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5화 (135/175)

그런데 잠깐만, 이 시설이 무언가를 녹여 마력을 ‘흡수’ 하는 장소라면…?

기사형 골렘을 타고 자이언트 웜을 상대하는 케이티 웰즐리를 보며 ‘저거, 출력이 너무 강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아무리 보스전을 위한 기믹이라지만 자이언트 웜을 너무 간단히 상대하는 모습이었으니까.

아가리 지름이 4m, 몸길이가 15m쯤 되는 거대한 괴물이 발목을 휘감는데 그걸 후려쳐서 걷어내는 게 말이 되냐고. 물론 나도 가능한 일이긴 한데… 게이머를 위한 밸런스를 생각하면 명백히 이상하지.

자이언트 웜이 한 번에 수십 마리씩 몰려오는 것도 아니니, 한 마리의 자이언트 웜을 상대하는 데 적어도 두 대의 골렘이 필요한 게 ‘정석적인’ 플레이 아니었을까. 어쩐지 등 뒤에 부착한 바위 골렘의 마석이 이상하리만치 덜 소모되더라.

하지만 우리는 그 과정조차 생략되어 버린 것이다.

 “화, 확실히 어제보다 몸이 무거운 것 같습니다….”

길드에 30층의 위험을 제보한 뒤 또 다른 자이언트 웜을 찾아 나서기 전, 다시 골렘에 탑승한 케이티가 허탈하면서도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한다. 마력으로 융해해 흡수하는 장소라 해서 혹시나 했더니 진짜였나.

아무래도 감히 돈으로 가치를 측정할 수 없는 왕국의 하사품이자 북부의 보물은 일회용 강화석이 되어 골렘에 먹혀버린 것 같았다.

 “서, 설마 내가 어제 골렘에 타서…? 진짜로…?”

정신적 충격이 큰지 케이든의 말투와 케이티의 말투가 뒤죽박죽으로 섞여버린 그녀. 그 애처로운 모습에 샤를롯조차 할 말을 잃었다. 탑에서 발견된 골렘이 가문의 보물을 녹여버릴 거라곤 모험가도 마법사도 꿈에도 모를 수밖에 없으니까.

온갖 헛소문만 남기고 사라진 북부의 공녀가 탑에서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으로 거대 골렘을 조종하고 있으니 사교계에 익숙한 샤를롯도 표정 관리가 잘 안 되나 보네.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해.”

 “…어떤 게?”

 “수리 중인 마법 갑옷이라도 입고 왔으면 그것도 그대로 고물이 되었을 테니까.”

 “……히엑.”

골렘 주제에 입은 고급이라고 해야 할까? 등 뒤에 부착된 양산형 마석보다는 왕국의 보물에 담긴 최고급 마력을 쪼옥 빨아먹은 기사형 골렘. 심지어 그 효능도 하루밖에 가지 않는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효율이란 말인가.

-메모…골렘을 탈 땐…아티팩트를…해제해주세요…

-동료의 별이 너무 높아서 일어지는 사건 사고라니 참 ㅋㅋ

-이것도 어떻게 보면 기?만이 아닐까?

-정보)자이언트웜을혼자사냥하려면태생4★동료에게왕국의보물마도구를 착용시키면 된다

-근데 설정대로면 자이언트 웜이 아니라 웜 일가친척들을 싹 다 잡아와도 적자 아니냐

상황을 파악한 시청자들도 낄낄 웃으며 케이티를 놀리듯 채팅을 치지만 그 수위는 한세아를 놀릴 때보다 한없이 낮다. 되려 시무룩해 하는 미녀의 모습에 기뻐하는 놈들도 꽤 있고. 역시 한세아를 갈구는 일에만 진심인 녀석들이야.

그렇게 케이티와 채팅창을 번갈아 보고 있으니 한세아와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샤를롯이 내게 다가온다.

 “그래서, 이제는 어쩌실 건가요?”

 “다른 모험가들을 위해서라도 자이언트 웜을 소탕해야겠지. 이건 원정대가 와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까. 자이언트 웜을 잡으면 저 골렘들도 고칠 수 있을 것 같고.”

 “하긴, 대형 종 몬스터가 다수 등장했다면 중급 모험가들로 해결될 일은 아니죠.”

샤를롯의 말대로였다. 소형 몬스터와 중형 몬스터는 커봐야 동물에 비유할 수준이지만, 대형부터는 전차 따위에 비교해야 하는 극심한 차이가 있었으니까.

모험가와 기사의 단계를 구분할 때 초급과 중급은 숙련도와 지식 정도의 차이지만, 상급부터는 마력을 다루고 외부로 발현하냐 못하냐의 기점이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기준이 잘 정해진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 초급 모험가가 어찌어찌 중형 몬스터는 사냥할 수 있다 해도, 중급 모험가는 대형 몬스터를 사냥할 수 없다. 격투기 챔피언에게 달려오는 지하철과 싸우라 하면 그건 결투가 아니라 교통사고잖아.

 “그래도 경고는 해 놔야겠는데. 30층 안전지대에도 마탑의 연구실이 있나?”

 “당연히 있죠. 동굴이라는 특이한 환경을 마법사들이 그냥 놔둘 리 없잖아요.”

 “그러면 함께 이동해서 길드와 마탑에 보고를 좀 해야겠어.”

연구자로서의 샤를롯은 믿음직하지만, 모험가로서의 샤를롯은 아직 30층에 올 수준은 안 되니 함께 다녀야지. 더군다나 바깥에는 장님뱀 대신 몇 마리나 될지 모르는 자이언트 웜이 돌아다니는 상황.

마음 같아서는 저 기사형 골렘을 바깥으로 꺼내고 싶지만, 덩치가 워낙 큰지라 기어가다 통로 중간에 갑옷이 턱 걸려서 껴버릴 것 같이 생겼다. 나중에 30층의 스토리가 끝나고 마탑이 게이트를 만들러 와서 분해하고 해체해서 들고 나가면 몰라, 내가 들고 나가겠다고 부쉈다간 초보자가 망가트린 프라모델 같은 꼴이 되겠지.

이런 쪽에서 보면 비비게임즈가 게임은 참 잘 만들었단 말이지.

 “그럼, 다들 안전지대로 향하자.”

 “마리가 이정표를 가지고 있으니 앞장서면 되겠네.”

 “예, 아가씨.”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로 골렘에서 내린 케이티와 갑자기 여자가 되어버린 것에 어색함을 느낀 그레이스와 아이린, 케이티가 혼자 자이언트 웜을 잡았다는 이유로 시청자에게 욕을 무더기로 얻어먹는 한세아까지 다시 공터에 모여 안전지대로 향했다.

 “확실히, 녀석들이 돌아다니긴 하나 봐요.”

 “몇 명 더 죽었겠는데.”

생각보다 가까운 안전지대로 향하는 길. 그레이스와 메이드 마리가 앞장서며 자이언트 웜이 들어올 수 없는 좁은 통로를 최대한 이용해서 이동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몇 번이고 느껴지는 진동과 귓가에 울려 퍼지는 드드드득- 하는 소음.

역시나 자이언트 웜이 한 마리가 아니었다는 걸 증명하듯 고요해야 할 30층의 동굴은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일일이 유인하기엔 너무 비효율적이지 않나? 유인할 방법이 있으면 좋겠는데.”

-RPG적으로 생각하면 신호기? 유인향?

-늑대유인향은 있는데 웜유인향은 없음? 연금술 뒀다 스튜끓이지 말고 찾아봐

-아니 머 미래시 때문에 방송보는데 미래가 뒤틀려있음 나비효과야 머야

-미래시(내 미래 아님)

-이쯤되면 한세아가 책임지고 공략본 작성해야한다고 봄

다행인 점은 일행에 도적과 궁수와 미니맵 보는 플레이어까지 있어 자이언트 웜과 만나는 일 없이 안전지대까지 손쉽게 도착했다는 점.

숲의 안전지대는 넘쳐나는 통나무를 이용해 만들어진 나무 요새였다면, 이곳은 내가 살짝 웅크려야 들어올 수 있는 낮은 통로 너머에 있는 커다란 텐트촌이었다. 입구가 이렇게 좁으면 건축용 자재를 옮기는 게 거의 불가능할 테니 실험용 도구만 옮겨 온 건가.

하기야 탑의 내부인 데다 동굴이니 비바람을 막아야 할 이유도 없다. 까놓고 말해서 텐트조차 없어도 될 상황이긴 하지.

 “음? 무슨 일이십니까?”

 “마탑에 연락할 게 있어서.”

대놓고 메이드의 시중을 받는 샤를롯이 앞장을 선 상태라 그런지 곧바로 경계를 거두는 안전지대의 경비병들. 하기야 일행 중 남자는 나 한 명. 지팡이를 든 미녀 마법사 두 명에, 메이드 복 차림의 미녀와 수녀복을 입은 미녀까지 있으니 경계를 하는 것도 이상하려나.

샤를롯의 간이 연구실은 20층에 있지만 같은 마탑의 지부라 익숙하다는 듯 어느 텐트로 향하는 그녀.

20층에 통신용 마도구가 있는 오두막이 있듯이, 30층에도 통신용 마도구가 있는 텐트가 있는 모양. 어쩐지 익숙한 모양새로 텐트 앞 의자에 앉아 커다란 책을 읽고 있는 마법사가 고개를 들어 우리를 의아하다는 듯 바라본다.

 “모험…가?”

 “30층의 이변을 조사하러 나온 마탑의 샤를롯 캐번디시입니다.”

 “아, 그렇군요. 마탑에 보고를 하기 위해 오셨나요?”

웬 메이드를 데리고 다니는 모험가가 있냐는 듯 의아하게 바라보던 통신 담당 마법사가 귀족 마법사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마법사야 기행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들이고, 모험가의 도시에 있는 귀족은 한술 더 뜨는 놈들이니까.

그렇게 요상한 방식으로 납득을 한 담당자와 샤를롯이 텐트 안으로 향하자 할 일 없이 바깥에 남게 된 우리. 일행들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당연하게도 그 원인은 남장이 강제로 벗겨진 케이티 웰즐리 때문. 화전민 마을 출신의 소녀와 신전에서 나고 자라 고아들을 돌보던 수녀님에게 북부 대공의 딸이라는 직책은 조금 무겁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거기에 플레이어인 한세아도 당연히 시골에서 마차 타고 상경한 재능 넘치는 평민이라는 설정이고, 나도 근본 없이 이 세상에 뚝 떨어진지라 귀족 인맥은 있어도 내가 귀족인 건 아니다. 여러모로 케이티 웰즐리라는 사람이 일행 중에선 홀로 붕 떠 있는 상황.

 “아, 저기, 케이티 양은… 북부에서 오신 거죠?”

 “네. 모험가가 되고 싶어서 탑을 오르기 위해 이곳으로 왔습니다.”

그래도 망가진 마도구를 손에 쥔 채 울먹거리는 애 같은 모습 덕분에 아이린은 케이티를 챙겨주려는 듯 말을 걸어주고 있었다. 다만 그레이스는 화들짝 놀라서는 내 옆에… 이건 그냥 케이티 핑계 대고 다가온 건가.

 “롤랑, 롤랑은 알고 있었어?”

 “그전에는 몰랐고, 숲에서 알게 되었어. 북부 대공이 갑자기 대화하자고 불러냈거든.”

 “그래? 대공님은 알고 있던 거야?”

 “딸을 꽤 아끼시는지 가출 사실을 알면서도 봐 준 느낌이더라고. 물론 저 마도구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공녀님이 저렇게까지 우울해하는 건 좀 신기하네. 많이 비싼 물건인가 봐?”

마도구에 대해 잘 모르는 그레이스의 말에 웃음이 비죽 새어 나왔다. 드래곤과 관련된 전승이 있다고 하니 그냥 과장이 심한 골동품 정도라고 생각하나 보네. 그레이스의 놀란 얼굴을 보고 싶어 목소리를 낮추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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