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화 (142/175)

20층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30층의 보상, 마왕에게 멸망한 다른 세상이 융합된 30층. 이러면 31층에서 40층까지의 늪지대가 얼마나 좆같이 변했을지 걱정이 되거든. 안 그래도 열악한 환경이라 37층에서 내려왔는데, 거기서 한층 더 악랄하게 변했다면…?

 “아무튼, 큰돈이 들어올 테니까 장비를 한층 더 보강하는 걸 생각해 봐. 금화 수백 개면 마탑에 주문 제작을 할….”

 “롤랑? …아, 뭐야. 중요한 이야기 중이었어?”

그렇게 이야기가 일단락될 즈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찰랑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질끈 묶은 포니테일의 여성. 늘씬한 몸매와 기다란 창이 인상적인 미녀, 릴리 뎁이었다. 37층에서 모험 때려치우고 나온 뒤에는 잘 만나지 못했는데 무슨 일이 있나?

낯선 사람의 등장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일행들의 고개가 휙 돌아간다.

4★ ‘굳건한 뿌리’ 릴리 뎁.

장창을 사용하는 파티의 전위로서, 방패 역을 맡은 모험가 뒤에서 사거리를 이용해 몬스터를 손쉽게 제압하던 재능 있는 모험가다. 내려간 눈매 덕분에 순둥이같이 부드러운 강아지상이지만 매사에 이 악물고 달려드는 부류. 좋게 말하자면 노력파고, 나쁘게 말하자면 악바리에 가깝다.

별이 붙은 덕에 외모 버프도 받아서 그런지 강아지상에서 강아지상 아이돌 수준으로 바뀐 갈색 머리의 미녀가 내게 친근하게 다가오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그레이스. 지난번 고위 모험가들이 모였을 때 릴리 뎁이 내게 친분을 과시했던 걸 기억하는지 슬그머니 내 곁으로 달라붙는다.

…이 와중에 한세아가 침을 꼴딱 삼키는 건 모른 척 넘어가야겠지?

 “롤랑, 한 건 하고 내려왔다며? 쉬려고 했다면 미안하지만, 의뢰를 맡기고 싶은데.”

 “의뢰? 니가 나한테?”

그러거나 말거나 은근히 다급해 보이는 릴리 뎁이 말을 이어나간다.

태생 4★이며 내가 현역으로 뛸 때 35층까지 올랐던 거로 기억하는데 본인이 직접 해결하지 않고 의뢰를 하려는 이유가 뭘까.

같은 4★이라 해도 실전을 뛴 지 1년이 조금 넘은 케이티 웰즐리보다 8년 넘게 탑에서 실전을 뛴 릴리 뎁은 레벨이라 불러도 될 경험치가 훨씬 높을 텐데. 그녀 정도라면 대형종 몬스터가 갑자기 등장한 게 아닌 이상 혼자서 다 해결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 애 중 하나가 사고를 쳤어. 아니, 친 건지 당한 건지 모르겠는데.”

 “…뭐?”

 “이번에 게이트 뚫린 것 때문에 마석이 좀 남았잖아? 뿔늑대나 오크 마석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와서, 좀 남은 물량이 있었거든. 그걸 우리 애들이 서쪽에 팔러 간다고 상행을 나서선 연락이 끊겼어.”

그러나 이어지는 그녀의 설명에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8년간 모험가 생활을 한 그녀의 일행들은, 당연하게도 그녀와 엇비슷한 실력자. 나처럼 하위 모험가 파티에 합류해 키워주는 게 아니라면 비슷한 실력의 모험가끼리 모이는 게 당연하니까.

릴리 뎁의 말은 대충 35층쯤에서 활동하는 상급 모험가 무리가 탑도 아니고 왕국 내부에서 연락이 끊겼다는 이야기였다. 상급 모험가가 고작해야 오크 마석을 훔쳐서 달아날 리 없으니 안 좋은 일을 당했을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대형 몬스터가 등장했든, 정체를 알 수 없는 실력자 집단에 당했든 간에.

 ‘좆 같은 판타지 세상. 뭔 교통사고도 아니고 저런 사고를 걱정해야 해?’

어디 먼 거리를 간 것도 아니고, 마차 타고 일주일 거리다. 마차를 타고 일주일이라 하니 대단히 먼 것 같지만 마차가 하루에 대충 50km 남짓하게 이동한다는 걸 생각해보면 서울에서 부산 정도의 거리.

서울 사는 사람이 부산에 출장 가서 맹수에 물려갔거나 집단 강도에게 털렸거나- 같은 사건이 터지니 속이 답답할 수밖에. 이러니까 내가 악착같이 돈 모아서 평화로운 영지 하나 구매해 마도구로 점칠 된 노후를 즐기려고 마음먹었지.

 “솔직히, 그 녀석들이 나 하나 물 먹이자고 고작 오크의 마석을 들고 잠적할 놈들이 아니야.”

 “상급 모험가가 오크의 마석을 욕심낼 이유가 없지.”

 “맞아. 그놈들이 벌어둔 돈이 얼마고, 이 도시에서 쌓아 올린 인맥과 명성이 있는데 고작 그딴 중하급 마석에 그런 일을 벌일 리 없잖아.”

그래도, 이건 거절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탱커지 사람 찾는 용역이 아니니까. CCTV도 주민등록증도 없는 이 세상에서 왕국 서부 지역에서 김 서방을 찾아오라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의뢰인가. 말을 꺼낸 릴리 뎁 또한 염치없고 미안해서 죽겠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지 않나.

그래, 두 명의 추임새만 없었더라면 거절했을 텐데.

 “어, 서브 퀘스트….”

 “…그, 그러면 이 의뢰, 받는 게 어떨까 롤랑?”

내 귀에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한세아. 아무래도 릴리 뎁의 캐릭터 창을 확인하고 있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모양이다. 방송은 꺼져 있어도 플레이어의 필터링은 확실히 되어 있는지 일행들은 듣지 못했어도 나는 확실하게 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건 황급한 케이티의 목소리.

 “알고 지내는 사이인 것 같은데 도와주는 게 좋겠어. 그리고 나, 나는 북부 사람이라 아직 서쪽에 가보지 못한 것도 있고.”

 “케이티, 너….”

마음씨 고운 아이린은 대견한 아이 바라보듯 그녀를 바라보고, 릴리 뎁은 성격상 은인이라도 모실 것 같은 눈으로 부리부리하게 그녀를 바라보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한세아도 느꼈겠지.

우리 북부 잼민이는 골렘을 사러 오는 아빠를 피해 서부로 가고 싶어 한다는 걸.

왕국의 동서남북 각 지형은 히로인즈 크로니클의 속성 던전, 이벤트 던전으로 이루어진 모양새다. 북부의 설산과 설원은 당연하게도 크리스마스와 겨울 시즌 이벤트, 그리고 속성 마력석 던전을 위한 필드인 것처럼.

북부가 겨울 필드라면 서부는 여름 필드. 어째서 남부가 아닌가- 싶지만 남부는 늪지대와 밀림으로 가죽 비키니를 입은 야만 전사 누님과 동탄 미시룩처럼 딱 달라붙는 로브를 입은 마녀 누님들을 위한 배경이거든.

씹덕용 가챠 게임에 없을 리 없는 해변의 비키니 스킨의 배경이 되는 곳이 왕국의 서부 지역이다. 덤으로 섹시 카우보이를 위한 황무지도 덤으로 껴 있고. 서쪽으로 쭉 가면 항구 도시가 나오고, 거기서 북쪽으로 꺾으면 사람이 못 사는 황무지가 가로막은 형상.

 “어쩌면 고원지대에서 대형종이 아래로 내려왔을지도 몰라.”

 “확실히, 지금으로서는 그게 가능성이 제일 크군.”

요컨대 중세 판타지 식으로 안전하지 않다는 소리였다.

비키니 스킨의 배경과 여름 해변 이벤트의 배경이라 해도 그건 히로인즈 크로니클의 이야기. 히어로즈 크로니클엔 그딴 게 없으니 남아 있는 건 황무지를 맴도는 대형종 몬스터와 바다에서 기어 나오는 해저 몬스터들뿐이다.

남부보다는 안전하지만, 북부나 동부보다는 위험한 동네. 딱 그 정도.

 “원래는 롤랑, 네게만 맡길 생각이었는데…. 파티원들이 응한다면 정식으로 마법사 한나 파티에 의뢰할게.”

 “일단, 저는 찬성입니다.”

 “저희가 탑을 올라야 한다지만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면, 여신께서도 미소지으실 거예요.”

그래도 아빠를 피하고 싶어 하는 북부 잼민이와, 사람 구하는 일을 거절할 리 없는 예비 성녀님이 찬성하니 당연히 의뢰를 받아들이는 분위기로 흘러간다. 그레이스야 이런 일에서는 딱히 모나게 구는 일 없이 내 의견을 따르는 편이고, 한세아는 퀘스트 창이 떠버렸으니까.

김석현이 아무리 빠르게 30층까지 올라왔다지만, 너무 급히 올라온 탓에 골렘 마석도 파밍 하지 않고 온 상황. 굴려야 할 탑승형 골렘은 네 대인데 마석이 두 개 정도라 했던가? 마석 캐고, 골렘 고치고, 나처럼 맨몸으로 유인할 수 없을 테니 유인향도 만들고.

같은 30층이지만 시간으로 따지면 거의 2주 정도 차이가 나겠네. 한세아가 1위 빼앗길 걱정 없이 느긋하게 다녀와도 되겠어.

 “저도 찬성이에요. 서부에는 관심이 있기도 하고, 사람 구하는 일에 롤랑 지인분이시라면야.”

한세아도 나와 같은 계산을 끝마쳤는지 한 박자 늦게 찬성 의사를 내비쳤다. 보수를 듣기도 전에 돕겠노라 나서는 모습에 감동으로 물드는 릴리 뎁의 눈동자. 열혈과 노력과 근성으로 가득 찬 여자다 보니 이런 쪽으로 감동을 크게 받나 보네.

…저 중 한 명이 받아들이는 이유가 아빠를 피해 북부에서 중부를 거쳐 서부까지 튀는 우당탕탕 가출 대소동이라는 건 모르는 게 마음 편하겠지.

 “가, 감사합니다! 여러분! 보수는 빚을 져서라도 두둑하게 드리겠습니다!”

그런 깜찍한 속셈도 모른 채 포니테일의 꽁지 부분을 휘날리며 고개를 꾸벅꾸벅 숙여 보이는 릴리 뎁. 염치없는 의뢰를 고심 끝에 내밀었는데, 한 명도 아니고 단체로 돕겠노라 흔쾌히 수락하니 감동할 수밖에.

그렇게 탑 공략이 아닌 서부행 의뢰가 순식간에 결정되었다.

 “오늘은 서브 퀘스트를 받아서 탑이 아니라 왕국 서부로 가 볼 생각이야. 시청자 중에 서부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있나 모르겠네.”

-서부 황무지 잘못 들어갔다가 식수 없어서 뒤짐 마법사가 귀하긴 하더라;;

-탑 바깥 싸돌아 다니는 애들 대부분 동부로 가지 않나?

-만만한게 동부니까 서북남 플레이어는 거의 없더라

-전에 념글 보니까 서쪽가서 어부짓하는 똘갱이 하나 있던데

-걔 대어 낚겠다고 내해 벗어났다가 문어밥되고 겜 접음

다각다각 움직이는 마차에서, 한세아가 방송을 켜고 시청자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카메라가 비추고 있는 것은 우리 일행들이 아니라 장창을 품에 안고 있는 릴리 뎁. 새로운 미녀와 함께 낯선 서부로 향한다고 하니 시청자들이 한 마디씩 던져 채팅창이 곧바로 달아오른다.

탑 바깥으로 나가 활동을 하는 플레이어들이 꽤 있다지만 채팅창에서 나온 말대로 서부는 꽤 험난한 지역. 그러다 보니 서부의 깊숙하고 머나먼 곳은 시청자들에게 있어 미지의 공간이나 마찬가지다.

 “일단 설명을 하자면, 여기 릴리 뎁이라는 모험가가 롤랑의 지인이야. 근데 동료들이 게이트 때문에 넘쳐난 마석 물량을 가지고 상행을 나섰다가 서쪽에서 연락이 끊겼다네. 상급 모험가들이 고작 오크 마석을 들고 도망칠 리 없으니 뭔가 문제가 생겼구나- 하고 의뢰가 들어왔어.”

-먼 ㅋㅋ 흥신소도 아니고 사람 찾으러 가네

-이게 1위의 품격? 이게 1위의 품격? 이게 1위의 품격? 이게 1위의 품격? 이게 1위의 품격?

-팩트)김석현 마석고갈로 인해 21층으로 빠꾸함

-걍 공략 속도 신경 안 쓰고 게임 즐길라면 천천히 파밍하면서 가는 게 맞다

-좆대로 달리면 머가리 깨진다고 비비게임즈가 친히 알려주자너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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