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3화 (153/175)

 “천막이 잔뜩 세워져 있네. 역시 황무지의 오크들과 손을 잡은 건가.”

 “사람은 왜 생포해 가는 거지? …설마 산 채로 싱싱하게 잡아먹으려고?”

 “으엑, 그런 건 아닐걸. 일단 여기사도 포로처럼 묶어 뒀으니까 인질극이라도 하지 않을까.”

황무지 저 멀리 보이는 것은 흙먼지로 더럽혀진 천막들. 외부의 침입자를 막을 생각 따위도 없는지 울타리도 없이 그저 옹기종기 모인 천막촌이 저 오크들의 보금자리인가보다. 엉성한 나무 우리 같은 건 늑대를 모아 두는 곳 같고.

…그럼, 사람은 어디에 두려는 거지?

 “슬슬 놈들이 우릴 발견한 것 같은데?”

 “그러게, 다시 늑대에 올라타고 있네.”

일행들은 마력으로 강화한 신체를 통해 오크들을 관찰하고, 스킬창에 의존하는 한세아는 카메라를 오크 전사에게 붙여 대충 둘러본다. 탁 트인 황무지인 만큼 천천히 걸어서 이동하는 우리를 발견한 오크들.

천막으로 들어갔던 놈들이 다시 바깥으로 우르르 빠져나와 늑대 위에 올라타 천막촌에서 나서 달려든다. 늑대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드는 방향은 당연하게도 우리 쪽.

 “어차피 대화는 통하지 않을 텐데, 일단 다 죽여버리고 천막을 확인할까?”

 “그게 좋겠어.”

그에 맞서듯 릴리가 장창을 꼬나쥐고 앞으로 한 걸음 성큼 나선다. 아무래도 떠돌이 고블린을 사냥하며 몸이 적당히 달아올랐는지 주저 없이 달려나갈 기세. 그렇다고 해서 걱정이 되는 건 아니었기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모험가 경험이 별로 없는 케이티가 4★ 20레벨 정도라면, 별이 생기기 전부터 상급 모험가에 도달한 릴리 뎁은 4★ 만렙에 가깝다고 봐야겠지.

 “그럼, 먼저 간다!”

매끈한 허벅지에 마력이 깃들며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더니 늑대 무리처럼 흙먼지를 일으키며 순식간에 시야 저 너머로 사라지는 릴리 뎁. 땅을 박살 내며 달리는 나와 달리 무슨 달에 간 우주비행사처럼 부드럽게 달리는 모습이 흙먼지를 밟고 뛰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녀의 달리기가 부드럽고 우아하다 해서 손에 쥔 것도 부드러울 리 없지. 길쭉한 창날에 푸르스름한 마력이 맺혀 일렁이는 게, 동료가 사라진 스트레스가 좀 컸나 보네.

 “도와줘야 하지 않아?”

 “돕는다니, 뭘?”

 “…어?”

속도를 줄이지 않고 서로에게 달려드는 릴리와 오크들. 그 모습에 케이티가 검을 뽑아 들고 달려가려 하지만 이어지는 상황에 저도 모르게 멈추어 선다.

파아앙―!

어느 정도 가까워진 순간, 자세를 낮추고 창날을 앞세운 릴리가 랜스 차징을 하듯 더욱 강하게 땅을 박찬다. 피어오르는 흙먼지가 시야를 가리자 보이는 것은 먼지구름 사이로 잠깐 번쩍거린 푸른 섬광.

마치 먹구름 안에서 번개가 번쩍이는 것 같은 밝은 마력광이 번쩍거리자 뒤이어 굉음이 울려 퍼진다. 마치 번개가 번쩍이고 난 뒤에서야 천둥소리가 울리는 것처럼.

 “릴리의 동료들은 잘 모르겠지만, 그녀는 상급 모험가야. 고작 오크 따위를 처리하는 데 도울 게 어디 있어.”

구름이 가라앉은 곳에는 오크였던, 늑대였던 마석만이 남아 있었다.

세상은 평등하지 않다. 대부분의 것들이 그러하듯, 개개인에게 주어진 재능 또한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릴리 뎁의 파티는 우정과 의리의 이름 아래 기적적으로 유지 되는 상태였다.

마음 맞는 동네 청년들끼리 모여 모험가가 되었고, 재능을 뒷받침해 주는 노력으로 가장 먼저 상급 모험가가 된 릴리 뎁.

상급 모험가인 내가 한세아와 일행들을 이끌고 탑을 돌아다닌 것처럼, 릴리의 파티 또한 상급 모험가인 릴리의 엄호 아래 탑을 돌아다녔다. 내가 게임 밖 세상으로 나가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그리했다면, 릴리는 오직 우정과 의리의 이름으로 손해를 보면서 파티를 유지한 거지.

 “뭐야, 이 새끼들은?”

그 정도의 끈끈한 사이인 만큼 릴리가 조급해지고 거칠어지는 건 당연한 상황.

 “너, 너희는 누, 누구냐!”

 “내가 물어볼 말 아니냐, 이 새끼들아.”

마석도 놔두고 천막을 향해 달려가는 릴리를 마석을 챙긴 다음에야 뒤따라갔더니 난리가 나 있었다. 벌써 건장한 남자 두 명이 창대에 몽둥이질을 당해 피떡이 된 채 널브러져 있었거든.

오크들의 보금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혹시 인질로 잡혀 온 사람이 아닌가 싶었는데―

 “무슨 일이야?”

 “이 새끼들이 밧줄로 묶여 있던 사람을 끌고 가서 나무 우리에 가두고 있었어.”

 “…이 인간들이?”

 “그렇다니까!”

이게 웬걸, 오크 부락에 인간 협력자가 있단다.

사바나에서 사자에게 물려갔더니 인간 비서가 수사자를 사장님으로 섬기고 있다는 것과 비슷한 개소리. 인간이 보였다 하면 제 동료가 죽든 말든 줄줄이 달려들어 대가리가 박살이 나는 놈들이 인간과 협력을 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하지만 눈앞에는 그런 내 생각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놈들이 떡하니 존재하고 있었다.

황무지에 사는 만큼 꾀죄죄한 모습인 건 부정할 수 없지만, 밥은 굶지 않았는지 혈색이 좋고 살이 통통한 인간들. 지저분하다 해도 옷이 해지거나 낡진 않았고, 허리춤에는 날이 곱게 갈려있는 무기도 하나씩 차고 있었다.

지저분한 얼굴, 날이 시퍼런 무기, 통일성 하나 없는 의복과 적당히 덧붙인 가죽 갑옷. 판타지 세상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누가 봐도 훌륭한 산적 새끼들이네, 이거.

 “그래도 다행이네.”

 “뭐가?!”

 “사람 말을 할 줄 아는 놈들이 있으니까. …너희들은 다른 천막을 돌아보면서 납치당한 마을 주민들 이야기 좀 듣고 있어 봐.”

그리고 인권이라는 단어가 없는 중세 판타지 세상에서, 산적이라는 건 말을 할 줄 아는 몬스터나 다름없었다. 죽여도 상관없고, 시체를 들고 가면 돈이 나오니까.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나마 용병 경험이 있는 케이티가 내 이야기를 듣고 그레이스와 아이린의 팔을 붙잡은 채 후다닥 자리를 피한다. 화전민 마을의 사냥꾼 소녀와 신전에서 나고 자란 예비 성녀님이 보기엔 좀 그런 장면일 테니까.

-진실의 천막으로?

-와 씨 사람말 이야기 하니까 먼가먼가임

-야 근데 19금 걸어도 고문 오케이 맞음? 3일 휴가 받는거 아니냐?

-고문 한다고 확정도 아닌데 설레발은

-ㅋㅋ 시발 누가봐도 고문 풀코스 예약한 것 같은 말인데여

케이티에게 떠밀린 그레이스와 아이린이 상황 파악도 못 하고 다른 천막을 향해 떠밀려 사라지고, 맹렬히 고민하던 한세아도 카메라까지 치워버린 채 케이티를 뒤따라갔다. 19금 딱지가 붙었다 해서 대놓고 섹스를 방송할 수 없는 것처럼 몬스터가 아닌 인간형 NPC를 대상으로 한 과도한 폭력 방송은 논란이 생길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렇게 해서 남은 건 바닥에 널브러진 두 사람과 겁에 질린 채 나를 바라보는 세 명의 오크 협력자, 그리고 릴리 뎁뿐.

 “…단검 있는데, 빌려줘?”

 “아니, 난 맨손이 편해.”

그리고 원활한 대화를 위해서는, 다섯이 네 명으로 줄어들 필요가 있었다.

정보 길드의 5★ 아저씨, ‘소리 없는 속삭임’ 존 아저씨한테 어깨너머로 배운 방식. 그 사람들처럼 정교하게 고문할 줄은 모르지만, 이런 훈련 받지 않은 인원에게 공포를 새겨주는 일에는 정교한 기술이 필요 없었다.

사람이 말 그대로, 종잇장처럼 접히는 모습을 보여주면 겁에 질리게 되어 있으니까.

종잇장이 아니라면 착즙기에 들어간 과일이나 육포를 만들기 위해 살과 뼈가 분리되는 고깃덩어리에 비유해도 괜찮겠네.

마력으로 육체를 강화할 수 있는 초인에게 있어, 육체를 강화하지 못하는 민간인은 너무나도 연약하게 느껴진다. 살은 어린아이가 가지고 노는 점토 같고, 뼈는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 만져본 수수깡 같거든.

손아귀에 힘을 살짝 주면 손목이 뒤틀리고 피부가 터져나간다. 피멍이 들다 못해 피가 줄줄 흐르는 저 피부 아래에 있을 뼈 또한 원형을 유지 못 하고 으스러졌겠지. 그렇게 팔다리를 주물러주면 사람의 팔다리가 고장 난 장난감처럼 덜렁덜렁 부드럽게 변한다.

 “말, 말할꼐에엑, 제발, 제바아악!”

사람이 사람이었던 것이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고작 5분. 그마저도 실수로 똑 떼어내지 않도록 힘 조절을 하느라 걸린 시간이다. 인간의 육체는 70%가 물이라 하는데, 이 산적도 그에 걸맞게 액체 인간이 되어 바닥에서 꿈틀거린다.

이는 전부 정보 길드원에게 배운 방식. 나의 우악스러운 힘으로는 섬세한 고문 기술 따위가 어울리지 않으니, 그냥 하나를 다져놓고 시작하라는 조언을 들었지. 하기야 내가 만나는 산적들이 무슨 비밀 단체에서 키운 세뇌된 암살자도 아닌데 뭐 하러 섬세한 고문을 하겠는가.

 “마하, 마, 말한다니까, 진짜로….”

고작해야 강도나 산적 따위가 팔다리가 으스러지고 몸통과 분리되는 고통 앞에서 침묵을 유지할 리 없잖아. 그리고 그런 놈들이 고통도 겪지 않고 말하는 걸 처음부터 곱게 들어줘 봐야 거짓말을 할 것 같고.

이제 다섯 명의 산적은 네 명의 조력자가 되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몬스터랑 붙어먹는 놈들이, 눈앞에서 사람이 반죽이 되는 걸 보고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정신력과 비밀을 지킬 의리는 없으니까.

 “…….”

 “아, 맞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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