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이, 씹! …아무튼, 유인 향 비슷한 거라도 만들면 되는 거 아니야.”
시청자들의 잔소리를 이겨내지 못한 한세아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인벤토리에서 골렘의 마석을 꺼내 든다.
내가 고함을 지르며 대략 십분 넘게 허탕을 치자 한세아는 그런 생각을 한 것 같았다.
‘바위 골렘의 마석도 자이언트 웜의 시체를 가공한 거, 아닌가?’
망가진 골렘을 수리하는 재료로 자이언트 웜의 시체가 필요하고, 골렘 수리 시설의 액화 마력 탱크에도 자이언트 웜의 시체가 필요하면, 바위 골렘의 마석도 자이언트 웜의 시체에서 뽑아낸 마력을 가공해서 만든 마석일 것이다- 하는 추측.
“어, 엄마야아아악-!”
-방금 전 까지는 되게 멋진 마법사였는데…
-아 이게 사네
-롤랑 없었으면 자이언트 웜 영양간식 될 뻔
-그 달리기 속도로 웨깝침?
-생각을 하셨다는 분이 숨을 곳 없는 외길 통로에서 도발을 쓰시나여
그리고 그 추측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진 것 같다.
한세아가 통로를 통해 밖으로 나와 인벤토리에서 꺼낸 마석을 동굴 벽면에 박박 긁자마자 득달같이 자이언트 웜이 달려들었으니까.
방송을 보고 있던 내가 인기척을 느낀 척 격납고 쪽 통로로 돌아가지 않았더라면 한세아는 김석현과 마찬가지로 분쇄육이 되어 아침으로 되돌아갈 뻔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실험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등 뒤에서 미친 듯이 달려오는 자이언트 웜과 품 안에 안겨 있는 겁에 질린 미녀. 무슨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는 모양새에 시청자들도 잠시 갈굼을 멈추고 나의 질주를 구경한다.
그렇게 공터 내부로 유인된 자이언트 웜은 마석 하나보다는 커다란 골렘에 어그로가 끌리게 되는데―
“뭐 하는 거야?!”
“아, 아니 그게에… 혹시 기사형 골렘이 아니라 마석으로도 유인할 수 있나 싶어서.”
“그러면 공터 안에서 해도 상관은 없었잖아? 아니면 피할 곳이 있는 곳에서 하던가!”
작전이 성공적이든 말든 혼은 나야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파티의 리더가 돌발 행동을 해서 혼자 자살을 할 뻔한 상황이다. 아무리 부활할 수 있고 시간이 되감아 지는 게임이라 해도 그건 게이머로서의 입장.
일행들에게는 설명도 없이 해볼 게 있다면서 무언가를 시도하고, 그 결과 혼자 죽을 뻔했다. 파티의 리더로서는 해서는 안 될 행동들로 꽉 채운 종합선물세트 같은 느낌이네. 공주님 안기로 모셔온 파티장을 바닥에 탁 내려놓으니 그녀가 곧바로 고개를 꾸벅 숙인다.
“아니, 그, …죄송합니다.”
“일단 저거부터 잡고 이야기할 테니까, 바로 마법 준비해!”
-개깝치다가 얼굴 맞대니까 바로 쫄았쥬?
-그렇지 센세가 혼을 내야 센세지
-여신 만나기 전이었으면 롤랑 탈퇴 각이었는데 이게 사네
-그레이스 밀어준다면서 지가 꼬리치쥬?
-어어 눈치 챙겨라 눈나 심기 불편하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마석의 어그로 범위가 생각보다 넓었는지, 멀리서 온 자이언트 웜에 치이는 일은 없었다.
한세아를 품에 안고 동굴 내부로 허겁지겁 달려들자마자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보는 일행들에게 설명도 하기 전에 자이언트 웜이 들이닥쳐서 난리가 날 뻔했지만, 그래도 죽거나 다치는 일은 없었으니 다행이지.
“붙잡고 있어, 허리를 끊는다!”
“알겠, 어!”
케이든에서 케이티로 돌아갔다고 바로 말을 놓아버리는 우리 북부 잼민이가 확연히 낮아진 출력의 기사 골렘으로 자이언트 웜의 아가리를 붙잡는다.
강화된 상태가 아니라서 그런지 자이언트 웜이 휘감으려고 그 기다란 몸을 펄떡거릴 때마다 휘청거리는 기사형 골렘. 넘어지거나 밀리는 건 아니지만 첫날처럼 후려쳐 밀어내고 검으로 베어내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착 달라붙어서 싸우네.
그 모습에 요즘 쓸 일이 없던 철퇴를 들어 올려 마력을 집중시킨다. 어째 보스 몬스터 전용 무기가 되어가는 것 같아.
“저 껍질, 그냥 바위다! 한나! 골렘 팔다리 뗄 때 썼던 마법으로 약화시켜!”
“아, 알겠어!”
그래도 게임인지라 죽을 뻔했다고 패닉에 빠지거나 실수하는 일 없이 내 말을 듣기도 전에 공격 마법 대신 바위 융해 마법을 준비하던 한세아가 곧바로 마법을 발동시킨다. 이런 걸 보면 전투 센스는 참 뛰어난데 이상한 곳에서 얼빠진 짓을 한단 말이지.
마법이 적중하자 자이언트 웜의 우둘투둘한 바위 갑피 중 일부가 질척하게 녹아내린다. 피부가 바위 같은 게 아니라, 피부 위에 진짜로 암석 조각을 붙이고 다니는 놈이라 그런지 마법 저항력 따위는 없는 모습.
“저 부분, 날려버릴게!”
“앗! 조심하세요!”
명백하게 드러난 약점에 곧바로 그레이스의 화살이 박힌다. 저 커다란 덩치에 화살 두어 개 박힌다고 도움이 될까 싶었지만, 화살촉이 벌겋게 달아오르다 폭발하는 모습에 생각이 바뀌었다.
시약을 묻힌 화살을 준비했다더니, 무슨 폭탄 화살도 구매해 왔구나. 모험가로서 수입이 두둑해지자 장비에 아낌없이 투자한 모양이다. 질척하게 녹아내리던 바위 껍질이 폭발에 휘말리자 곧바로 드러나는 녀석의 우둘투둘한 진짜 피부.
아이린 또한 놀고 있을 생각은 없다는 듯 자이언트 웜의 몸부림에 산탄처럼 날아드는 껍질 조각 따위를 보호의 성법으로 완벽히 막아내는 게, 세 사람의 합이 참 잘 맞는 것 같네. 앞선 한세아의 트롤링만 아니었다면 이론적으로 완벽한 파티 플레이에 가깝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마력을 과충전하다시피 때려 박은 철퇴를 자이언트 웜의 허리에 내리찍었다.
콰직―!
※
허리가 끊어져도 꽤 오랜 시간 꿈틀거리던 질긴 생명력의 자이언트 웜. 결국, 내가 주둥이가 있는 대가리 쪽을 으스러트린 뒤에야 그 발악이 멈췄다. 검으로 아가리가 뚫렸을 땐 죽어버리더니, 허리를 반 토막 낼 땐 살아 있다니. 무슨 좀비도 아니고 머리를 부숴야 죽어.
“보호막 없었으면, 조금 끔찍한 꼴이 될 뻔했네.”
“언니, 진짜 고마워요.”
“아뇨. 이런 거라도 도움이 되어야 할 테니까요. …악취가 심할 것 같은데 정화라도 해볼까요?”
“정화는 시체가 다 사라지고 나서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허리가 잘린 채 피운 난동 덕에 널찍하던 공터는 끈적한 녹색 체액으로 범벅이 된 상황. 그레이스의 중얼거림 대로 보호의 성법이 없었더라면 일행들도 끈적한 액체에 뒤덮일 뻔했다. 물론 보호의 성법을 받지 못한 나와 기사형 골렘은….
“워터 마법 더 필요해, 롤랑?”
“마력은?”
“충분하니까 걱정하지 마. 공격 마법은 안 사용했잖아.”
차마 말하기 힘든 몰골이 되어 한세아가 빈 냄비에 가득 담아준 물로 열심히 씻는 중이다. 나야 뭐, 갑옷을 벗고 씻으면 된다지만 커다란 기사형 골렘은 사람이 샤워하듯 씻어낼 수 없으니 잠시 내버려 둘 수밖에.
그 덕에 기사형 골렘의 콕핏에서 내린 케이티가 슬픈 눈으로 골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장난감이 망가진 걸 바라보는 아이의 눈망울보다 더욱 서글퍼 보이는 눈동자.
망가진 것도 아니고 그저 끈적하고 악취 나는 체액을 듬뿍 뒤집어썼을 뿐이지만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으로 골렘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다. 코끝을 찌르는 악취가 장난 아닐 텐데 기사형 골렘이 그렇게 좋나.
“이번 전투는 아주 좋았어. 한나의 시도가 아주 무모했다는 점만 제외하면.”
“아, 그렇지?”
“마법사답다고 할 순 있지만, 모험가로서는 칭찬이 아니야.”
결국, 한세아의 워터 마법을 공격 마법 맞듯 직격으로 얻어맞고 나서야 떨어져 나간 자이언트 웜의 체액. 물에 홀딱 젖은 바지만 걸친 채 아까 하지 못한 잔소리를 이어나갔다.
“급박한 상황이 아니라면 시도해 볼 게 있을 때 일행들에게 언질을 줬어야지. 심지어 파티의 탱커인 내가 자리를 비운 상황에 시도하다니? 만약 내가 입구로 돌아오는 길이 아니었다면, 케이티가 골렘의 조종석에 앉지 않은 상태였다면 일행들이 크게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구구절절 맞는 말씀만 하시네
-그 와중에 분위기 파악 못하고 그렇지 ㅇㅈㄹ ㅋㅋㅋㅋㅋㅋ
-그 선생님은 사회생활이란 걸 해보신 적 없으십니까?
-애초에 무모했다는 말을 칭찬으로 알아 듣는 것도 레게노임 ㅋㅋㅋ
-짠해좌가 감히 세 줄로 요약할 수 없는 짠한 지능
내 질책에 한세아가 고개를 푹 숙이고 일행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인다. NPC인 내게 진정으로 죄송해한다기보단 성난 시청자 민심도 생각해야 해서 그런 것이겠지. 언제나 있는 과몰입 불편충들은 방송인이 게임에서 하는 실수에도 진심인 편이니까.
나 또한 진심으로 분노한 건 아니기에 사과를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팀원 등짝에 화살을 갈기거나 마법으로 탱커를 넘어트리는 트롤링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 아닌가.
“다음번에 무언가 시도를 할 거면 반드시 일행들에게 이야기하고, 대책을 세운 뒤 진행하도록 해. 내가 없더라도 아이린이 보호의 성법을 펼치거나 케이티가 막아 세울 수 있도록 언질은 줘야지.”
“알겠어요….”
혼쭐이 나는 상황이랍시고 자연스럽게 존대가 튀어나오는 한세아. 이 좋은 기회를 시청자들이 아니지.
-대가리 박는 클립 바로 땄죠? 주간 하이라이트에 박제 각이다 각
-롤랑한테 안기고 싶어서 수 쓰네 퐉스련 저거
-혼내든말든 안겼으면 이득이라고~ 롤랑오빠 찌찌파티중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