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8화 (148/175)

상인과 용병들의 거리여서 그런지 아침부터 부지런히 발을 옮기는 사람들. 마차가 줄지어 이동하며 좁은 길을 막아버리고, 그걸 본 용병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오는 등 무슨 출근길 지옥철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 빼곡히 들어찬 인파를 헤치기 위해 갑옷 차림의 내가 앞장서고, 나머지 일행들이 내 뒤에 옹기종기 모인 상황. 물살을 역류하는 연어가 된 기분으로 사람들을 툭툭 밀치며 앞으로 나아간다.

 “아이, 씹!”

 “밀지 마, 개새꺄!”

 “저 씨발놈이?”

덩치가 큰 만큼 어깨도 넓은 롤랑의 육체로 중무장한 채 사람들을 어깨로 밀어버리니 온갖 험한 반응이 튀어나오는 건 당연한 이야기.

물론 사람이 강물처럼 흐르는 난장판 속에서 시비가 붙을 리 없었다. 어깨치기에 밀린 용병들이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며 스윽- 저 멀리 사라질 뿐. 거기에 전신을 갑옷으로 중무장한 사람에게 다짜고짜 욕설할 정도로 무식한 놈들만 있는 건 아닌지라 별다른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다.

 “인벤토리 마법이라 했나, 좋겠네. 원래 이런 곳에서는 소매치기가 문제인데.”

 “소매치기요?”

 “그래. 한나처럼 마법으로 짐을 보관하는 게 아니면, 저 인파 사이로 덩치 작은 녀석들이 주머니에 손을 대거든. …지금처럼.”

 “으, 으악!”

마치 당근 뽑듯 릴리가 인파 사이로 10살도 안 되어 보이는 소매치기 꼬맹이의 손목을 잡아 위로 휙- 들어 올리긴 했지만.

중무장 갑옷 차림의 전사와 장창을 든 여자, 수녀복을 입은 여자까지 일행으로 우르르 몰려다니는데 무슨 용기였을까. 소매치기 경력이 좀 부족한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꼬맹이의 손에서 제 주머니를 빼앗은 릴리가 대충 인파 사이에 소매치기 꼬맹이를 던지듯 내려놓는다.

 “잡아서 경비에 넘겨봐야 험한 꼴만 보고 이득은 없지, 안 잡자니 주머니를 털어가지, 불쌍하다고 봐 주면 소문까지 난다고. 참 귀찮은 새끼들이야.”

 “어머….”

흙바닥을 뒹군 소매치기에게 동정심을 느꼈는지 작게 소리를 낸 아이린이었지만, 사람들의 발을 피해 벌떡 일어난 소매치기가 일어나는 김에 옆을 지나가던 상인 주머니에 손을 대는 걸 보고 멈칫 굳어버린다.

모험가의 도시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는 거리의 아이들이라 그런지 생명력 하나는 잡초 수준이네.

-상급 모험가쯤 되면 소매치기도 잡네 나는 다 털렸는데

-? 인벤이 있는데 웨 털림

-인벤 안쓰고 컨셉잡고 중세놀이 하는 애들 꽤 있더라

-게임 자유도가 높으니까 온갖 변태가 다 튀어나오네

-첫날부터 탑 외벽 클라이밍을 해댔는데 인벤토리 봉인 정도는 양반이지 시발 ㅋㅋ

기어코 짤랑거리는 동전 주머니를 손에 쥔 채 인파 속으로 사라진 소매치기 꼬맹이와 북적북적한 사람들 사이로 울려 퍼지는 도둑이얏-! 하는 고함. 일행들이 말없이 제 허리춤에 있던 주머니와 랜턴 따위의 소지품을 한세아에게 넘겨준 뒤에야 상인 길드에 도착했다.

사람이 가득한 길을 뚫고 들어와 도착한 넓은 공터. 공터에는 수많은 마차가 질서정연하게 정리되어 있고, 제복을 입은 사람들과 비단옷을 입은 사람들, 그리고 허름한 차림의 행상인들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었다.

 “저기야, 저 공터 끝에 있는 커다란 건물.”

 “간판만 봐도 알겠네.”

진한 회색 석재로 지은 높고 커다란 건물과 금속으로 테두리를 둘러 둔 널찍한 간판. 간판에 새겨진 금화 가득한 주머니 그림은 누가 봐도 이 건물이 상인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수십 명의 사람이 바쁘게 오가는 커다란 정문으로 들어오자 눈에 들어오는 건 마치 귀족의 저택처럼 화사하게 꾸며진 화려한 로비.

벽에 걸린 커다란 풍경화며, 잘 가다듬은 유리 수정구 안에서 불빛을 뿜어내는 마도구, 박물관처럼 벽면에 걸려 있는 번쩍인 갑옷이나 화려한 도자기들까지. 상인 길드가 의도한 대로 일행들이 자연스럽게 움츠러든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엄청 바쁜 게 아닐까요?”

 “걱정하지 마, 얘들은 상인이니까. 아이린, 가장 앞에 서 줄래? 내 옆에.”

 “네, 알겠어요.”

용병만큼 돈에 민감한 게 상인. 부족한 것은 언제나 문제가 되지만, 넘치도록 쥐여주는 건 도움이 될 때가 더 많다. 우리 옷차림이 허름한 것도 아닌데 설마 금화를 보고 욕심을 내며 덤벼들기야 하겠어.

애초에 신뢰로 먹고사는 상인이라는 놈들이 수녀 일행에게 지랄할 리 없다. 돈에 민감한 만큼 미신에도 민감한 게 상인이니까. 그런 내 생각이 맞다고 알려주듯 반듯한 자세로 우리를 맞이하는 여인.

검은 정장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외알 안경을 쓴 미녀가 우리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한세아의 방송 창을 몰래 엿보니 아무래도 별이 붙은 가챠 캐릭터인 모양이네.

 “에르트타 상인 연합회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고객님. 어떤 일로 오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서쪽 항구도시에서 출발한 행상인들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서.”

 “정보, 말씀입니까?”

아름다운 오피스 레이디의 등장에 시끌벅적해진 한세아의 방송 창을 꺼버린 뒤 외알 안경 너머로 번득이는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적나라하게 마주치니 눈동자를 굴릴 수 없겠구나- 싶어서.

겁 없이 마주 본 채 탐색하고 계산하는 상인의 눈은 익숙하다. 마도구 때문에 돈을 모으고 쓰는 10년의 세월 동안 가장 많이 겪은 눈동자 아니던가.

 “흐음, 정보라. …나쁘지 않네요.”

그런데 저 눈동자는 조금 이상하다. 사람과 정보를 머릿속 저울로 재단해 가격을 매기는 눈이 아니라 엉뚱한 쪽으로 열의를 가진 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주머니 속의 금화를 만지작거리며 돈으로 찍어 눌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던 중 뒤에서 들려오는 한세아의 목소리.

 “엥? 아니 뭔, 이런 칭호도 있어? 대놓고 그쪽 콘텐츠 NPC야? 근데 상인이고?”

그녀의 생뚱맞은 외침에 나도 모르게 다시 한번 방송 창을 켜버렸다. 의아해하든 말든 호기심을 해소하는 게 먼저니까.

그렇게 해서 알게 된 눈앞 NPC의 정체.

2★ ‘음탕한’ 비올렛타

……아니 시발, 상인이라며.

게임에서의, 그것도 씹덕 가챠 게임에서 캐릭터 이름 앞에 붙는 칭호는 그 캐릭터의 특성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과 마찬가지다.

견습 레인저에서 탐지 패시브를 얻고 숲의 추격자가 된 그레이스, 북부 대공의 딸이자 숙련된 검사로서 검의 공녀라 불리는 케이티, 신전에서 나고 자라 정체를 숨긴 예비 성녀 아이린에 마력을 신성력으로 조금씩 바꾸고 있는 나, 팔라딘 롤랑까지.

반대로 특성보다는 캐릭터의 개성, 그러니까 성격이나 캐릭터성 따위를 강조하는 칭호 또한 존재한다. 야심가 샤를롯이나 메이드 마리 같은 경우가 이에 속하지.

 “정보는 제가 전문적으로 다루는 품목은 아니지만… 단둘이서 이야기를 하는 것 정도라면야.”

그러니까 눈앞의 이 외눈 안경을 쓴 누님은….

-와캬퍄쥬지터진다 서쪽으로바로간다시발

-왜너만행복해?왜너만행복해?왜너만행복해?왜너만행복해?왜너만행복해?왜너만행복해?

-오늘 바로 서쪽으로 달린다 녹슨말발굽뒷골목상인연합딱대라

-지랄들 하네 니들이 달려가면 바로 ‘철벽녀’ 비올레타임

-팩트로 때리지 마라 나도 같이 아프니까

그렇고 그런 성격이라는 게 확실하겠지.

새빨간 혀가 슬그머니 튀어나와 도톰한 입술을 사악 핥고 사라지자 채팅창에 불이 났다. 낭창 휘어지는 눈과 눈 밑에 찍혀 있는 자그마한 점, 우아하고 나긋한 것 같지만 음탕하게 내 손등을 쓰다듬고 사라지는 손길까지.

수도에 있는 귀부인들이 본다면 손수건을 물어뜯으며 질투를 할 것 같은, 우아함과 음탕함이 뒤섞인 몸짓.

물론 그녀의 유혹은 아주 간단하게 가로막혔다.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내 양옆에서 성큼 앞으로 나선 릴리와 그레이스가 대신 대화를 하기 시작했으니까. 살짝은 불쾌해 보이는 릴리와 다급하게 나선 그레이스. 하지만 그녀들이 눈치를 채지 못한 게 있었으니….

 “어머? 셋이서, 아니면 넷이서?”

 “그냥 여기서 이야기하지.”

‘음탕한’ 비올렛타의 열기 어린 시선은 내 팔뚝뿐만이 아니라 그레이스의 가슴골과 릴리 뎁의 말총머리에 가려진 목덜미도 핥듯이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대로 휘둘렸다간 한세아의 방송이 다른 의미로 위험해질 것 같은데.

가상 현실 게임이 나오고 100%에 가까운 현실 구현 때문에 방송에 성인 인증이 걸렸다 해도, 방송에서 대놓고 섹스를 할 수는 없는 게 당연한 이야기.

30층의 보스 몬스터보다 위협적인 적수가 입맛을 다시듯 다시 한번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나, 그레이스, 릴리 말고도 뒤에서 상황을 파악 중인 한세아와 케이티, 그리고 아이린까지 스윽 훑어보는 포식자의 안광.

그레이스는 여자가 여자를 노린다는 걸 상상조차 못 하는 것 같지만, 시선에 예민한 릴리는 자신만만하게 나선 것 치곤 곧바로 어깨가 움츠러든다. 같은 여자에게 저런 음탕한 시선을 받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나 보네.

 “고작 이야기에 금화인가요? 여러모로 손이 크신 분이네. …난, 손이 큰 게 좋더라. 손가락도, 두껍고.”

 “서쪽 항구도시에서 출발해 모리스 백작령을 거쳐 에르트타에 오기로 한 행상인들, 용병들에게 들어보니 호위 의뢰를 맡겨놓고선 연락이 끊겼다더군.”

 “딱딱하기도 하고, 더욱 마음에 드네요.”

이대로 놔두다간 끝도 없이 휘둘릴 것 같아 금화를 하나 올려두며 원하는 바를 우격다짐으로 말했다. 은근한 섹드립은 둘째 치고, 상인 연합의 일원답게 능구렁이처럼 우리 말은 무시한 채 제 할 말을 이어나가는 쪽으로 대화를 유도하고 있었으니까.

일개 사무직 따위가 금화를 들고 온 손님 앞에서 이런 반응을 보일 리 없으니 상인 연합의 높으신 분이라도 되는 건가.

 “아무래도 왕국 기사단의 눈을 피한 몬스터가 오가는 상인들을 습격하는 것 같다. 원활한 조사를 위해 협조를 부탁하지.”

 “……흐음, 기사단? 거기에 상급 모험가?”

그런 내 예상이 맞다는 듯 금화의 옆에 상급 모험가 패를 턱 올려놓고 이야기를 이어나가자 분위기가 싹 바뀌는 비올렛타. 호출 신호기라도 되는 듯 무슨 버튼 같은 걸 딱딱- 두드리더니 서류를 꺼내 읽어보고 우리의 옆쪽에 손짓하는 등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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