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거 하나를 만들려면 금화 수천 개는 필요할걸.”
“…뭐?!”
“만들 때 이야기야. 돈 받고 팔면 만 개는 넘게 받겠지.”
중급 모험가가 되어 은화 주머니를 만지고, 내가 금화를 턱턱 내미는 모습을 봤어도 만 단위의 금화는 그레이스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 상상치도 못한 천문학적인 거금 이야기에 그레이스의 눈이 순식간에 변한다.
“그런 걸 망가트린 거야? 어떻게 해….”
동정심을 느껴서라도 친해지면 좋겠네.
샤를롯의 도움을 받아 마탑과 길드에 보고하게 된 30층의 이변.
골렘의 마석으로 기동할 수 있는 기사형 골렘과 시체를 남기는 자이언트 웜의 등장, 시체와 마도구 따위를 융해하여 액화 마력을 흡수하는 이세계의 가공장, 격납고와 그 안에 숨겨진 골렘 수리 설비까지.
어지간해선 믿기 힘든 내용이지만 귀족 집안의 아가씨 겸 중위 마법사와 상급 모험가가 함께 같은 내용을 주장하니 믿을 수밖에. 거기에 내가 랜턴을 쥐여 준 두 사람이 늦지 않게 길드에 도착했는지 그들의 증언 또한 덧붙여진다.
“그래서, 모험가들은 빠지고 마법사들이 엄청나게 몰려올 거다.”
“에, 어째서?”
“모험가들은 제 목숨이 중요하니 대형종을 상대할 수 없는 실력이라면 전부 29층으로 빠져서 활동할 테고, 마법사들은 목숨보다 지식이 중요하니 안 만나면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전부 30층으로 올라올 테니까.”
그렇게 드러난 두 집단의 완벽히 상반되는 행보.
모험가들이야 29층에서 돈을 버나 30층에서 돈을 버나 어쨌든 동굴 계층이니 그렇게 큰 차이는 없다. 그리고 30층까지 올 정도면 용기와 객기를 구분할 능력 정도는 있지. 길이가 15m짜리인 대형종을 상대하겠다는 생각 따위는 없이 모두 안전하게 29층으로 향한 것이다.
반대로 마법사들은 새로운 것에 목마른 미치광이들. 땅 밖에서 행동하는 웜, 사라지지 않는 시체, 시체와 마도구에서 마력을 추출하는 기관, 사람이 탑승하는 거대 골렘까지 마법사들을 환장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요소가 가득하니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수밖에.
그나마 다행인 점은 지난번 오크 사태 이후, 상층으로 올라가는 보급이 평소보다 호화로워서 원정대의 마차가 30층의 동굴을 돌아다닐 일이 아직은 없다는 점이려나. 다른 플레이어들은 원정대 호위 미션이 서브 퀘스트로 생길지도 모르겠네.
“그러면, 우리 파티는 어떻게 할까?”
“식량만 충분하다면 한동안 30층에 머무르는 게 좋을 것 같다. 자이언트 웜 말고 넘어온 게 또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기도 하고, 저 골렘의 소유권도 이야기를 잘해 봐야 하니까.”
“골렘의 소유권이라니?”
마탑의 텐트촌 연구실의 한구석에 모인 우리 일행들이 나를 바라보며 의문 가득한 시선을 보낸다. 특히 기사형 골렘에 푹 빠진 케이티는 가문의 보물까지 날려 먹었으면서 눈이 초롱초롱해지는 게, 골렘 중독이라 불러야 할까 고민이 될 정도.
그래도 일행들 또한 기사형 골렘의 위용을 맛본지라 소유권이라는 말에 흥미를 느낀 것 같았다. 그 위용은 케이티의 마도구를 희생시킨 극도의 비효율이었지만.
“다들 알다시피, 그 골렘은 케이티가 가지고 있던 가문의 보물을 녹여버렸거든.”
“아, 그렇죠.”
내 이야기에 아픈 곳을 찔렸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는 케이티. 그런 그녀를 토닥여주는 아이린이 대신하여 대답을 해 준다. 케이티에게는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그래도 그녀 덕분에 명분이 생겼으니 좀 덜 혼날 방법을 찾아 줘야겠지.
평소대로라면 골렘을 마탑에 판매하고 연구 소재 제공에 대한 감사 답례를 받는 게 정석적인 모험가들의 루틴.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우리 북부잼민이가 아버지에게 혼쭐이 날지도 모른다.
북부 대공의 딸 바보적인 면모를 보면 혼이 나지는 않겠지만, 자칫하다간 가문에 입힌 손실을 빌미로 재교육을 위해 잡혀갈지도 몰라. 재교육을 빌미로 은근히 후계자 수업을 듣게 한 뒤 언니에게 짬을 맞고 파티에서 이탈할 가능성도 있고.
“그러니, 저 골렘이 깨어나서 멀쩡하게 움직이는 건 웰즐리 가문의 마도구 덕분인 거다.”
“…예?”
“웰즐리 가문이 보유하고 있던 마도구가 오랜 시간 탑 속에서 잠들어 있던 골렘을 깨운 거지. 그러니 저 골렘은 마탑에 판매하는 게 아닌 웰즐리 가문의 서리 늑대 기사단으로 보낸다.”
그러니 한세아 파티가 그18에서 그14가 되어버리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웰즐리 가문에게 커다랗고 달달한 사탕을 물려 줘야 한다. 감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한 마도구를 날려 먹었으니,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무언가로.
귀족들의 명예욕에 대해 잘 모르는 일행들이 무슨 뜻인가 싶어 눈만 껌뻑거리고 있을 때, 통신을 끝마친 샤를롯이 다가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살포시 웃으며 내 말을 받아준다.
“어머, 그렇게 북부로 골렘을 보내는 대신 공녀님을 파티에 남겨 둘 생각인가요?”
“그래. 가문의 금고에 잠들어 있던 귀중한 목걸이는 남들에게 내세울 수 없지만, 기사단의 선봉에 서는 강철의 기사는 그 누구에게도 자랑할 수 있을 테니까.”
“……그, 그런가요?”
요컨대 딸 바보에게 보내는 뇌물이다.
당신의 딸이 모험가로 대성하여 30층에 잠들어 있던 강철의 거인을 깨웠으니, 서리 늑대 기사단의 이름으로 이걸 사용해 북부의 몬스터를 토벌하고 명성을 떨쳐라― 같은 느낌.
접시를 깨 먹은 아이가 엄마에게 혼나지 않는 방법은, 깨진 접시 조각과 함께 100점 맞은 시험지를 잔뜩 들고 가는 것 아니겠는가.
보고를 마쳤고 작전을 세웠으니 이제는 30층을 돌아다니며 자이언트 웜을 박멸하고 어딘가에 있을 진짜 보스를 찾아야 할 상황. 한세아가 어떻게 둘러대야 할지 고민을 할 때, 나는 ‘무언가 더 넘어온 게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먼저 주장해 메인 시나리오의 진행을 주장했다.
우리가 30층에서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두 가지.
첫 번째는 자이언트 웜을 유인해 박멸하여 망가진 세 대의 골렘을 수리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어딘가에 있을 진짜 보스를 찾아내 상대하는 것이다. 물론 이건 한세아 기준이며 일행들은 진짜 보스가 있다는 걸 모르는 상황이지만.
-골렘을 다 고치면 로그가 갱신되지 않을까?
-또 개뻘짓하다 말아먹지 말고 정석적으로 해 봐
-꽃길로 가랬더니 길에서 벗어나서 날아가려고 하네
-확실히 골렘 다 고치면 골렘 네 대로 찐보스전 할 것 같음
-기사형에 궁수형이면 나머지 두 대는 뭐려나
시청자들 또한 이런 진행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지 진짜 보스에 대한 갈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포인트 배팅이 된 상황이고 자이언트 웜 때문에 판 자체가 엎어질 뻔했다 보니 조금 예민한 모양.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시간만 지나면 자연스럽게 쌓이는 포인트라 희소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사용처 또한 질문 따위를 할 때 쓰이거나 제 채팅에 색을 입히는 등 귀하다곤 할 수 없는 게 방송의 포인트.
그러나 이미 하우스라는 이름으로 포인트를 배팅한 시청자들은 그런 사소한 일 따위는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은 모양이다.
“케이티 양은 어째서 모험가가 되고 싶었나요?”
“으음, 자유로워 보여서? 어쩌면 어릴 적 읽었던 동화책 때문일지도.”
“동화책인가요? 하긴, 신전의 아이들도 동화책을 읽고 모험가가 되는 꿈을 꾸는 것 같아요. 자유로운 모험가가 되는 것과 멋진 기사님이 되는 것 중 어느 게 더 좋은지 싸우는 아이들도 많거든요.”
“기사님인가…. 군인들과 함께 훈련하는 장면을 보면 그닥 멋지다고는 말 못 할 텐데.”
화면 바깥의 시청자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아이린과 케이티. 아직은 어색해하는 그레이스와 달리 잘 달래주던 아이린은 대화의 물꼬를 제대로 튼 모양이다. 그렇게 시청자들의 수많은 응원을 힘입어, 우리는 격납고로 돌아가 자이언트 웜을 유인해 처치하기로 했다.
※
마음 같아서는 망가진 골렘의 팔 따위라도 들고 다니고 싶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만두었다.
이미 꼬일 대로 꼬인 스토리인데 골렘 잔해 가지고 장난치다가 수리에 지장이라도 생기면 정말 귀찮을 것 같았으니까. 힘과 체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내가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밀어붙이겠지만, 골렘 수리는 전혀 다른 영역.
장난감 로봇의 빠져버린 팔다리도 힘으로 끼우면 박살이 나는데, 기어가 잔뜩 있는 섬세한 골렘 부품을 악력으로 고칠 순 없잖아.
“그래서, 이제 롤랑이 웜을 몰고 여기까지 오는 걸 계속 기다려야 하나?”
-겜 날로 먹지 말고 유인 방법이라도 좀 찾아봐라
-진짜 6★ 하나 뽑았다고 사골까지 우려먹네
-할 거 없으면 북부잼민이 호감작이나 해 두는거 어떰
-눈나 마망 잼민이라… 롤랑을 파파라고 부르면 일가족 아님?
-한세아가 눈치 없이 껴 있었네 알아서 빠져주자
그래도 지난번의 경험을 되살려 멀리 갈 필요 없이, 격납고와 이어진 외길 통로 근처에서 마력을 담은 고함을 내지르며 한세아의 방송을 구경했다. 어차피 나보다 빠른 놈들이다 보니 멀리까지 나가는 것보단 목소리에 마력을 듬뿍 담으면 되거든.
중급 모험가들이야 치이면 분쇄되어 죽는다지만, 나는 치이면 기분 나쁘게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질질 밀릴 뿐이니까.
마치 낚시를 할 때 물고기가 미끼를 무는 걸 기다리는 낚시꾼의 심정이 되어 커다란 통로 두세 개를 왔다 갔다 움직이며 아아악- 하고 고함을 지르길 한참.
‘…좀 더 멀리 나가봐야 하나?’
“이거, 근처에 뭐가 없나 본데? 통로 울리는 이건 일정하게 반복되는 걸 보니 롤랑 고함 같고, 진동은 하나도 안 느껴지잖아.”
-그러니까 웜 유인향이라도 만드시라구요 무7련아 ㅋㅋ
-근데 왜 이 사람은 가만히 앉아서 불만만 내뱉나요(진짜모름)
-할 거 없으면 빨리 북부잼민이랑 눈나 사이 중재라도 해라
-누가 골렘부터 찾으라고 칼 들고 협박함?
-롤랑 빠지니까 눈나 조용해졌자나 오디오 좀 신경써줘
“아, 진짜! 내가 나가봐야 자이언트 웜에 치여서 아침으로 리셋하고 마탑이랑 모험가 길드에 보고하러 다시 가는 엔딩이거든? …근데 갑자기 생각난 게 있는데.”
[한세아더롤랑등골브레이커님 5,000원 기부!]
생각이란 걸 하셨다니 근래 방송 중 가장 재미있는 농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