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4화 (154/175)

인간의 형체를 겨우 유지하지만, 자세는 유지하지 못하는 반액체 상태의 시체. 동료였던 것이 바닥에 처참하게 널브러지고 나서야 처음으로 입을 여는 내 모습을 보고 산적인지 강도인지 모를 녀석들이 급히 고개를 바닥에 처박는다.

감히 시선도 마주치지는 못하지만, 살고는 싶어 튀어나오는 급박한 외침. 울부짖음이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가 놈들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히, 히이익-!”

 “제가! 제가 이놈들보다 아는 게 많습니다!”

 “이, 개새끼가! 아닙니다! 저, 저놈은 뭣도 모르고 따라만 다닌 놈이에요!”

그렇게 시작되는 네 겹의 설명.

왕국의 서부는 동부보다 척박한 곳이다. 얼음에 뒤덮여 있는 북부보다는 덜 하지만, 서부의 컨셉 자체가 황무지 아니던가. 숲을 불태워 농사를 짓기까지 채집해 먹을 풀뿌리와 나무 열매도 없고, 가끔 입에 기름칠하게 해 줄 사슴 따위의 동물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게 동부에서 가난한 영지민들이 숲을 개간해 화전민이 된다면 서부에서는 대부분 산적과 강도로 돌변하게 되는 것이다. 자그마한 숲에서 살아가는 토끼와 사슴보다, 길목을 지나가는 허술한 행상인 무리가 더 많은 동네니까.

눈앞에 있는 네 명도 마찬가지. 세금을 내지 못해 귀족의 영지에서 탈출했지만 마을을 직접 개간하지도 못했고, 다른 마을에 받아들여지지도 못한 놈들. 그렇다고 굶어 죽을 순 없으니 자연스럽게 강도단이 된 놈들이다.

 “저, 저희가 평소에 사, 사람을 죽인 건 아닙니다! 그냥 행상인의 짐에서 먹을 것만 조금 통행료로 받는 수준이었는데….”

 “마, 맞습니다악! 고작 다섯이서 해, 행상인을 막 노릴 순 없으니까, 귀찮은 일을 피하고자 하는 소수의 상인에게 식량과 동전 몇 개만 받고 보내주는데, 갑자기, 갑자기 오크가 막!”

이어지는 이야기는 조금 뻔한 내용이었다. 상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길은 정해져 있으니 그 인근 지역에 움막 따위를 짓고 노숙을 하며 만만한 상인들에게 통행료만 뜯어내던 놈들에게, 갑자기 수십 마리의 오크가 와서 주민을 납치하듯 산적들도 납치해 온 거지.

차이가 있다면 마을 주민이나 상인들은 꽁꽁 묶인 채 토굴이나 나무 우리에 감금당하고, 산적들은 오크의 하인이 되어 마을의 잡일을 하게 되었다는 점.

으르렁대는 늑대를 씻기고, 밧줄에 묶여 기절한 사람들을 가둬둔 뒤 조악한 음식을 먹여 목숨을 붙여두고, 오크들이 챙겨 온 약탈품을 창고에 정리하고―

 “저어, 롤랑?”

 “무슨 일이야?”

 “그, 잡혀 있던 사람들을 찾았어요. 학대당한 흔적이 좀 있는데, 그레이스가 말하길 오크가 아니라….”

뭐, 잡혀 온 사람에게 스트레스도 풀었겠지.

오크도 사람을 건드리질 않았는데 사람이 사람을 건드렸구나. 말이야 학대라고 돌려 말하지만, 잡혀 온 상인들과 마을 주민들 가운데에 여자가 단 한 명도 없을 리 있나. 그 자애로운 아이린이 분노로 목소리가 떨리는 걸 봐선 안 봐도 뻔하지.

수녀복을 입은 아이린을 보자 화색이 돌다가도,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자 곧바로 다시 대가리를 땅에 박은 놈들. 다혈질 오크 아래에서도 멀쩡히 지낼 만큼 눈치는 빨랐지만, 놈들이 다시 고개를 들 일은 없었다.

내가 나서기도 전에 릴리가 깔끔하게 처리했으니까.

 “더 들을 거, 없지? 네가 손 쓰면 너무 지저분해져.”

 “어쩔 수 있냐, 배운 게 이런 것뿐인데.”

 “배우기 싫어서 안 배운 거 아니고?”

고개를 조아린 자세 그대로, 자신들이 죽었다는 것도 모른 채 머리통 네 개가 데굴 굴러 제 몸뚱어리와 작별을 고한다. 메마른 황무지를 적시는 붉은 피에 고개를 휙 돌린 아이린을 데리고 그녀가 온 곳을 향해 떠난다.

그곳에 있는 건 오늘 잡혀 온 사람들과 이미 잡혀 왔었던 사람들.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던 상인들이 있었고, 다른 마을로 물물교환을 하러 가던 마을 주민이 있었고, 푼돈이라도 벌고자 외진 마을까지 찾아가는 싸구려 나무패 용병들도 있었다.

 “…오크가 그냥 잡아만 두고 있었다고?”

 “예, 나리. 그리고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일정 주기마다 인질 중 몇 명을 서쪽으로 보냈습니다.”

오크에게 별다른 일 당한 적 없이, 그저 묶여 있던 사람들이.

오크들이 전진기지를 만들고 있었다.

 ‘대체 뭐지, 진짜?’

사람을 납치하고, 사람을 이용해서 머릿수를 불리며 조금씩 만들어지는 전진기지. 황무지에서 황무지 바깥으로 천막촌을 만들어 넓은 지역을 장악하고, 부족한 인력은 근처의 산적 따위를 납치해 해결한다. 관리해야 할 구역이 넓어진다 해도 어디서 데려온 건지 모를 늑대를 타고 다니니 상관 없겠지.

먹을 게 없어 산적이 된 인간들은 밥을 주고 납치해 온 여자를 건드려도 상관하지 않는 오크의 밑에서 불만 없이 지냈고, 그들은 자연스럽게 오크의 충실한 수족이 되었다. 기동성은 늑대로, 머릿수는 산적으로 해결하는 오크 답지 않은 똑똑한 방식.

 “이야기 속에 나오는 악마 숭배자도 아니고, 오크 숭배자 따위가 생길 줄이야.”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그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일행들이 한 마디씩 던진다. 여신의 은총이 대지에 가득하고, 축복받은 숲이 왕국 심장부에 떡하니 있으며 간간이 사제들이 신탁도 듣는 세상. 그런 세상에서 인간이 오크를 섬긴다는 게 얼마나 상식에서 벗어난 일인지.

물론 고아가 있고 빈부격차가 있으며 신분제도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이 있지만, 그래도 몬스터 아래에 들어가 복종을 해야 할 세상은 아니었다.

-아니 먼 오크가 이렇게 질겨

-연계 퀘스트인거 봐서 스토리 존나 커질거 같은데

-딱 봐도 오크가 마족소환해서 천족과 마족의 대전쟁시작될듯

-1000년전천족과마족의전쟁이어쩌구여신이저쩌구세상을구해주세요용사님

-아니 탑을 오르라고 꿀잼메카 보다말고 무슨 오크여

 “어허, 일단 퀘스트는 깨야지. 연계 퀘스트인데 오크 잡다 말고 다른 몬스터가 나올 순 없잖아. 오크 연계 퀘스트니까 오크가 나오지, 그리고 연계 퀘스트도 세계 최초라면서 바람잡이 하던 놈들이… 자꾸 그러면 채팅창 부검 들어간다?”

일행들이 심각하게 받아들이든 말든 일단 시청자들은 슬슬 지루함을 느끼는 모양. 하필이면 직전에 본 게 탑승형 골렘이라 그런지 비교가 좀 되는 모양이다. 하긴 나 같아도 신장 6m짜리 로봇에 타서 노는 거랑 돼지 대가리가 사람 납치하는 이야기 중 하나를 고른다면 무조건 로봇을 고를 거야.

그래도 민심은 민심. 게이머로서 연계 퀘스트를 지나칠 수 없다고는 하지만, 방송인으로서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의 의견을 완벽히 무시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일단, 오크도 산적들도 전부 죽였으니 위험한 일은 없을 겁니다. 우리는 서쪽으로 향해야 해서.”

 “무기는 그대로 남아 있으니 챙겨가세요. 서남쪽의 언덕 세 개만 넘으면 마을이 나오니까요.”

그렇게 정해진 강행군 일정. 마음 같아서는 인맥을 통해 토벌대를 데려오고 싶었지만, 아직 릴리의 동료들을 찾을 수 없었으니 마저 뛰어야겠지.

그렇게 인벤토리 안에 천막도 식량도 있으니 이대로 황무지를 향해 가기로 결정되었다.

오크에게 잡혀 있던 포로들이라 해도 대부분 행상인. 다르게 말하자면 이 거친 판타지 세상을 등짐 하나 지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다. 머릿수가 대략 스무 명쯤 되고 손에 칼 한 자루씩 들고 있으면 어중간한 산적들은 건드릴 생각도 못 하겠지.

잡혀 있던 행상인 무리가 천막에 남겨져 있던 물건들을 바리바리 챙기는 대신 여자들과 마을 주민들을 데리고 황무지를 벗어나기 위해 길을 떠나는 걸 보면서, 우리는 다시 황무지 깊숙한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오크와 인간이 손을 잡았다, 아니 오크가 인간을 부리기 시작했다]

[납치당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몇 명은 황무지 깊숙한 곳으로 끌려간 듯하다]

[어째서 사람을 잡아먹지도, 괴롭히지도 않고 멀쩡히 잘 챙겨서 끌고 가는 걸까…?]

또다시 갱신된 한세아의 퀘스트 창을 보면서.

-so, where is mecha bro?

-세아야조뙤써 시차 때문에 니 메카글 지금또 올라갔음

-어어 코쟁이들 몰려온다

-Die Atmosphäre in der Wildnis ist gut, aber ich möchte Roboter sehen.

-번역기 정도는 돌려서 오라고 한세아 0개국어야!!

…음, 짠해좌로 여론몰이라도 좀 도와줘야 하나.

서북쪽 황무지로 더욱 깊숙이 들어갈수록 대지가 점점 황폐해지는 게 눈에 띄게 보인다.

이제 관목과 수풀은 찾아볼 수도 없고 서부 영화에서나 볼 법한 회전초 따위가 발치를 굴러다니며 바람이 불 때마다 흙먼지가 일어나 시야를 가린다. 공기도 메마른 것 같아 입술이 건조해지는 것 같고 예민해진 피부에 와 닿는 감각도 전혀 다르다.

 “말이라도 끌고 올 걸 그랬나?”

 “오크들이 하루면 돌아왔다고 했으니 그닥 멀리 가지는 않았을 거야. 늑대를 타고 오가는 데 반나절이라면, 우리 속도로 하루면 따라잡을 수 있어. …뭐, 그래도 노숙은 해야 하지만.”

한세아는 오크 본거지를 발견하면 다시 방송을 켜겠다며 방송을 종료하고 솔로 플레이를 시작했고, 마법으로 만들어 낸 물방울로 입술을 축이며 황야를 걸었다.

지루하고 힘들 수 있는 여정이지만 열의로 가득한 그녀들. 오크와 손을 잡고 사람을 강간한 산적이라는, 인류의 배반자를 목격한 상황이라 그런지 사명감이 다시 한번 불타오르는 모습이다.

 “어떻게 인간이 오크에게 고개를 숙일 수 있을까. 아무리 먹고살기가 힘들다지만.”

 “서쪽은 상인들이 많아 부유한 동네라고 생각했는데, 빈부격차가 생각보다 심한가 봐.”

 “북부는 마을 밖으로 도망치면 얼어 죽으니까 저런 놈들이 없긴 한데… 척박하다 해서 다들 나쁜 마음을 먹는 건 아니야. 저놈들이 죽어도 싼 놈들일 뿐이지.”

저마다 한 마디씩 던지는 일행들 사이에서 조용히 침묵을 유지하는 릴리. 오크들이 포로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하니 안심이 되면서도, 사람이 사람이 괴롭히는 모양새에 불안한 마음이 뒤섞이나 보다.

그 모습에 살그머니 릴리의 곁에 서서 부드럽게 토닥여주는 아이린.

 “일행분 걱정이 많이 되시나 봐요.”

 “음, 그렇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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