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작을 주우러 돌아다니면서 봤는데, 여기에 작은 동물의 흔적도 하나 없었어요. 아마 먹이가 풍부하지 않아 동물도 적은 것 같은데. 마부 아저씨, 근처에 마을도 없죠?”
“예? 아, 예. 당연히 없죠, 근처에 마을이 있었다면 노숙을 하는 게 아니라 그 마을에 묵었을 겁니다.”
나무보다는 키 작은 관목이 더 많은 야트막한 언덕 지형. 서쪽답게 울창하다기보다는 황량함에 가까운 장소인지라 토끼나 사슴 따위의 초식 동물이 없는 장소. 근처에 마을도 없으니 습격할 가축도 없다는 뜻인데 어떻게 늑대 무리가 이런 곳에 있겠는가―
그레이스의 말에 침을 꼴깍 삼킨 릴리 뎁과 케이티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기를 꺼내 든다. 어둑하게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모닥불 빛을 받아 서늘하게 빛나는 검날과 창 촉.
신비와 마법이 존재하는 판타지 세상에서, 상식에서 벗어난 일은 대부분 위험하니 긴장할 수밖에. 그래도 마부와 달리 겁을 먹지는 않는 건 그녀들의 시선이 흘깃거리며 내 쪽을 향했기 때문이려나.
-롤랑센세 무기도 안 드는거 보소 묵직허네
-상급 모험가에 탱커에 태생 6★이면 다른 쪽도 묵직하려나
[관리자에 의해 삭제된 채팅입니다]
-요즘 관리자봇 발전이 빠르네 은유법도 바로 알아먹고
-싹둑이 같은 귀여운 이름이 아니라 개백정망나니로 진화해버림;;
뜬금없는 늑대 울음소리가 왜 들릴까, 그리 생각하며 모닥불 앞에서 멍하니 기다리고 있으니 조금씩 가까워지는 소리. 조용해진 풀벌레 대신 관목이 바스락거리고 맹수가 그르렁거리는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진다.
아무래도 모닥불의 연기와 스튜 냄새를 맡고 찾아온 모양인지 언덕 능선 너머까지 접근한 모양. 귀찮아서 가만히 있으려 했는데 명백히 우리를 노리고 찾아온 모양이다.
“그냥 갈 생각은 없는 것 같고, 우리를 노리고 온 것 같은데. 내가 확인하고 올 테니까 릴리, 너는 케이티와 함께 여기서 말을 지켜.”
“아, 아이고! 맞다!”
주섬주섬 철퇴와 방패를 챙겨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하자 화들짝 놀라는 마부. 늑대 울음소리에 겁에 질려 우리 쪽으로 왔는데, 매어 둔 말은 생각하지도 못했나 보다.
늑대든 뿔늑대든 늑대 비스므리한 몬스터든 상대하는 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여기서 말이 죽어버리면 말을 구매할 수 있는 다음 도시까지 걸어서 이동해야 하니까 말은 반드시 지켜야 하지.
여기서 말이 죽으면 한세아가 아침으로 게임 리셋하는 게 더 빠를 테니까.
“말들은 어디에 묶어 놨죠? 제가 같이 갈 테니까 여기로 데려오죠.”
“예, 예! 부탁합니다 모험가님!”
말이 죽으면 인생도 끝나버리는 마부가 후다닥 릴리 뎁을 이끌고 공터 너머로 사라진다. 우리에게도 그에게도 다행스럽게 말은 늑대가 오는 방향 반대쪽에 매어뒀나 보다.
허둥지둥 움직이다 돌부리에 걸려 비틀거리는 마부의 뒷모습과 장창을 들고 발소리 없이 균형된 자세로 사박사박 움직이는 대비되는 모습. 태생 4★ 근접 캐릭터 두 명에 태생 5★ 보호 특화 사제가 있으면 위험한 일은 없겠지.
“아이린, 여차하면 보호의 성법을 바로 사용해. 한나, 혹시 우회한 적들이 모닥불을 노려 불을 끈다면 공격할 생각 말고 라이트 마법으로 시야를 밝혀줘. 릴리 뎁과 케이티 정도라면 누가 오든 간에 상대할 수 있을 거다.”
“네, 알겠어요.”
“알겠어!”
-동굴을 벗어나도 그저 ‘빛나는 활약’ 원툴
-일단 어둡다 싶으면 무조건 조명담당이 되어버리네
-카메라도 담당했으니 2인분이지 든든하다 한세아
-천재 마법사(조명 담당)
-그냥 천재 짐꾼인데 마법도 쓸 줄 안다고 말하는게 더 멋지지 않냐
마법사 하면 공격 마법을 떠올리는 시청자들에게 또 공격당하기 시작한 한세아를 두고 언덕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기척을 죽일 생각도 없이 갑옷 소리를 내며 저벅저벅 메마른 흙을 밟고 덤불을 밀쳐내며 걷자 조금씩 커지는 으르렁거리는 소리. 코끝에 훅 끼쳐오는 짐승 누린내와 불쾌하고 축축한 숨결을 보면 늑대가 맞긴 하는데….
“…뭐야, 이건?”
늑대, 정확하게 말하자면 안장 찬 늑대와 그 위에 올라탄 오크 전사. 무슨 기병대가 출정식을 치르듯 늑대를 올라탄 오크 기수들이 언덕 위에서 달을 등진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울프 라이더, 오크 종족의 기병으로 히로인즈 크로니클에서 본 적이 있는 녀석들이다. 오크라는 게 양산형으로 찍어내기 편하니까 전사, 주술사, 사냥꾼, 기병에 초록 빨강 검정 등등 색깔 놀이까지 곁들여서 재화 던전 따위에 맨날 등장했거든.
근데 그건 히로인즈 크로니클 이야기고, 여기는 히어로즈 크로니클이다. 그것도 왕국의 수도와 모험가의 도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안전지대에 가까운 장소.
“…설마 탑에서 나온 놈들인가?”
잡아먹을 것도 없는 황량한 산맥에 수십 마리의 오크가 수십 마리의 늑대를 데리고 돌아다니고 있다니. 그레이스가 말하길 늑대 무리가 있는 것도 이상하다는데, 이 오크 놈들은 뭘 먹었겠는가.
“어쩐지 쉼터가 텅 비어 있더라니.”
퀴이이익―
머리 위로 카메라가 날아오는 것과 동시에, 선봉에 선 덩치 큰 놈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자세를 낮춘 늑대가 언덕을 박차고 달려든다. 달을 등진 채 달려드는 맹수와 맹수의 등 위에 올라탄 채 내 목숨을 앗아가려고 길쭉한 도끼창을 휘두르는 오크 기병.
먼저 뻗어진 오크의 무기가 정확하게 내 목을 노리고, 쩍 벌어진 늑대 아가리에 빼곡히 박힌 날카로운 이빨이 허벅지를 노린다. 말이 아닌 늑대를 탄 기병이라서 가능한 날카로운 일격. 대장 격으로 보이는 덩치 큰 놈의 돌격에 뒤따라오는 울프 라이더의 무리까지.
“역시, 탑에서 나온 놈들이었나.”
놈들이 줄줄이 달려와 비명도 남기지 못하고 마석으로 변했다.
늑대를 타도 오크는 오크라는 듯 제 앞에서 대장과 동료가 죽어 나가도 똑같이 달려드는 게 오크 전사랑 하등 다를 바 없네. 그 광경을 내 머리 위에 떠 있는 카메라로 보며 깔깔 웃는 시청자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마석으로 변한 시체들을 내려다보았다.
-저건 무슨 지우개여
-오크 전사는 기절하던데 쟈들은 원샷에 죽네?
-뜨거운 물에 솜사탕 던지는 것 같음
-싸악 지워지는거 보니 속이 시원하네 ㅋㅋㅋ
-시체 말고 마석이 떨어지는 걸 보면 진짜 탑에서 나온 듯?
오크 기병뿐만 아니라, 놈들이 타고 있던 늑대까지 마석으로 변했네.
그 모습을 보자 얼마 전 제임스 설리반을 통해 받은 의뢰가 떠오른다. 축복받은 숲에 오크가 있는 것 같으니 탐색을 해 달라는 의뢰를 통해 여신의 계시를 받았지만, 오크의 흔적 따위는 없었었지.
그리고 그 숲에 있던 오크가 왕국 중앙의 수도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갑자기 튀어나왔다. 누가 봐도 명백히 대가리 역할, 그러니까 똑똑한 지휘관이나 참모가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풍요로운 숲을 마다하고 척박한 서부로 향해야 기사단에게 섬멸당하지 않는다는 걸 아는 놈이 있다. 그리고 그 새끼가 오크 기병이라는 병종을 탑에서 모험가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꽁꽁 숨겨서 밖으로 꺼낸 다음, 숲에서도 기사들의 시선을 피해 서부로 이동했다는 거네.
“롤랑? 늑대였어?”
“뭐야, 벌써 처리한 거야?”
다시 공터로 돌아오자 무기를 쥔 채 나를 반기는 일행들. 우회한 다른 놈들은 없었는지 겁에 질리지도 않은 채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는 말들. 오직 마부만이 겁에 질린 상태로 나를 무슨 구세주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척박해서 맹수도 다니지 않는 길목에서 늑대 무리를 만났으니 겁에 질릴 법하지만, 판타지 세상의 마부치고는 겁이 좀 많네.
“일단, 오크들은 다 처리했다.”
“늑대가 아니라 오크?”
“그래, 늑대를 탄 오크들이 덤벼들더라. 그리고 이건 그 마석. 아무래도 20층에서 오베르뉴 숲으로 나왔던 오크들인 것 같은데.”
“…그놈들이 여기에 왜 있어?”
아직 케이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반말과 존댓말이 오락가락하는 케이티가 끝끝내 말을 놓은 채 내게 질문을 던진다. 물론 나는 놈들이 왜 여기서 사람들을 습격해 잡아먹고 있는지 대답을 해 줄 수 없다.
그건 퀘스트 창이 있는 한세아가 알겠지.
“어어, 연계 퀘스트? 이거 메인 시나리오인가, 아니면 그냥 이벤트로 뜬 건가? 우리가 그때 숲에서 오크를 못 찾아서 이어지는 거야?”
[왕국의 서부, 상행길을 막아 세운 것은 산적 따위가 아닌 오크 기병이었다]
[마치 탑의 몬스터처럼 죽어서는 마석으로 변하는 늑대와 오크 기병들]
[혹시, 이 녀석들이 왕국의 여기사를 납치했던 오베르뉴 숲의…?]
-한세아!니가죽였어!한세아!니가죽였어!한세아!니가죽였어!한세아!니가죽였어!
-메인 시나리오 빼면 워낙 스토리가 막 바뀌어서 머라 대답을 몬하겠네
-서브퀘에서 선택지 삐끗하면 그대로 이어지는 건가봄
-그때 숲에서 조또의미없이 진행도 채운게 얘들 못찾아서임?
-스토리 탄탄하긴 하네 외계인을 몇 마리 갈아버린거지
메인 시나리오, 서브 퀘스트, 캐릭터 퀘스트에 이은 연계 퀘스트의 첫 등장에 한 마디씩 제 추론을 던져대는 시청자들. 한세아가 퀘스트 창을 읽으며 시청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 또한 생각했던 내용을 일행들에게 말했다.
“기사단의 의뢰, 기억하지? 오베르뉴 숲에서 오크의 흔적을 찾아달라던 의뢰.”
“아, 혹시 녀석들이…?”
“그래, 아무래도 오베르뉴 숲에서 기사들의 감시를 피해 달아난 놈들이 이쪽으로 온 것 같아.”
“하지만 여신님의 은총을 받은 숲은 병사들과 기사님들이 둘러싸고 있지 않나요?”
“주술사 같은 놈이 있겠지. 그리고 그 녀석들은 바깥에서 숲 안으로 침입하려는 외부인을 막아 세우는 거지, 숲 안에서 빠져나오는 무언가를 감시하는 중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