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 윽.”
응이라는 말조차 제대로 못 내뱉는 모습에 마침 근처에 있던 평평한 바위 위에 올려주자 그대로 팔다리를 쭈욱 펼치며 대자로 뻗어버리는 한세아. 장비로도 미처 숨기지 못한 봉긋한 가슴이 가쁘게 오르락내리락 움직이지만 웬일로 시청자들의 관심은 다른 쪽에 쏠려 있었다.
네 팀으로 나눠진 만큼 한세아의 방송 화면에 자그마한 화면 세 개가 추가된 상태. 다른 일행들의 영상은 화면 구석에 미니맵처럼 쪼끄마하게 나오는 중이지만 시청자들의 시선을 피할 정도는 아니었다.
-눈나가 머 찾은거 같은디?
-누구신데 그레이스님 방송 화면을 차지중이신가여
-한세아/논란/방송 중 꿀잠
-근데 롤랑이 한세아 왜 이렇게 쥐잡듯 조져벌임?
-카메라 끄고 밤에 존나 깝쳤나보지 ㅋㅋㅋㅋㅋ
“어허, 후우… 잠시 채팅창 못 본다고 음해하지 마세요. 근데 숙취는 구현 안 해뒀으면서 속도감이랑 울렁거림은 그대로 구현해 뒀네, 이 게임.”
가상 현실 게임의 보호 덕분인지 숨을 몇 번 고르더니 곧바로 정신을 차리는 한세아. 그녀가 바위에 누운 채 꼼지락거리며 시청자들의 호들갑을 듣고 그레이스의 화면을 방송 창에 확대해 띄운다.
우리는 마을의 북쪽, 황무지 방향으로 달린 상태고 그레이스는 우리가 왔던 방향인 동쪽으로 향해 마차가 달린 길 주변을 탐색하는 상황.
화면 속에서는 관목을 헤치고 들어간 그레이스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흙바닥과 바닥에 널브러진 나뭇가지 따위를 관찰하고 있었다. 우리에겐 그저 나뭇가지로 보이지만 오크나 늑대가 지나가며 남긴 흔적 따위가 그녀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일 테니까.
“어, 확실히 뭔가 단서를 찾은 모양인가 보네. 다들 기억하나? 그, 언니랑 10층 언저리에서 만났을 때 약초밭에서 풀 꺾인 모양 보고 뿔토끼랑 뿔여우 위치 찾아내고 막 그러던데. 풀이 이케이케 꺾여 있으면 토끼가 위에 앉은 거고, 이만큼 꺾여 있으면 여우가 밟고 지나간 거라면서.”
-그때 보고 좀 많이 신기하긴 했음
-스킬 배우면 발자국이나 흔적 형광색으로 존나 빛나서 눈아플지경이던데
-근데 그건 플레이어 이야기고 NPC는 다를거아녀
-길가다 3★ 주운거 다시 떠오르니 꼴받는데 롤랑 옆구리에 다시 끼울까?
-그레이스 방송인데 한세아가 자꾸 떠드네 눈나 혼잣말 하는거 소리확대좀
짚이는 게 뭐라도 있는지 조금 심각해진 그레이스의 얼굴.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늘 은은하게 서려 있던 고운 미간이 살포시 찌푸려지며 가느다란 손가락이 흙더미와 잎사귀 따위를 매만지며 무언가를 끊임없이 확인한다.
그 김에 계속 숨을 고르는 척 다른 화면도 확인하는 한세아. 서쪽으로 혼자 간 릴리는 아무런 발견도 하지 못했는지 언덕 위에서 사방을 둘러보는 중이고, 남쪽으로 내려간 케이티와 아이린은 다른 마을에서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제 좀 괜찮아?”
“아? 어, 응! 그, 그래도 나는 마법사니까, 체력적으로 좀 부족해서… 속도를 좀 늦춰줄 수 있을까?”
한세아가 바위 눕방이라는 신선한 방송을 진행하는 동안 주변을 둘러보는 척 방송을 엿본 뒤 되돌아와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확실히 멀미 같은 게 디버프로 판단되어서 좀 짧게 유지되는지 거의 20분을 들고 흔들었는데 5분 만에 멀쩡해진 그녀.
그래도 다시 옆구리에 끼워진 채 위아래로 덜렁덜렁 흔들리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은지 필사적으로 부탁을 해 온다.
“흐음, 그러면 저 언덕까지만 넘어보고 되돌아가면서 살펴보자.”
“여, 옆구리 말고 어깨 위에 올려주면 안 될까?”
…으음, 몰카 따위를 생각해 보면 앞으로 두 시간 정도는 더 흔들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방송이고 나발이고 게임을 꺼 버리지 않을까. NPC의 신분으로 플레이어를 대놓고 멕일 순 없으니 이번에는 이 정도로 만족해야겠지.
※
대략 다섯 개 정도의 언덕을 넘어 북쪽으로 향해, 관목과 수풀조차 사라지고 황무지가 시작되려는 경계선을 확인한 뒤 적당히 주변을 둘러보며 귀환했다. 미니맵을 밝히긴 했지만 아쉽게도 북쪽은 정답이 아닌 듯 갱신되지 않은 한세아의 퀘스트 창.
돌아올 때는 한세아의 부탁을 들어주느라 품에 곱게 안은 채 겅중겅중 뛰어 되돌아오니 릴리만 마을에 있었고, 다른 일행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뭐라도 발견했어? 난 떠돌이 고블린만 만나서 잡아 죽이고 왔는데.”
“아무것도. 눈에 보이는 흔적도, 잔류하는 마력도 없던데. 북쪽은 황무지 초입까지 다녀왔는데 발자국도 뭣도 안 보이더라.”
“…그리고 한나, 쟤는 왜 저러고?”
“언덕 넘을 때 들고 뛰었거든. 마법사라서 그런지 체력이 좀 약한가 봐.”
내 품에 안긴 것만으로 시청자들의 온갖 놀림에 시달린 한세아가 정신적 피로감으로 인해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는다. 이렇게까지 효과가 좋을 줄 알았으면 진작 좀 써먹을걸. 역시 내가 아무리 까불어 봐야 만 단위의 사이버 악귀들 발끝조차 따라가지 못하는구나.
갈 땐 괴롭혔으니 돌아올 땐 얌전히 품에 안고 되돌아 왔더니 우결, 사심 방송부터 여성향 포르노 소리까지 내뱉으며 A.I.의 검열을 피해 난동을 부리는 시청자들.
미지의 공간을 탐색할 땐 호위를 위해 방패를 드느라 한 손으로, 안전한 곳을 되돌아갈 땐 부탁을 들었으니 배려하기 위해 양손으로 껴안았다는 내 말 따위는 한세아와 시청자들에게 있어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역시 사람 괴롭히는 것도 해 본 놈들이 더 잘하는구나.
“아, 먼저 와 계셨네요?”
“다녀왔어, 우리가 간 방향에 다른 마을이 있더라고. …뭐야, 오크 상대로 마력이라도 사용한 거야?”
릴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뒤이어 여관으로 들어오는 건 케이티와 아이린. 아무래도 시골 마을이 미신과 광신에 가깝게 종교를 믿는 걸 이용해 필드를 탐색한 게 아니라 다른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를 싹 수집해 온 모양이다.
외부인을 경계하는 시골 마을이라 해도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진짜 수녀에게 감히 무례하게 굴 순 없었겠지. 두 사람의 외형이 여리여리하고 부드러운 미녀라는 점 또한 크게 작용했을 테고.
“듣기로는 다른 마을에도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행상인 무리가 있는데, 약속 시각보다 늦는다고 하더라.”
“네에. 그 마을에 있는 주민분들은 직물 같은 걸 짜서 소금과 밀가루 따위로 바꾼다고 하셨는데 상인들이 오지 않아 곤란함을 느끼고 있다 해요.”
“그쪽 마을도 행상인이 실종된 건가. 확실히 정보가 모이다 보니 수상한 게 느껴지네.”
케이티와 아이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는 릴리. 한두 번이면 우연이라 치부하겠지만, 릴리의 동료와 에르트타의 행상인 무리와 촌장의 아들과 마을 주민, 시골 마을에 와야 할 생필품 상인까지 전부 이번 주에 사라졌다면 명백히 사건이 터진 거지.
그렇게 각자 마을 주변을 탐색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근처의 떠돌이 고블린을 죽였다고 릴리가 말할 즈음 여관 주인아주머니가 슬그머니 다가와 무언가를 테이블 위에 턱 올려둔다.
“그, 이거라도 좀 드시면서 이야기들 나누세요. 아, 그리고 이건 그, 드리기로 했던 모험가 건량. 우리 아들내미가 막 모험가 건량이 여행객에게 좋다고 사 왔는데… 여행하시다가 여관 들어온 손님들은 따듯한 음식을 먹고 싶어 하지 건량은 쳐다보지도 않더라구.”
영원한 스튜가 아니라 새로 끓였는지 국물이 깨끗하고 맑은 수프와 말린 곡물 냄새가 나는 네모 납작한 판때기. 보존하기 위해 건빵 비슷하게 곡물가루를 찌고 구워 납작하게 압착한 녀석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냥 먹기엔 퍽퍽하고 맛대가리 없어 스튜에나 넣어 끓여야 할 녀석이다. 마을에 쉬러 온 손님들이 구매할 리 없는 식량이긴 하네. 그래도 곰팡이 피거나 상하진 않고 깨끗하게 보존된 모습에 한세아가 망설임 없이 인벤토리에 집어넣는다.
“이건 나중에 스튜에 넣고 끓이면 되겠다. 어차피 부수면 곡물가루일 테니까.”
“에, 에구머니나! 물건이 사라졌어?!”
-이쯤되면 얘도 즐기는 중임
-포브스 선정 게임으로 딸을 잘 잡는 방송인 1위
-근데 방송인 1위는 맞으니까 반쯤 맞는 말이라고 쳐도 되지 않을까?
-옆구리에 끼워 둔 조명 역할에 불만이 있어 인벤토리를 어필하는 짐꾼
-그래아라따 조명 말고 짐꾼 해라 독하다독해
그 와중 벌어진 사소한 해프닝이 벌어지고 나서야 뒤늦게 여관에 도착한 그레이스.
발갛게 달아오른 양 뺨이 멀찍이서 보일 정도로 흥분한 그녀가 팔을 번쩍 들고 무언가를 휘휘 흔들며 달려온다. 정답은 동쪽이었나?
북쪽의 황무지 경계선은 텅 비어 있었고, 서쪽의 길에는 떠돌이 고블린이 몇 마리 있어 릴리가 처리했다. 남쪽 가까운 곳에는 다른 마을이 있어 행상인이 오지 않는다는 증언을 들은 상태. 그렇게 남은 것은 방송으로 볼 때 무언가를 찾아낸 것 같은 동쪽.
가장 늦게 되돌아온 그레이스가 양 뺨을 발갛게 물들인 채 여관 테이블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 모습을 보고 슬그머니 물을 따라 주는 여관 주인.
“하아-, 아, 고마워요.”
흔적을 찾기 위해 꽤 멀리까지 뛰어다녔는지 물을 마시며 호흡을 고른 그레이스가 길게 숨을 내쉬며 입술을 달싹거리기 시작한다.
“일단, 흔적은 찾은 것 같아. 오크의 흔적이 아니라 늑대 무리의 흔적이긴 한데, 전에 우리를 습격한 놈들도 늑대를 타고 다녔으니까 그 녀석들이 맞겠지.”
“네에, 이 마을도 다른 마을도 근처에서 늑대가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어요.”
역시나 오크는 오크인지 흔적이 제대로 남은 모양. 기사단의 추격을 피해 몰래 서쪽으로 달아났다 하더라도 똑똑한 건 보스 몬스터뿐이지, 오크들은 여전히 멍청한 듯했다. 하기야 늑대를 타고 줄지어 달려들어 순서대로 죽어 나가는 꼴만 봐도 그렇다.
하다못해 고블린도 제 동료가 그렇게 죽으면 겁에 질려 껙껙 울부짖으며 행동이 흐트러질 텐데, 오크들은 제 동료가 나를 때리다 죽으면 화가 나서 똑같이 때리러 오지 않나.
그런 놈들이 대략 스무 마리씩 몰려다니니 흔적이 고스란히 남을 수밖에. 황무지 특유의 메마른 땅에 찍힌 늑대 발자국, 관목과 덤불을 날붙이로 쳐내고 부순 흔적, 키 높은 수풀에 엉겨 붙은 늑대 털과 바닥에 남은 배설물까지.
“아마 놈들은 이 마을 기준으로 동북쪽으로 이동한 것 같아. 흔적이 꽤 오래되어서 중간에 끊기긴 했지만 몇몇 흔적이 아주 뚜렷하게 남아 있었거든.”
“동북쪽이라면, 역시 황무지 쪽인가?”
“어쩌면 황무지에 있는 오크들과 연합을 했을지도 모르겠어. 똑똑한 개체가 하나 있다면 흩어져 있는 오크 부락들을 규합하려 들지도 몰라.”
이야기를 나누다 제시된 케이티의 의견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탑에서 튀어나온 놈이 아니더라도 가능한 이야기거든. 뭐라고 해야 할까, 오크라는 종족 자체가 유목민 약탈자의 IQ를 한없이 낮춰둔 것 같은 컨셉 아닌가.
농사는 지을 줄 몰라서 맹수를 길들여 타고 다니며 인간을 약탈해서 먹고 사는 종족. 누가 만들어낸 프레임인지는 몰라도 몽골에 대한 공포감이 느껴지는 것 같은 익숙한 맛이다.
거기에 더해 거칠고 척박한 환경에 사는 야만족이 평소에는 흩어져 살다 특별한 우두머리 개체가 등장하면 하나로 규합되는 것 또한 일종의 클리셰. 오크 로드나 오크 제너럴 같은 존재는 소설에서도 게임에서도 질리도록 봐 오지 않았나.
“확실히, 케이티의 말이 일리가 있네. 기사단의 눈을 피하고자 안락하고 풍요로운 오베르뉴 숲에서 도망친 놈들이야. 무언가 노리는 게 있으니 여기사를 납치하고, 풍요로운 땅을 떠나 척박한 황무지로 향했겠지.”
“그러면, 바로 동북쪽을 탐색하러 가 볼까?”
“곧 해가 질 텐데 괜찮겠어? 여기서 하루 쉬고 아침에 탐색해도 상관 없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