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한세아가 시청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릴리 뎁과 일행들은 서부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레이스는 동쪽, 케이티는 북쪽 출신이라 서부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거든.
이야기를 들어보니 릴리 뎁과 그녀의 일행들이 서부 출신인 모양. 그래서 마석을 싸 들고 서쪽으로 향했나- 따위의 생각을 하며 그녀의 이야기를 슬쩍 엿들었다.
“서쪽? 서쪽은 뭐, 극단적인 동네죠. 대강 동쪽 비슷한 것 같다가도 산 하나 넘으면 식물이라곤 찾아보기도 힘든 휑한 황무지가 펼쳐지니까. 그래도 사람 사는 곳만 따라서 가면 동부랑 비슷할 겁니다.”
“황무지라, 거긴 위험하겠죠?”
“위험하죠. 왕국의 병사들에게 밀려난 오크 놈들이 득실득실한 데다, 어디서 튀어나오는지 몰라도 대형 몬스터들이 자꾸 튀어나오니까.”
초대면인 데다 귀티 나는 케이티가 껴 있어서 그런지 서로 존댓말을 곱게 쓰며 대화를 나누는 릴리 뎁과 일행들. 아무래도 그녀들의 흥미는 서부의 황무지에 쏠린 모양이다.
푸른 초원과 험난한 것까지는 아닌 산맥이 가득한 동부에 비해 서부는 조금 더 극단적이니까. 초목이 적당히 나 있는 초원에서 황량한 돌산 하나 넘으면 대형 몬스터와 오크 부락이 득실득실한 마굴이 떡 하니 버티고 있다.
사람 사는 영지에서도 동네 뒷산 한번 잘못 넘으면 마경이 나오는 수준이니 중세 시대답게 온갖 미신적인 헛소문도 가득한 상황.
“그, 서부의 산에는 나무가 하나도 없다던데….”
“모든 산이 그런 건 아니고, 황무지로 넘어가는 쪽에는 황량한 돌산이 꽤 있습니다. 덕분에 오크 놈들이 넘어올 때 아주 쉽게 발견할 수 있죠.”
이 세상에서 생명이란, 몬스터까지 포함하여 여신님의 은총을 받은 존재다. 그러다 보니 식물이 자라지 않는 황무지는 일종의 저주받은 땅처럼 미신이 잔뜩 있는 것이다. 물론 교리에도 경전에도 없는 탑이 더 심하긴 하지만.
-속보)서부 해안가에 비키니 구현되어있슴
-아니 중세 판타지에 뭔 비키니여 ㅋㅋㅋㅋ
-여관에서 마카롱도 굽는데 해변에서 비키니 좀 입을 수 있지
-근데 거기까지 가긴 함? 바다 보려면 서쪽 끝자락 아니여
-거기까지 간 새끼도 대단하긴 하다 어케 서쪽 끝까지 갔냐
“아니 뭔, 비키니? 음식이야 유저 편의를 위한 거긴 해도, 비키니는 왜?”
[한세아더금화를마시는씹새님 10,000원 기부!]
비키니도 유저의 즐거…편의를 위한 아이템입니다
“어휴, 진짜. 하긴 게임이 성인물인 데에는 이유가 있어, 그지?”
릴리 뎁에 카메라를 맞춰 둔 상태로 떠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녀의 설명을 들은 시청자들이 음흉한 기대를 하며 와글와글 떠들기 시작한다. 서부에 있는 비키니라, 그거 보려면 마차 타고 적어도 한 달은 가야 할 텐데.
그나저나 게임이 성인물인 이유라, 그걸 한세아가 제 입으로 말하면서 시청자들을 한심하다는 듯 놀려 먹을 처지가 아니지 않나?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멈춰 선 마차. 기사단의 의뢰 때와는 달리 역참 같은 게 없을 테니 가는 길에는 노숙을 좀 해야겠네. 마차에서 기지개를 켜며 내리니 내 생각이 맞다는 듯 모닥불의 잔해만이 남이 있는 공터가 보인다.
“모험가님들, 오늘은 여기에서 멈춰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 쉼터까지 가려면 야밤에 몰아야 하는데….”
“서쪽의 길은 좀 험한 건 알죠. 말 간수 잘하시고 밤에 푹 쉬세요.”
“예예, 잘 아시는 걸 보니 서부 출신이신가?”
익숙한 장소라는 듯 마차를 공터 구석에 주차한 뒤, 마차에서 풀어 준 말을 데리고 구석으로 향하는 마부. 식사는 혼자 해결할 생각인지 자연스럽게 빠져주네.
그러거나 말거나 마차에서 내린 일행들은 자연스럽게 한세아와 아이린의 곁으로 모여든다. 인벤토리를 통한 짐꾼 담당 한세아와 식사 담당 아이린이다 보니 그레이스와 케이티도 한 손 거들 거 없나~ 하고 따라 다니는 모양새.
그 모습에 릴리 뎁도 내 쪽으로 오려다 슬쩍 눈치를 보고 수녀복 차림인 아이린의 곁에 가서 이야기를 꺼낸다.
“수녀님? 식사를 준비해야 할 것 같은데, 혹시 짐이 어디에 있는지.”
“아, 그건 한나 양이 꺼내 줄 거예요.”
“꺼내준다뇨?”
-한세아의 눈부신 활약(짐꾼)
-현실에서는인방스타인내가이세계에선인벤토리만렙짐꾼?
-멈추지 않는 한세아 천재 마법사설
-으아닛어떻게허공에서물건을꺼내다니이게마법인가
-진짜 징하게도 우려먹는다
“내가 우려 먹는 게 아니잖아! …아, 냄비부터 꺼낼게요. 물은 떠 올 곳이 없어 보이니 마법으로 만들어야겠죠?”
“세, 세상에! 짐을 마법의 공간에 넣어둘 수 있는 겁니까? 이런 마법이 있으면…!”
허공에서 냄비를 꺼내 드는 한세아와 눈이 휘둥그렇게 뜨이는 릴리 뎁의 모습. 그 코미디 같은 모습에 시청자들이 레퍼토리가 되어버린 한세아 천재 마법사를 도배하며 열심히 놀려 먹기 시작한다.
게이트가 열리고 보스 이벤트가 생겨 잠시 잉여 매물이 생긴 마석을 가지고 상행을 떠나는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릴리 뎁의 파티는 모험 이외에도 가벼운 무역에도 손을 대서 돈을 버는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솔직히 이 세상이 게임이란 걸 알아도 허공에서 사람이 들어갈 크기의 냄비를 슬쩍 꺼내는 건 신기하기 그지없는 장면이긴 해.
히어로즈 크로니클은 가상 현실 게임이다. 정해진 메인 스토리 라인이 있다지만 진짜 사람 같은 NPC가 왕국을 가득 채우고 있어 플레이어와 상관없이 랜덤 이벤트를 발생시키는 게임이지. 애초에 내게는 10년간 게임이 아니라 진짜 현실이었으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게임의 스케일 덕에 인터넷 뉴스는 물론이요 지상파에서도 가상 현실 게임의 안정성 어쩌고, 윤리와 도덕이 저쩌고- 하면서 말이 나온 것 같던데, 아무튼.
“마석이 그렇게 많이 풀렸나요?”
“가장 많이 풀린 건 뿔늑대 마석이죠. 만월 늑대가 몰고 나온 뿔늑대가 워낙 많은 데다, 10층 게이트가 열려서 안전하게 살려는 중급 모험가들도 10층에서 뿔늑대를 찾아다니니까. 마법사들이 마석을 아무리 많이 사용한다 해도 물량이 세 배 넘게 풀리면 남는 게 생기기 마련이고.”
플레이어인 한세아가 메인 시나리오를 진행하며 탑에 게이트를 뽕뽕 뚫기 시작하니 마석의 시세도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다.
오가는 시간이 줄어들고, 보스 몬스터 이벤트 때문에 희귀 몬스터가 범람하듯 튀어나왔다. 거기에 이변을 조사하기 위해 중급과 상급 모험가 등 위에 있어야 할 모험가와 마법사까지 아래로 우르르 몰려 왔으니 과잉 공급이 되는 건 당연한 이야기.
그렇게 모닥불 주변에 둘러앉아 아이린 표 뜨끈한 스튜에서 큼지막한 고기를 건져 먹으며 릴리 뎁의 이야기를 듣는다. 마부는 육포로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는지 빠져 있었지만, 마음씨 고운 우리 예비 성녀님이 스튜를 한 그릇 챙겨준 상황.
-먼 시장 논리까지 구현을 해 놨대;;
-마석이 남아서 팔러갔다가 조졌다는 건가?
-근데 동료들이 마석 들고 닌자가 되었다면?
-삼성 이사가 맥북 하나 훔치느라 감옥가는 소리 ㄴ
-어쩐지 탑 안가고 보부상된 애들이 징징대더니 자영업자 현실고증때문이었나
인벤토리라는 아공간 마법 덕분에 신선하고 뜨끈한 스튜를 양껏 즐길 수 있다는 기쁨으로 세 그릇이나 꿀떡 삼켜버린 릴리 뎁이 빈 그릇을 만지작거리며 설명을 이어나간다.
“우리 파티도 소문을 듣고 10층에서 마석을 꽤 모았어요. 근데 마석 가격이 잠깐 내려가니까 욕심이 나더군요. 서쪽 항구도시에 가서 거기에 있는 마탑에 팔면 배는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아니, 탑에서 벌어진 이상 현상을 곁들여서 협상만 잘하면 세 배는 받을 수 있다는 계산을 해서.”
“세 배라, 마차 하나에 싣고 갔다고 했으니 상행을 떠날 만하기는 하네요.”
반나절 마차를 타고 이동했음에도 아직 덜 친해졌는지 데면데면하게 존댓말로 대화를 나누는 일행들. 신분제가 있는 세상이다 보니 북부잼민이가 아무리 귀엽게 논다 해도 귀족 출신이라는 거리감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뭐, 저러다 한세아가 옆에 착 달라붙어서 샤바샤바 하면 도시에 도착하기 전엔 말 놓고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되겠지. 그레이스도 아이린도 그렇게 한세아에게 함락당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서쪽으로 가 모리스 백작령으로 가 볼 생각입니다. 항구도시와 교류가 활발한 영지고, 우리 파티한테 익숙한 곳이거든요.”
“익숙한 곳이라면, 모리스 백작령 출신이신가요?”
“저는 그 인근 영지 출신이고, 사라진 놈 중 한 명이 거기 출신이라 알고 지내는 상단이 있거든요. …음?”
“저, 롤랑?”
타닥, 탁- 뭉근하게 끓어오른 스튜 냄비 아래에서 모닥불이 불똥을 튀기며 장작을 불사른다. 릴리 뎁의 느릿한 목소리와 이것저것 물어보는 한세아의 목소리 사이에 추임새처럼 들려오는 온갖 소리.
장작이 갈라지고, 불똥이 튀고, 거의 바닥을 드러낸 스튜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며 거품 터트리는 소리를 낼 때 그레이스가 무언가를 탐지한다.
“…풀벌레 소리가 멎었어.”
-와캬파 무슨 판타지 영화 보는 것 같네
-나 저거 무협지 소설에서 봤음 ㅋㅋ
-개가튼대사인데 눈나가하니까 걸크러쉬네 헤으응
-그 와중에 마망이랑 한세아 둘만 얼타고있음 ㅋㅋ
-근데 마차 타고 하루차면 뭐 나올 것도 없을텐데?
물론 시야 한구석에 띄워 둔 한세아의 방송 창 덕분에 진지함 따위는 없었다. 도시에서 마차 타고 하루밖에 움직이지 않은 상황인데 나를 위협할 만한 위험한 게 튀어나올 리 없잖아.
그렇게 고요해진 숲속에서 울려 퍼지는 조용한 늑대 울음소리.
“…늑대? 늑대라고?”
“늑대라, 말 때문에 온 걸까?”
가장 먼저 이상함을 느낀 것은 화전민 마을에서 사냥꾼으로 활동하던 그레이스. 그녀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돌려 주변을 휙휙 살펴보자 칼 손잡이 위에 손을 올린 케이티가 의아하다는 듯 질문을 던진다.
먼 길 떠나 노숙을 하던 중 늑대 무리를 마주하는 건 이 세상에선 상식을 넘어 일상에 가까운 일이니까. 늑대 무리만 있겠는가, 떠돌이 몬스터들의 습격 또한 교통사고처럼 늘 일어나는 일이지.
하지만 그레이스의 의견은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