상 담배가 나왔다길래 부하 한 놈 보냈더니 오크한테 잡혀갔다는 개소리 듣고 달려온 거지. 시발, 어처구니가 없어서 진짜. 어디서 맹수 밥이 된 것도 아니고 오크한테 납치를 당해?”
“그, 헤헤… 아, 안녕하십니까?”
“시발놈아, 니가 설명하고 쟤 도와서 뒷정리해.”
“제, 제가요?”
“그럼 내가 하라고? 똥 닦아 주는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밥도 차려달라고? 진짜 면상이 오크가 될 때까지 처맞고 싶냐?”
“아님다!”
레베카가 대답 대신 내민 것은 목덜미를 우악스럽게 붙잡힌 채 헤헤- 웃고 있는 유약한 인상의 남성. 육체파가 아니라 두뇌파라는 걸 증명하듯 비쩍 마른 몸과 얼굴에 달랑달랑 걸쳐진 안경이 인상적이다. 아무래도 레베카의 용병단에서 회계와 보급 따위를 담당하는 모양.
보급을 담당하는 비전투 인원이 레베카의 잔심부름을 위해 에르트타로 향했다가 그대로 오크에게 납치당한 모양이네. 확실히, 레베카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을 법하다.
머릿수가 백 단위인 레베카 용병단에서 고작 담뱃잎 사러 갔다가 오크에게 납치를 당했다는 사람이 나오다니. 대장인 레베카와 그녀의 파티 대부분은 상급 모험가고, 용병들 대다수도 중급의 경지에 도달한 강력한 무력 집단인데.
“제가 혼자 나오긴 했지만, 연락 수단은 가지고 나왔거든요. 헤헤, 오크 놈들도 산적 놈들도 멍청해서 배지처럼 생긴 마도구를 못 알아본 덕에 바로 연락을 했죠.”
“그래서, 저 사람들은 뭐고?”
“저 모험가들이요? 그 뭐냐, 저처럼 납치당해서 끌려왔는데 레베카 님이 오실 즈음 갑자기 밧줄을 풀고 난동을 피우더라고요. 아무래도 때맞춰 상급의 경지에 오른 것 같아요. 위기가 기회가 되었다고 봐야겠죠?”
은근히 수다쟁이인 용병 대원의 말을 정리하자면 사건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황무지를 거점 삼아 자연산 오크를 ‘감염’ 시킨 오크 우두머리. 녀석은 무언가를 위해 서쪽 인근의 시민들을 무작정 납치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대규모 상단이나 용병단 등 무력 집단은 철저히 무시한 채 마을 주민들과 소규모 행상인 무리만 집요하게 노리는 방식으로.
자연산 오크를 마석 오크로 감염시킨다 해도 머릿수는 부족하니, 아무래도 전투력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 같다- 라며 용병 대원이 종알거린다.
하지만 놈이 미처 계산하지 못한 것은 그 ‘만만한 소규모 인원’ 사이에 이 수다쟁이 용병이 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서쪽 황무지에서 모험가의 도시까지 직통으로 연락이 가능한 고급 마도구의 존재였다.
새 담뱃잎을 레베카에게 전해야 하는 임무 때문에 레베카 직통 연락처를 가지고 있던 용병이 ‘제가 오크한테 납치를 당했는데요….’ 라는 보고를 했다가 살면서 들을 욕을 하루 만에 전부 몰아서 듣는 동안, 릴리의 파티원들 또한 오크에게 납치를 당했다.
“게릭? 리처드? 아니, 오크를 피해서 서쪽으로 간 줄 알았는데 진짜 잡혀 있었어?”
“아냐! 패배해서 잡힌 게 아니라 주민들을 위해 잡혀 준 거라고!”
“무슨 소리야?”
“오크 새끼들이 인질극을 벌였다니까? 우리 머릿수가 적어서 덤벼들었다가, 상황이 불리해지니까 어린애 목에 칼을 대고 위협을 했다고!”
중급 모험가지만, 동행하던 화전민 가족이 인질이 되었기 때문에.
그 뒤로는 우리가 본 광경이 이어진다. 술 보급이 오크에 털린 지 반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취미인 담뱃잎을 사러 간 쫄따구가 오크한테 담뱃잎과 함께 납치를 당해 서쪽 황무지로 끌려갔단다.
참을 인 세 번은커녕 첫 글자의 한 획에서 인내심이 닳아 없어지는 것이 광전사 레베카. 탑에 들어가기 전 기쁜 마음으로 담배 보급을 기다리던 그녀는 눈이 뒤집힌 채 서쪽으로 달렸다.
오크가 사람을 납치했다든가, 황야의 강도들에게 식량과 여자를 주는 대신 일꾼으로 부려 먹는다든가, 탑 안의 오크가 탑 밖의 오크를 마력으로 감염시킨다든가 하는 사소한 일 따위는 뒤집힌 눈알에 들어올 리 없지.
짓밟고, 때리고, 부순다.
오크 우두머리가 도망치든 말든 그녀를 화나게 한 오크의 주거지를 박살 내는 데 전력을 다한 레베카. 그 소란 사이에 게릭, 리처드, 에이린이라 불린 릴리 뎁의 세 동료가 밧줄을 풀어내고 도망치려던 오크와 맞서 싸운 결과―
오크가 불쌍하게 느껴지는 타이밍에, 세 사람이 나란히 레벨 업을 해버린다. 그러니까 중급의 끝자락에서 상급의 문턱을 넘어버렸다고.
“오러? 너, 상급의 경지에 올랐구나!”
“나만 오른 게 아니야! 이제 우리 모두 상급 모험가라고!”
43층의 최상급 모험가 하나가 스킬로 인한 광란 상태에 돌입해 천막과 물자를 잘근잘근 짓밟기 시작하고, 갑자기 마력을 각성한 상급 모험가 파티가 호흡을 맞춰 오크를 사냥하기 시작한다.
[황무지선술집우유도둑한세아님 10,000원 기부!]
내가 오크였으면 게임 좆같이 한다고 극찬하고 인생 접었다
“만원 도네,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그 똑똑한 오크가 경험치 99%인 모험가 세 명 납치했다가 내부부터 터졌다는 거네? 이거 내가 퀘스트 안 받았어도 알아서 처리될 문제였냐, 설마?”
-그래도 롤랑 옆구리에 끼워진 채 값진 경험을 해 봤으니까
-연계 퀘스트 보상 = 롤랑의 짐이 되는 경험
-거치형 조명에서 휴대형 조명으로 진화했으니까 보상은 받은게 아닐까?
-Quiero un robot grande y maravilloso.
-수상할 정도로 오크와 엮이는 빨간머리눈나헤으응
그런 난장판 속에서 오크가 아무리 똑똑해봐야 뭘 어쩌겠는가. 하수인으로 부려 먹던 인간들을 미끼로 던지고 도망칠 수밖에.
버려진 하수인들은 제 살길 찾아 흩어지거나 포로들을 인질로 삼고, 릴리의 파티원들은 사람을 구하겠다고 오크를 쫓아가지도 못 하고, 레베카야 애초부터 건물 부수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있었으니.
“어쩔까, 롤랑. 저것도 따라가야 하나?”
“아뇨, 언니. 이후의 일은 기사단에 맡기는 게 어떨까요? 여기 사람들도 꽤 많은데 일단 저희는 도시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기사단? 으음, 그렇네. 애초에 치안 유지는 서쪽의 귀족들이 할 일이긴 하지.”
그렇게 연계 퀘스트는 어처구니없이 끝을 맞이한다.
[서쪽의 황무지에는 오크들을 규합한 특이 개체가 있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녀석은 탑 바깥의 오크를 이상한 마력으로 오염시켰다고 한다]
[탑 바깥의 생명체를 탑 내부의 몬스터처럼 변이시키는 능력이라니, 이건 대체…?]
풀리지 않은 떡밥만 던져준 채.
“어, 일단 퀘스트는 완료된 걸로 나오네. 근데 텍스트가 연계 퀘스트 2탄이 나올 것처럼 적혀있다. 누가 봐도 후속편 암시하는 쿠키 영상처럼 생겨먹었네.”
※
한세아의 퀘스트는 떡밥을 남긴 채 끝을 맞이했으며 릴리 또한 상급 모험가의 문턱에 발을 디딘 일행들과 함께 우리 파티에서 떠나갔다.
“어, 롤랑이냐! 네가 무슨 일로 이 비싼 마력 통신까지 써서 우리한테 먼저 연락을 했냐?”
“오베르뉴 숲에 있던 오크들, 찾았다.”
“…뭐?”
이야기를 나눈 결과 강간당한 여자들과 붙잡혀 있던 남자들을 차마 내버려 둘 수 없어 오크의 추적보다는 사람들을 돕는 방향으로 결정이 났지만, 나는 위험한 불씨를 내버려 둘 마음이 없었다.
우리 파티가 탑으로 돌아가 여신님 말씀대로 다시 31층을 공략하기 시작한다 해도, 저 불길한 오크 놈은 잡아 죽여야지.
워낙 정신이 없는 상황이라 어영부영 넘어갔지만, 마력으로 몬스터를 감염시켜 생명체에서 마석 기반으로 변이시킨다니? 딱 봐도 대형 사고를 칠 것 같은 불길한 능력 아닌가. 저런 게 서북쪽 황무지 깊숙한 곳으로 도망쳤다고 방치를 할 순 없지.
“탑에서 오베르뉴 숲으로 도망친 오크가, 지금 서북쪽 황무지에서 사람들 납치하고 다녔어. 근데 이 새끼들이 특이하게도 사람을 인질로 사용할 줄 알아.”
“…우리 쪽 막내를 납치했던 것처럼?”
“그래. 우리는 잡혀 있던 사람들 때문에 복귀할 것 같은데, 저 오크 놈들이 다시 튀어나와서 또 사람 납치하면 어디서 나온 놈인지 조사 들어갈지도 몰라.”
그리고 왕국의 마법사들이 철저하게 조사를 시작한다면 놈들이 죽어서 마석으로 변한다는 걸 알게 되고, 서쪽으로 오기 전 오베르뉴 숲에서 나왔다는 걸 알게 되겠지. 그러니 이것은 일종의 협박이었다.
지금 너희가 뒷수습 안 하면, 좆 되는 건 모험가가 아니라 기사단이라고.
“……알려줘서 고맙다, 롤랑. 나중에 술 살 테니 수도로 와라.”
에르트타에서 잠시 일행들과 헤어져 제임스 설리반과 마력 통신을 한 다음 날. 갑작스럽게 왕실 기사단이 서쪽 황무지의 몬스터 토벌을 위해 출정식을 열었다는 상인들의 숙덕거림이 들려온다.
이쯤 되면 마왕의 하수인이고 나발이고 알아서 처리하겠지.
풀리지 않는 떡밥과 보상도 명확하지 않고 중간에 갱신 없이 끊겨버린 연계 퀘스트 대신 탑 등반을 위해 모험가의 도시로 돌아온 한세아. 방송인으로서도, 진도 1위 게이머로서도 서브 퀘스트에 집착하며 황무지를 싸돌아다니는 대신 탑 등반을 선택한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시청자들은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짠해좌의 탈을 쓴 내가 지적한 것처럼 어차피 현실성 넘치는 판타지 세상이라면 탑 바깥의 일은 왕국 기사단이 처리해야 할 것 아닌가.
시청자들이 원하는 건 드넓은 판타지 세상을 구경하는 간접 체험이 아니라 자신들이 오르지 못한 탑의 고층에 대한 정보들이었다. 평균적으로 10층을 이제 겨우 넘어섰는데 한세아는 31층에 진입을 할 준비를 하고 있으니 후발주자로서 기대할 수밖에.
“뭐야, 벌써 31층이야? 그리고 30층 게이트도 너희가 뚫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