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9화 (139/175)

골렘을 조종하는 여자들에 대한 성욕 고백부터 골렘들의 장갑 차이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을 나누는 메카 덕후들, 포인트 내기에 대해 이를 악물고 보스 몬스터 이야기를 꺼내는 시청자들과 비밀기지와 폭발 엔딩에 대해 떠들며 한세아가 터져 죽는가 아닌가로 제 주장을 펼치는 악질들까지.

 “어때, 아이린. 골렘은 움직일 만해?”

 “네, 네! 방패를 들고 걷는 게 조금 어색하긴 한데, 생각보다 진짜 몸처럼 움직이네요?”

단검을 든 도적형 골렘에는 한세아가, 방패를 든 탱커형 골렘에는 아이린이 탑승한 상태. 그리고 나는 널찍한 어깨 견갑을 지닌 탱커형 골렘 어깨 위에 앉아 있었다.

혹시나의 사태를 대비해 네 개의 골렘을 전부 끌고 가는 중이지만 이 중 몸 쓰는 일이 제일 미숙한 건 아이린이었으니까. 날렵한 그레이스와 검사 케이티야 당연히 몸 쓰는 데 익숙하고, 한세아도 나름대로 운동 유튜버를 겸직해서 그런지 운동신경은 좋거든.

아이린이 탑승한 골렘 어깨에 앉아 있는 나를 아쉽다는 듯 쳐다보는 한세아가 조금 마음에 걸리지만, 아무튼 우리는 갑작스럽게 생겨난 비밀 통로를 통해 B-301F라는 미지의 지역을 향해 나아갔다.

쿵쿵, 커다란 골렘 네 구가 줄지어 걷자 어둑한 비밀 통로에 묵직한 발소리가 울린다.

가상 현실 게임이 출시되더니, 전 세계 유일 태생 6★ 동료가 당첨되어선, 세계 1위로 게임을 달리다가 갑자기 신장 6m짜리 탑승형 골렘을 조종 중이다. 규칙적인 운동 방송과 남는 시간에 하는 게임 방송으로 유명한 자신과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이야기.

과거의 자신에게 ‘너는 앞으로 가상 현실 게임 세계 1위 랭커가 되어 생방송 시청자 십만 명은 가볍게 돌파하는 글로벌 방송인이 될 거야.’라고 말한다면 과연 믿을 수 있었을까.

[9시뉴스게임여신한세아님 10,000원 기부!]

[뉴스 인터뷰 합성 움짤.GIF]

한세아 인터넷 뉴스에 이어 지상파에도 떳냐

 “야! 다른 건 몰라도 합성으로 놀리지 말라고!”

그럴 리 있나.

애초에 뻣뻣한 A.I.도 아니고 진짜 사람처럼 움직이는 NPC들이 있는 가상 현실 게임 자체를 믿지 못할걸.

와르르 몰려들던 신전의 아이들도 그렇고, 마망이라는 별명이 이해가 되는 아이린과 종잡을 수 없는 북부 잼민이 케이티도 있지만 가장 신기한 건 그레이스. 여자끼리 있을 땐 털털한 언니인데, 사랑하는 남자 앞에 서면 수줍은 소녀가 된다.

텍스트로만 만들어진 캐릭터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입체적인 성격의 구현. 거기에 술에 취했을 때 보여주는 저돌적인 면모 등 너무나도 인간다운 모습에 가끔은 소름이 돋을 지경이니까.

 “바로 옆 구역일 줄 알았는데, 통로가 꽤 깊군.”

 “그러게요. 설마 폭발이 일어나서 길이 막히는 건 아니겠죠?”

 “그럴 가능성은 작을 거다. 그 정도로 긴박한 상황이면 저 여성의 목소리가 파일럿이라는 사람에게 도망치라고 했을 테니까. 이런 커다란 골렘을 전문적으로 운용하는 인력을 위험한 곳에 대충 던져 넣을 리 없지.”

 “하긴, 이런 대단한 물건을 움직일 사람이라면 다른 세상이라 해도 기사님이나 마법사님 정도는 돼야겠네요.”

거기에 등 뒤에서 대화를 나누는 롤랑이라는 NPC 또한 여러 의미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시청자들의 성화 겸 게이머의 호기심으로 시작한 이 게임에서 처음으로 만난 NPC이며, 나를 세계 1위로 만든 장본인.

찬란한 금발 머리카락, 보석처럼 푸른 눈동자, 서른이 넘은 나이지만 앳됨이 남아 있는 것 같은 부드러우면서도 아름다운 얼굴까지. 그렇다고 성품이 모난 것도 아니니 그레이스 언니가 푹 빠지는 게 이해가 되긴 한다.

지난번에 보니 게임 커뮤니티가 아닌 평범한 인터넷 카페 같은 곳에도 롤랑의 사진이 떠돌아다닌다고 했던가. 신인 아이돌이니 새로 데뷔한 할리우드 배우니 하는 낚시글에 잘 쓰이고 있다고 어느 시청자가 글을 올렸었지.

 “롤랑, 통로가 끝나는 것 같아.”

 “들었지? 다들 전투 준비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와중 어둡고 커다란, 동굴 같던 통로가 결국 끝을 맞이했다. 시야 한구석에서는 진짜 보스 몬스터에 대한 기대감으로 난동을 피우는 시청자가, 다른 쪽에는 시청자들을 위해 띄워 둔 퀘스트창.

게이머로서, 그리고 방송인으로서의 준비를 끝마친 채 기잉- 소리를 내는 골렘을 움직였다. 물론, 아이러니하게도 평균 신장 6m의 강철 거인들의 앞에 든든하게 서 있는 것은 2m가 채 되지 않는 갑옷 차림의 인간.

어찌 보면 이상한 이야기지만, 저 근육질의 몸 위에 입혀진 얇은 철판이 신장 6m에 무게 수십 톤짜리 강철 거인보다 튼튼하기 때문이다.

-탱커(갑옷) 딜러(골렘) 이게 맞나요?

-골렘에 탄 상태로 내려다보니까 롤랑센세 존나 쬐깐해보이네 ㅋㅋㅋ

-180cm 넘는 새끼들은 이런 시선으로 날 봤던걸까...

-180을 넘는게 아니라 600이 넘잖아 카메라 높이가 시발아 ㅋㅋㅋㅋ

-카메라 캐릭터에만 붙일 수 있음? 이거 카메라로 보스부터 확인 못하나

평소의 그 듬직한 모습과 대비되는 것 같은 앙증맞은 모습. 롤랑이 아무리 키가 크고 체구가 듬직하다 해도 6m짜리 강철 골렘 앞에 있으면 고작 무릎에나 올까 말까 한 높이니 어쩔 수 없지.

물론, 시청자들의 웃음이 나에 대한 욕설로 바뀌는 것에는 채 1분이 걸리지 않았다.

 “흐음, 이건 또 뭐야?”

 “롤랑? 괜찮은 거 맞지?”

통로의 조명이 끝난 어둠 속, 301E 지역처럼 텅 비어 있어야 할 공터에서 은밀하지만, 위협적인 무언가가 우리에게 날아들었으니까.

케이티가 반응해서 검을 들기도 전에, 아이린 언니가 반응해서 보호막을 사용하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불똥만을 튀기고 사라진 무언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우렁찬 롤랑의 목소리가 마력을 담은 채 귓가에 때려 박힌다.

 “한나, 골렘을 탄 채로 마법을 쓸 수 있다면 바로 불을 밝혀!”

 “아, 알겠어!”

시야 한구석에서 올라오는 채팅 따위에 신경도 쓰지 않고 귓가에 들려온 명령을 따른다. 플레이어로서 자존심이니 뭐니를 언급하기에는 롤랑의 실력이 수상할 정도로 뛰어났으니까.

골렘의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게 해 주는 수정구에서 망설임 없이 손을 뗀 뒤, 콕핏 구석에 세워둔 지팡이를 붙잡는다. 마법사형 골렘이 아니라 해서, 골렘 내부에 걸터앉은 채 마법을 사용하는 게 금지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우리 애가 말은 잘 들어요

-빛나는 활약 맞다니까? 이 넓은 장소가 환하게 빛나자너

-어이구 우리 조명팀 일 잘한다

-스트리머 짬빱 어디 안 가서 조명맨 에이스로 데뷔하는 거 봐라

-롤랑의 휴대용 샤워기 겸 간이 조명이라… 매조뇨예련인가요?

[관리자에 의해 삭제된 채팅입니다]

그렇게 드러난 어둑한 공터와 시청자들이 기대하고 기대하던 보스 몬스터의 정체.

골렘이 있던 301E와 똑같은 공간인지 301F의 넓은 공터는 부숴진 조명만 빼면 완전히 똑같았다. 맨들맨들하고 넓은 공터, 벽면에 있는 격납고 문, 천장과 벽면에 드문드문 있는 박살난 조명들까지.

문제가 있다면 그 넓은 공터 중앙에 똬리를 틀고 있는 커다란 몬스터였다.

 “저건… 뱀인가? 날아온 건 꼬리고?”

-역배는승리한다!역배는승리한다!역배는승리한다!역배는승리한다!역배는승리한다!

-엄마내추억이전부사라졌어나너무춥고어두운데왜너희는웃고있는거야너희만행복한거야

-야 잠깐만 뱀 아닌거 가튼데 좀 기다려보라고 제발씨발아

-조명팀 뭐하냐고 빨리 조명 똑바로 하고 카메라 비추라고!

-2찍 새끼들 지금 똥줄타서 발작하죠? 시간 되돌리고 싶죠? 근데 안되죠?

1번 동굴 몬스터가 47%, 2번 미궁 몬스터가 53%였던가. 저렇게 미쳐 날뛰기 시작하면 벤을 때려도 진정될 리가 없다는 건 다년간의 방송 경험 덕분에 알고 있다. 어느 정도 머리가 식으면 적당히 쫓아내고 걸러내야 정신을 차리지.

그러니 지금은 채팅창 따위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라, 눈앞의 보스 몬스터를 해결해야 할 상황.

 “롤랑, 엄호할게!”

 “붙잡고 있을 테니까 약점으로 보이는 부분을 찾아!”

공터에 똬리를 틀고 있는 커다란 뱀은 누가 봐도 ‘장님뱀’은 아닌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새빨갛게 빛나는 커다란 눈동자는 공포 영화에서 볼 법한 귀신의 얼굴보다 무시무시한 기세를 띠고 있었으니까.

다양한 공포 게임을 해 봤지만, 저 뱀의 눈동자보다 무서운 귀신은 본 적 없는 것 같네. 가상 현실 게임이라는 게 이런 기세와 분위기까지 구현할 수 있는 게 맞나?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며 공포감을 금방 사라지게 해 주는 롤랑의 활약을 지켜보았다.

자이언트 웜보다 크니까 거의 20m는 되는 것 같은 기다란 뱀이, 2m도 되지 않는 인간에게 아가리를 붙잡혀 지렁이처럼 꿈틀대는 그런 장면을.

-저… 게임 밸런스 괜찮은 거 맞습니까?

-탱커가 딜 포기하고 탱킹하니까 양심이란게 사라지는데여

-뱅송 재미를 생각하면 롤랑은 팬티만 입고 돌아다녀야 할듯

-어차피 맨손으로 붙잡았는데 팬티차림이면 뭐 다르냐

-이거 보고 한세아 구독버튼 세 번 더 눌렀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세아더롤랑등골브레이커님 10,000원 기부!]

얼타지 말고 퀘스트 창 확인 좀 해달라고 구석에 띄워놓고 왜 보여주질않냐 꼴받게

 “아, 등골브레이커님 만 원 감사합니다. 퀘스트요? 아 맞네… 근데 님들, 솔직히 눈앞에서 사람이 20m짜리 뱀을 수타짜장 면발처럼 바닥에 치대고 있는데 어떻게 얼을 안 탐?”

[자이언트 웜의 시체로 만든 골렘은 녀석들을 극도로 흥분시키는 것 같다]

[하지만 30층을 돌아다니는 웜들은 분노했다기보다는 두려움에 질린 것 같은데…]

[대체 어떤 녀석이 저 커다란 자이언트 웜을 겁에 질리게 했을까?]

쾅, 콰직, 카드드드득―

다양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불쌍하게 나뒹구는 거대한 뱀을 보며 시청자의 훈수대로 퀘스트 창을 확인했다.

이거라도 읽어 두고 대충 이야기를 짜내야 파티의 마법사 행세를 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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