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5화 (155/175)

 “그러고 보니 일행분 이야기는 듣지도 못했는데, 어떤 분들이신가요?”

 “세 명이고, 셋 다 중급 모험가야. 여자가 하나에 남자 둘. 그러니까 우리 파티는 남자 여자 반반인 파티였지.”

지루한 도보 이동을 잊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함인지 주저 없이 입을 여는 릴리. 그녀의 이야기에 종알거리며 걷고 있던 일행들도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릴리는 나와 같은 상급 모험가, 거기에 행상인처럼 서쪽을 돌아다니기도 하며 용병을 겸업하고 있는 사람이다. 경험이 부족한 일행들이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이야기.

 “원래는 다 같은 중급 모험가였는데 말이지, 롤랑과 함께한 임무에서 약간의 깨달음을 얻어 내가 먼저 상급 모험가가 되었지. 그래도 우리 일행들도 끝자락에 섰으니 얼마 안 있어 나와 같은 경지에 올라올 거야.”

 “그런 분들이… 아, 죄송해요.”

 “아냐, 괜찮아. 용병도 모험가도 그런 직업이니까. 뭐, 녀석들의 실력이라면 오크에게 당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어. 입 발린 말이 아니라, 정말 오크를 무찌르고 서쪽으로 가서는 돈 문제가 생겨 급하게 의뢰를 처리하고 있을 수 있거든.”

 “그런 적이 있으셨나요?”

 “예전에 대형종 사냥을 보조하러 갔다가 흩어진 적 있거든. 그때 돈주머니도 식량도 잃어버린 채 무기와 모험가 패만 남아서, 밑바닥 나무패 용병이 된 것처럼 급하게 의뢰를 처리하고 돈을 벌어서 연락한 적이 있어.”

마력을 육체 밖으로 끄집어내기 직전의, 중급 끝자락에 선 경지. 게임식으로 말하자면 X9 레벨 성장 제한의 턱에 막힌 게 릴리의 동료들인가보다. 그래서 그런지 고작 스무 마리 남짓의 오크에게 당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더욱 크게 보는 듯한 그녀.

그래서 그런지 분위기가 우중충하게 가라앉는 일은 없었다. 하기야 오크 기병과 산적 따위가 놈들의 전부라면 희망적이긴 하네. 오크에게 붙잡혀 인간에게 험한 꼴을 당했을 확률보다는 짐을 버리고 도망쳤을 확률이 더 높으니까.

피해자라고 볼 수 있는 릴리의 분위기가 그다지 어둡지 않아서 그런지 일행들 또한 희망찬 쪽으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마을 주민에게는 고블린도 아니고 오크라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지만, 중급 이상의 모험가에겐 고작 오크일 뿐이니까.

연락이 끊긴 일행들과 오크들의 특이 행동에 불안감을 느끼던 릴리지만, 손쉽게 처리되는 늑대 기병과 산적을 부려먹어야 하는 적은 머릿수에 안심이 좀 되는 모양이다.

 “그레이스, 어때? 늑대의 흔적은 찾을 만해?”

 “바람이 강하게 불어서 조금 옅어졌지만, 다행히 흔적이 드문드문 보여. 잡혀 있던 사람들 말로는 이틀 전 밤에 몇몇 사람들이 끌려갔다는데 그 흔적인 것 같아.”

적의 전력이 생각보다 약하고, 어디로 향했는지 흔적도 적나라하게 남아 있는 상황. 그래도 드넓은 황야에 해가 지고 달이 떠올랐으니 컨디션 관리를 위해 자리를 잡고 천막을 쳤다.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황야인지라 그냥 멈춰 서서 천막을 펴면 그곳이 야영지지.

딱히 이리저리 움직인 흔적도 없이 한 방향으로 주욱 달려간 늑대의 흔적을 따라 진행하다, 바람을 막아줄 바윗덩어리 옆에 천막을 치고 달을 올려다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요리를 할 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거든. 힘으로 우악스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 대부분은 내가 나설 수 있지만, 요리나 천막 설치 등의 일에서는 일행들이 내가 나설 건덕지를 주지 않는다.

나를 못 미더워한다기보단, 이런 일이라도 자신들이 맡겠다는 의지 표현이라 해야 하나. 산적을 심문하는 등 더러운 일은 자연스럽게 내가 하니 그녀들 또한 나를 배려하고 있다고 봐야겠지.

 “으음, 고소한 냄새. 평소보다 냄새가 더 좋은데?”

 “여관 아주머니가 주신 모험가용 보존식을 넣어봤어요. 대충 만든 보존식이 아니라 정말 질 좋은 곡물을 구웠나 봐요.”

해가 지고 어둑해진 황무지에 고소한 냄새가 풍긴다. 어째 스튜 아니면 수프만 먹는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지. 냄비에 물 넣고 끓여서 묽으면 수프, 걸쭉하면 스튜니까. 단단한 빵이나 차가운 육포를 씹는 것보단 뜨끈한 국물이 배를 채우는 게 훨씬 낫지 않겠는가.

커다란 냄비에 보존식 비스킷을 박살 낸 가루와 버터를 볶다 마법으로 만든 물을 채워 넣고, 잘게 부순 곡물 보존식을 푼 뒤 육포 따위를 넣어 푹 끓인다.

요리하는 장면만 보면 이보다 단순할 수 없는데 결과물을 맛보면 입안 가득 고소하면서도 달달한 곡물의 맛이 한가득 퍼지다 비어 있는 배를 뜨끈하게 채워주니 절로 아이린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들 뿐.

 “불침번을 서야겠죠? 오크 무리가 어디에 있을지 모르니.”

 “불침번은 내가 설 테니 너희들은 푹 자도록 해.”

 “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스튜로 배를 채우다 나온 독박 불침번 이야기에 화들짝 놀라는 일행들. 릴리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나머지 일행들은 걱정스럽거나 의아해하며 나를 바라본다.

애초에 불침번은 교육을 위해 탑 안에서 서게 한 거지, 상급 모험가쯤 되는 초인이면 며칠 내내 밤을 새워도 멀쩡하다는 걸 모르는 모양새. 그래도 황무지를 걸어야 하니 푹 자라고 등을 떠밀자 다들 자신의 천막 안으로 쏙 들어간다.

있는 거라곤 늑대와 오크의 발자국밖에 없는 황무지에도 평등하게 해는 떠오른다. 늑대들이 우리의 냄새를 맡거나, 오크들이 황무지에 피어오른 모닥불의 불빛을 발견해 쳐들어오는 일 따위 없이 평온하게 맞이한 아침.

특이 사항이라곤 야밤에 한세아가 게임을 종료하고 다시 접속해 방송 시간을 맞췄다는 점뿐이었다.

 “이제 곧 놈들의 본거지가 보일 거야.”

 “어떻게 알아요, 언니?”

 “흔적이 여러 겹 겹치는 게 보여. 아무래도 여러 곳에서 납치해 온 사람을 모으는 곳이 있나 봐.”

그레이스의 말을 믿고 몇 시간 뒤엔 스토리가 진행될 거로 생각한 모양. 아직은 시작되지 않은 방송 창을 보며 몰래 홀로그램 창을 건드렸다.

―한세아 퀘스트 깨는 거 보면 마음이 짠해

마탑 지원 생각 안 할 때부터 성장한 게 없어 보여서 슬퍼…

기사단이 치안을 유지한다는 걸 분명 퀘스트 깨면서 봤는데

파티원만 구하고 빠질 생각 없이 오크를 전부 찾을 기세라 더 슬퍼…

슬슬 황야와 오크에게 지루함을 느끼는 시청자들을 달래줄 겸, 한세아의 방송 방향을 정해 줄 짤막한 글을 작성하기 위해.

우리가 여신의 이름으로 마왕을 무찌르기 위해 탑을 오른다지만 세상의 평화까지 일일이 지켜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릴리의 동료를 확인하고 찾는다면 나머지는 기사단이 알아서 할 일이지.

왕실 기사단의 이름으로 축복받은 숲을 보호하고 있는데, 그 숲에서 기사단의 눈을 피해 뛰쳐나온 오크들이 왕국의 상인들을 약탈하고 있다니? 기사단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만한 사건이다.

 “아 씨, 뭐야아…. 그런가? 롤랑한테 부탁해서 기사단을 움직여야 하나…? 슬슬 시청자들도 지루해하는 것 같던데.”

 ‘뭐야, 벌써 봤어?’

어제 먹다 남은 수프를 데워 간단히 배를 채운 뒤 다시 걷기 시작한 일행들 가운데서 한세아의 중얼거림이 작게 들려온다. 게임 바깥의 이야기인지라 NPC인 일행들이 듣지는 못한 모양이지만 내 귀에는 똑똑히 들리는 그녀의 혼잣말.

아무래도 짠해좌의 조언이 도움이 많이 되다 보니, ‘짠해’ 따위를 알람으로 맞춰 둔 모양. 그레이스의 곁에서 앞장서 걸으며 몰래 작성한 글에 3분도 되지 않아 반응을 한 걸 봐선 우연히 발견한 건 아닌 것 같았다.

 “롤랑, 저 앞에!”

 “무슨 일, 이, …야?”

그렇게 발견하게 된 오크들의 본거지.

아니, 본거지였던 것.

 “……저거, 레베카 양 아닌가요?”

대형종의 가죽으로 만든 크고 넓은 천막이 종잇장처럼 짓밟혀 박살 나고, 흙먼지가 가득한 바닥에는 마석이 굴러다닌다. 저 멀리 이곳으로부터 멀어지는 먼지구름을 보니 똑똑한 개체는 도망이라도 치고 있는 건가.

폐허가 되어버린 오크 본거지에서 종말을 목도한 사람처럼 인질이었던 사람들이 웅크린 채 오줌까지 질질 지리며 잔해 사이에 숨어 있었다.

그런 참상을 만들어 낸 것은 네 사람.

방패를 든 남자, 지팡이를 든 여자, 활을 든 남자.

 ‘레베카에게 붙은 별은 무슨 불행의 별이라도 되나? 아니면 오크랑 시비가 붙는 별?’

그리고 레베카.

아무래도 그녀의 용병단이 또 오크에게 털린 모양이었다.

게임식으로 따지자면, 레베카는 릴리 뎁의 상위 호환이었다.

아무 무기나 사용하는 광전사와 냉철한 이성을 유지하며 정교하게 창을 다루는 창술사를 비교한다는 뜻이 아니라 두 사람의 삶의 방식이 유사했기 때문이다.

모험가 의뢰와 용병 의뢰를 번갈아 진행하는 릴리, 모험가로서 활동하며 휘하에 대규모 용병단도 부리고 있는 레베카. 이번 연계 퀘스트에 또 레베카가 엮이게 된 이유 또한 그 용병단 때문이었다.

-연계퀘진행한다면서 왜 레베카눈나가있음?

-납치착정짐승야쓰눈나 헤으응

-대체 방송을 끈 밤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건데

-이번에도롤랑레베카납치착정야외노출야쓰씬이 생략되었다면 유서에 한세아 이름적는다

-방송 켜자마자 황무지 대신 폐허가 있네

 “뭐야, 롤랑이냐?”

 “레베카, 누나가 여기에 왜 있어?”

 “왜 있겠냐?”

아직 화가 덜 풀렸는지 삐죽대는 그녀. 그래도 짐승 같았던 시절이었다면 제 성질을 못 이기고 씩씩대며 난동을 피웠을 텐데, 지금은 지성인답게 대화가 통한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애초에 아군인데 말이 통한다는 점에서 안도감을 느끼는 게 웃기긴 하지만….

가챠 캐릭터로서 별이 붙기 전의 레베카는 짐승녀가 아니라 그냥 짐승이었으니까.

레베카의 얼굴을 확인한 일행들이 말없이 흩어져 붙잡혀 있던 인질들을 구출하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오크와 손을 잡은 산적들은 이미 다 처리되었는지 바닥에 마석과 함께 굴러다니는 시체가 좀 보이네. 자연스럽게 레베카로부터 등을 돌려 사방으로 흩어지는 일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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