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린의 질문처럼 대체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놈들은 도망쳐 나왔다. 운이 좋았는지, 병사들이 근무를 대충 섰던지는 몰라도 아무튼 도망쳐 나오는 것에 성공해 왕국 서쪽 길목에 자리를 잡은 상태.
말과 마차보다 빠른 기동력을 가진 수십 마리의 오크 기병들. 개개인의 실력도 마력만 못 다룰 뿐이지 중급 모험가보다 강할 것이다.
거기에 릴리 뎁은 휴식과 재정비를 위해 모험가의 도시에 남아 있던 상황이니 전위가 빠진 파티가 수십 마리의 오크 기병을 평지에서 상대할 수 있을 리 없다. 물론 그녀의 일행이 상급 모험가라는 걸 생각해보면 큰 부상을 입고 다른 영지에서 요양 중일지도 모르지.
“그게 무슨 소리야, 롤랑? 이 녀석들이 탑에서 나와 숲을 거쳐서 여기까지 왔다고?”
“그래, 릴리. 너는 몰랐겠지만 우리는 지난번 20층의 이변 때 기사단에서 의뢰를 받은 게 있어. 오크 놈들이 만월 늑대처럼 탑 밖으로 나와 오베르뉴 숲에 자리를 잡았다는 걸 들었지.”
“이런, 씹-”
내 설명에 릴리 뎁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진다. 왕국의 오지로 향하는 것도 아니고, 중부에서 서부로, 그것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라 방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수십 마리의 오크 기병 따위가 튀어나온 상황 아닌가.
알뜰살뜰 모아온 마석이 싹 사라진 건 둘째 치고 몇 년간 호흡을 맞춰 온 동료들이 싸그리 실종되었다는 건 릴리 뎁이 모험가로서 엄청나게 퇴보했다는 뜻이 되어버린다. 모험가 중 장창을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애초에 우리 파티만 봐도 협공이라기보다는, 내가 몬스터를 붙잡고 일행들에게 들이밀어 주는 방식 아니던가? 아니면 난전으로 가서 보호막 튼튼한 거 믿고 각개전투를 하던가. 우리 파티가 특이한 케이스니 몇 년간 호흡을 맞춰온 동료를 걱정하는 릴리 뎁이 이해가 된다.
※
“추가적인 습격은 없었네.”
“어쩌면 수십 마리를 잡았으니 전투 인원이 전부 당해서 얌전히 숨은 걸지도 몰라.”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마부가 자신감 있게 마차를 몰아 끝끝내 도착한 작은 영지. 릴리 뎁의 일행들이 목표로 삼은 영지로 갈 때 보급 문제로 들릴 수밖에 없는 장소였다. 그녀의 일행들은 한세아처럼 인벤토리가 없으니 당연한 이야기.
털털한 릴리 뎁과 포근한 아이린에 입담 좋은 한세아가 방송 라디오를 위해 뭉쳤다 보니 어느새 아이린 빼고 다 말을 놓아버린 여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눈다. 귀족 아가씨인 케이티도 덕분에 녹아든 것 같아서 좀 마음이 놓이네.
검의 공녀라는데 하도 북부잼민이, 얼음잼민이 하며 놀려대니 케이티가 좀 신경이 쓰인다고 해야 할까. 물가에 내어놓은 애를 보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그래도 아빠 피해 도망친 것 치곤 잘 적응하고 있어서 다행이네.
“일단 숙소를 잡고 여관에서 소문을 들어보죠.”
“하긴, 오가는 행상인들이 오크에게 당했다면 여기에 소문이 날 수밖에 없겠네.”
“저는 신전을 한 번 방문해 볼 생각이에요. 혹시 고행을 위해 이동하던 형제자매님들에게 변고가 있었는지 확인을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딱히 내가 뭐라고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의뢰를 진행하는 그녀. 조명맨이니 슈퍼짐꾼이니 하는 말이 꽤 신경 쓰였는지 파티의 리더로서 최대한 의젓하게 행동하려는 게 보였다. 하긴 게이머로서의 호승심 하나는 진짜인 여자니 당연한 결과려나.
“그러면 시간이 늦었으니 숙소를 먼저 잡죠. 롤랑은 개인실에, 우리는 둘 셋 나누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더니 자연스럽게 그레이스 옆에 착 달라붙는 한세아. 한세아와 그레이스, 아이린과 케이티와 릴리 뎁. 딱 봐도 노림수가 있는 것 같은 배치긴 하네.
…승부욕 만큼 성욕도 넘치나?
문득 뇌리에 운동하는 여자의 성욕과 관련된 음담패설이 스윽- 지나갔지만,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순 없었다. 그래도 아직 방송 중이니 대놓고 말한 건 없었거든. 시청자들도 딱히 눈치를 채지 못한 상황이라 파자마니 잠옷 차림에 대해 떠들고 있을 뿐.
“그게 좋겠네. 다섯 명이 함께 들어갈 수 있는 방은 대부분 열악한 싸구려 방이거든. 쉴 땐 푹 쉬어야 하니까 숙소엔 돈을 쓰는 게 좋겠지.”
“아는 여관이라도 있나요?”
“중급 되고 나서 자주 들리던 곳이 있어. 상단과 관련된 손님을 노리느라 값은 좀 비싸게 받지만 넓고 쾌적한 데다 마도구도 조금 있거든.”
한세아의 음흉한 속셈을 알아차린 사람은 한 명도 없는지 릴리 뎁이 자연스럽게 앞장서 자신이 아는 숙소로 안내한다. 모험가의 도시보다 확연하게 작지만, 서부로 가는 길목답게 상인들이 참 많네.
길거리를 가득 채운 짐마차와 등짐 바리바리 챙긴 상인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안색에는 공포 따위의 어두운 감정은 없었다. 아직 울프 라이더 놈들이 제대로 활동을 시작하지는 않았나 본데.
릴리 뎁의 일행들이 우연히 첫 희생양이 된 건지, 아니면 또 다른 사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오크는 잡아 죽여야 했다.
“여기야, 간판은 조금 허름하긴 한데 내부는 깨끗해. 주인장이 참 이상한 게, 마도구도 갖춰 두는 주제에 간판은 안 바꾼단 말이지.”
“스튜 냄새가 좋네요. 내일 아침은 여기에서 해결해도 좋겠어요.”
어딜 가나 눈에 띌 수밖에 없는 미녀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오자 인사도 못 하고 어버버- 굳어버린 종업원. 입이 슬쩍 벌어진 카운터의 종업원에게 한세아가 척척 걸어가 방을 주문한다.
비싼 만큼 어중간한 보부상들은 방을 잡을 생각도 못 하는지 비어 있는 3인실, 2인실, 1인실을 전부 결제한 그녀. 딱히 숨길 생각도 없는지 허공에서 금화 주머니를 꺼내 들자 계산을 하다 말고 고개를 처박을 듯 숙여보이는 종업원의 모습에 웃음이 비죽 새어 나왔다.
마법사에 대한 미신을 좀 믿는 편인가 본데, 숙소에 있을 땐 아주 편하겠네.
“이곳이야. 방 잡고, 짐 푼 다음 흩어져서 도시를 돌아다녀 보자.”
“네, 릴리 언니.”
“하하, 언니라. 시커먼 모험가들 사이에서는 듣기 힘든 말이네.”
씨익 웃어 보이는 릴리에게 마주 웃어 보인 한세아가 자연스럽게 그레이스와 팔짱을 끼는 모습을 보며 그녀들의 뒤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소도시 에르트타는 서쪽 모리스 백작령으로 가는 일종의 길목이었다. 하기야 도시라는 게 사람이 필요 때문에 모여 살다가 발전하는 곳이니 당연한 이야기려나.
위험을 무릅쓰고 서북부 황무지 인근으로 한탕 치러 가는 상인들도, 서쪽 끝자락 항구 도시에 가서 해산물과 서부 특산물을 구매하려는 상인들도 중부에서 서부로 갈 때 보급을 위해 반드시 들러야 하는 길목.
그 덕에 도시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거리는 상인과 용병들로 가득했다. 상인들도 돈에 목숨을 걸지만, 맨몸으로 불구덩이에 달려드는 족속은 아니니까 당연히 호위를 위한 용병도 많을 수밖에.
“사람들, 그것도 용병들이 엄청 많네.”
“…그런데 모험가와 용병은 뭐가 다른 거야?”
-걍 길드 차이 아님?
-일단 용병에 씹새끼들이 더 많음 통수를 존나 쳐
-그게 왜 지금 궁금하냐고 ㅋㅋㅋ
-걍 눈에 보이니까 내뱉고 본 거 아님?
-모험가 말고 용병으로 겜 하는 사람도 꽤 많지 않냐
숙소를 잡고 흩어지기 전, 용병들이 득실득실한 거리를 보며 질문을 던지는 한세아. 지난번에 가볍게 설명을 했던 것 같은데 방송 오디오를 위한 건지, 아니면 보다 보니 그냥 궁금해진 건지 모르겠네.
딱히 시청자들에게 던진 질문이 아니었는지 한세아의 중얼거림에 대답한 것은 내가 아니라 릴리 뎁. 장창을 등에 멘 채 휘적휘적 거리를 걷다 고개를 쓱 돌려 한세아의 곁에서 설명을 시작한다.
…한세아 저건 여자를 꼬시는 매력이라도 있는 걸까? 릴리 뎁이 아무리 서글서글 하다지만 두 사람이 친해지는 속도가 장난 아니네.
“사실 큰 차이점은 없어. 애초에 용병이 모험가 등록을 할 수 있고, 모험가도 용병 등록을 할 수 있으니까. 길드가 주력으로 미는 의뢰가 다를 뿐이지.”
“아, 그래요?”
“모험가 길드는 몬스터와 관련되어 마탑의 의뢰를 받는 게 대부분이고, 용병 길드는 상인들이나 영지전 따위의 의뢰를 받는 게 많지. 우리 애들도 상급 모험가지만 용병 길드에 은패 용병으로 등록되어 있어서 서쪽으로 갈 때 상단 호위 임무를 받아서 가.”
“상단 호위 임무요? 그건 모험가 길드에서도 받지 않나?”
“그야 모험가의 도시에는 용병 길드가 없으니까. 애초에 도시 중앙에 몬스터가 우글우글한 탑이 떡 박혀 있고, 커다란 마탑 지부도 하나 있는데 뭐 하러 용병 지부가 진출하겠어. 모험가 길드에 밥그릇 다 뺏기고 밀려날 뿐이지. 반대로 이 도시는 근처에 맹수도 몬스터도 없이 상인만 돌아다니니 용병 길드가 있고 모험가 길드가 없어.”
릴리 뎁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거리는 한세아와 일행들. 설명은 장황했지만 결국 돈 때문이라는 이야기는 모험으로 돈을 버는 모험가로서 아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모험가 길드와 용병 길드의 의뢰가 겹쳐 수당을 두 배로 타 먹은 이야기, 서쪽으로 상행을 나가다가 세상 물정 모르는 강도를 만나 부수입을 올린 이야기, 다른 용병들이 모험가라고 만만하게 여겨 배신했다가 되려 당한 이야기까지.
갑작스럽게 시작된 릴리 뎁의 썰 풀이 방송에 일행들도 시청자들도 넋을 놓고 집중하게 되었다. 시청자 중 몇몇 게이머들이 용병으로 나섰다 해도 밑바닥 나무패, 동패 정도일 테니 은패 모험가의 이야기는 흥미로울 수밖에.
“슬슬 흩어져서 정보를 모아야 할 것 같은데?”
“아, 참! 그렇지.”
그나마 금패 용병단인 레베카 휘하에 있던 케이티만이 정신을 차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일깨워 줄 뿐. 케이티의 말에 그제야 퀘스트를 진행해야 한다는 걸 떠올린 한세아가 급히 일행들을 나눈다.
나, 한세아, 그레이스, 아이린, 케이티에 릴리가 추가된 여섯 명. 소문을 들으려면 둘씩 짝지어 세 팀으로 나뉘는 게 제일 좋겠네.
혼자 다니기엔 너무 번잡하고, 나 빼고는 눈에 확 띄는 미녀들이라 용병들 상대로 귀찮은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세 명씩 모여서 다니기엔 효율이 너무 안 좋아.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슬쩍 시선을 교환하더니, 아이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두 명씩 모여서 돌아다니면 될 것 같아요. 시간은, 으음… 달이 제대로 뜨기 전에 여관에 모이면 되지 않을까요?”
딱히 태클 걸 것도 없어 아이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는 일행들. 그러더니 어떻게 사람을 나눠야 할지 고민된다는 듯 서로 시선을 교차한다. 그 와중 그레이스에게 강렬한 눈빛을 보내는 한세아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럼 내가 롤랑이랑 같이 다닐게.”
“…어?”
릴리 뎁이 자연스럽게 내 곁으로 성큼 다가와 팔짱을 꼈다.
※
나와 릴리 뎁
아이린과 케이티
한세아와 그레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