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4화 (134/175)

 “…저 아가씨는 혹시, 북부에서 오신 분인가요? 원래 있던 용병 검사는 어디 가고 저분이 파티에 계신 거예요?”

…그러고 보니 케이티, 아직 마도구 못 고쳤구나. 그리고 샤를롯은 귀족가의 영애로서 기초적인 상식과 예절을 배운 상태. 귀티 나는 외모, 은발 벽안, 기다란 한손검을 보면 대충 어느 가문인지 알아차릴 수 있나 보네.

샤를롯 캐번디시는 귀족이다.

푸른 피니 고귀한 아가씨니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녀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교양과 상식을 배웠으며, 스스로 선택해 마법의 길을 걸을 정도로 머리가 명석하고 재능이 뛰어나다. 그런 그녀가 대공의 딸을 몰라볼 리 없지.

한세아가 시청자들의 훈수를 들으며 김석현의 방송을 찾아 들어가는 동안, 샤를롯은 무언가 심각해진 표정으로 내 곁에 달라붙어 속닥속닥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이야기의 주제는 당연하게도 우리 북부 잼민… 북부 대공의 딸이자 검의 공녀인 케이티 웰즐리.

 “수도의 사교계에는 그런 소문들이 있었어요.”

 “뭔가요?”

 “북부 대공에게는 두 딸이 있는데, 언니는 기사로서 활동하지만, 동생은 성년식을 기점으로 자취를 감췄거든요. 그래서 저주에 걸렸다느니, 너무나 뛰어난 재능을 시기한 언니가 제거했다느니 하는 온갖 소문들이요.”

 “…그런 건 전혀 아니긴 한데.”

내 대답에 다시 한번 샤를롯의 시선이 케이티에게 향한다. 작동을 정지한 기사형 골렘 앞에서 아쉬워하다가, 자신의 기다란 은빛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 고장이 난 마도구를 떠올리고 다시 우울해지는 모습.

샤를롯의 눈매가 뭐라고 해야 할까, 사르르 녹아내리듯 누그러지며 오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케이티의 외형이 늘씬하고 성숙한 미녀라지만 속 알맹이는 철부지 소녀라는 걸 사교계에서 단련된 안목으로 곧바로 파악해 버린 걸까.

 “그래 보이네요. 무슨 상황인지 이야기를 좀 들을 수 있을까요?”

 “본인에게 허락을 맡고, 탑에서 나가면 다 이야기를 해 줄 테니까 저기 골렘 정비소부터 살펴보는 게 어떨까. 귀족 아가씨의 뒷사정을 내 마음대로 떠벌릴 생각은 없거든.”

 “어머? 저렇게 대놓고 드러났는데도 말 못 할 일인가요?”

 “…북부 대공이랑도 엮여 있는 이야기거든.”

내 말에 무언가 심각한 상황이라도 상상했는지 다시 미간이 구겨지는 샤를롯. 사실 철부지 딸이 가문의 보물을 훔쳐 가출했고, 딸바보 북부 대공은 그런 딸내미가 걱정되어서 얼굴만 보고 돌아갔다는 말을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케이티를 위해서가 아니라 북부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오늘 이야기를 좀 맞춰 놔야겠는걸. 기억에도 없는데 갑자기 등장한 북부 대공과 척을 지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알겠어요. 당신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무언가 사정이 있겠죠.”

 “그래, 이해해 줘서 고마워.”

그 사정이란 게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 창피한 문제라는 사소한 오해가 있지만, 아무튼 샤를롯은 자신의 메이드와 함께 격납고 내부로 쏙 들어갔다. 지금 탐색해야 하는 건 생명체의 기척이 아닌 파이프와 마력 탱크 등 시설과 관련된 일이니 메이드 마리의 도적 스킬이 유용하게 쓰이겠지.

기계 팔이 잔뜩 있는 곳으로 번잡하게 따라 들어갈 필요는 없을 것 같으니 격납고의 다른 칸에도 패널이 있는지 찾아볼까.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니 마침 한세아가 허공을 향해 열심히 고개를 꾸벅이고 있었다.

곁을 지나치는 그레이스와 아이린이 별다른 반응이 없는 걸 봐선 김석현이라는 방송인과 1:1 대화라도 하나 보네.

 “아, 석현 님 진짜 감사합니다. 갑자기 퀘스트 창이 갱신되어서 읽는 도중 등 뒤에서 달려온 웜에게 치였다구요? 그 혹시, 퀘스트 내용을 좀….”

김석현 또한 한세아의 방송을 미래시 삼아 달리는 중이었기에 별다른 저항감 없이 자신의 퀘스트 창을 보여 주는 듯하다. 슬쩍 한세아의 방송 창을 보니 카메라에는 그레이스와 아이린이 아닌 시커먼 남자들을 보여 주고 있었거든.

이야기를 들어보니 김석현은 실력에 비해 운이 좀 없는 모양이다. 아니, 4★ 동료가 하나 더 늘어 총 4명이니 운이 없다고 하긴 좀 그런가.

한세아의 방송에 비친 김석현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김석현에게는 전투 훈련을 시키고 페이스를 조절시키는 나, 롤랑 같은 선배 모험가가 없다. 거기에 동료들은 전부 4★으로 기본적인 모험가로서의 경력이 있는 상황. 따라서 한세아처럼 동굴에 익숙해지기 위해 시간을 보내는 일 따위 없이 그저 쭉쭉 올라왔다고 한다.

심지어 한세아를 따라잡기 위해 골렘의 마석조차 두어 개 정도만 파밍하고 올라온 30층. 그렇게 30층에 진입한 지 10분 만에 퀘스트 창이 갱신되었고, 갱신된 시스템을 읽기 위해 잠시 통로에 멈춰 선 순간―

[햄버그스테이크엔역시김서켠님 10,000원 기부!]

[자이언트 웜에 치여서 검게 변하는 방송 화면.GIF]

대충 피할 샛길도 없는 통로에 서서 퀘스트창 읽다가 갈렸다는 뜻

-30층 오자마자 갱신되고 죽었으니 이득인가 손해인가

-한세아 퀘스트 꼬인 거 보면 오히려 좋을지도 모름

-ㄹㅇ ㅋㅋ 금수박사 한세아가 50만원 손해임

-저 클립 하나로 도네가 백만 단위니까 개이득이지 ㅋㅋㅋ

-ㄹㅇ 한세아 도네 빼도 존나 터지긴 했음

콰앙-!

기사형 골렘에 탑승해서 막아야 하는 자이언트 웜의 돌진은 고작해야 탱커 플레이어가 막아 세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퀘스트 로그를 읽다 말고 죽어버려서, 아침으로 회귀한 김석현의 모습이 담긴 영상 도네이션이 재생된다.

그래도 날짜가 아침으로 되돌아가고 NPC들의 기억이 사라지는 거지, 플레이어가 얻은 퀘스트 로그까지 날아가는 건 아니었나 보다.

[동굴에 서식하는 장님뱀은 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데, 이건 무엇일까?]

[모험가들이 말하길, 녀석이 분명 지나갔는데 다른 방향에서 돌진해 왔다고도 한다]

[놈들의 모습이 마치 무언가를 맹렬히 찾아다니는 것 같은데…?]

그 덕에 시청자들과 한세아, 거기에 김석현까지 머리를 맞대고 내놓은 결론.

 “야, 놈들? 이거 자이언트 웜이 여러 마리야…? 그래서 골렘이 네 개나 있던 거고? 환장하겠네! 진짜.”

-유인해서 잡는게 아니라 뭔 둥지가 있나본데?

-동굴+미궁+사막임? 30층 다 뒤져보게 생겼네 쉬벌;;

-나 이제 20층인데 방송 보니까 걍 숲에 오두막 짓고 살고싶어짐

-와캬퍄 포인트 좆될뻔했는데 이게살아나네개꿀띠

[관리자에 의해 삭제된 채팅입니다]

포인트를 건 시청자들에겐 다행스럽게도, 자이언트 웜은 보스 몬스터가 아니었다. 거기에 멍하니 서 있는 한세아에게 다가와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곧바로 말해주는 샤를롯까지.

 “그 자이언트 웜의 시체가 어디로 갔는지 알 것 같네요.”

 “네? 정말인가요 샤를롯 양?”

 “이 공터, 넓어 보이지만 벽면과 바닥에 마력 회로가 빼곡하게 차 있다는 건 느끼셨을 거예요.”

 “아, 네, 그렇죠…, 마력 회로.”

지팡이 들고 마력을 움직이는 척, 스킬 캔슬만 반복하던 야매 마법사 한세아와 달리 샤를롯 캐번디시는 마탑의 연구자 중 한 명이다. 그 때문에 이 장소에 흥미를 느꼈는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설명을 시작한다.

한세아의 반응이 누가 봐도 마력 회로에 대해 생각조차 못 한 모습이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이어지는 그녀의 설명.

 “이 장소는 일종의 용광로, 아니면 소각로라고 볼 수 있어요. 달리 표현하자면 마력 정제 시설이라고 불러도 좋겠네요. 저 커다란 골렘을 운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터가 아니었던 거죠.”

근데 어째 설명을 들어도 좀 복잡해서 어지러운데…?

나만 머리가 나쁜 게 아닌지, 일행들 또한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샤를롯을 바라보았다.

다행스럽게도 30층에 사막까지 등장하는 일은 없었다. 땅을 파고 다니는 능력이 없는 자이언트 웜들은 애초부터 미궁을 돌아다니는 몬스터였으니까. 굳이 따지자면 자이언트 웜 아종, 아니면 변종 뭐 그렇게 부를 수 있겠지.

요컨대 자이언트 웜은 사막이 아니라 골렘과 같이 넘어온 몬스터였다. 거기에 시체가 마석으로 변하지 않는 원인까지는 밝혀내지 못했지만, 시체가 어디로 갔는지는 샤를롯이 알아냈고.

 “그러니까 여기가 몬스터의 시체를 액화 마력으로 바꾸는 공장이라는 거지? 내가 두고 간 자이언트 웜 시체도 마력으로 변해서 흡수된 거고.”

-샤를롯 말이 맞는 듯 다시보기 보면 어제보다 그림이 차 있음

-그르네 모니터 보면 5분의 1쯤에서 4분의 1쯤으로 미세하게 늘었다

-하다하다 시체도 긴빠이당하는 한세아…

-이렇게 짠하면 짠해좌도 세 줄 컨셉을 버리겠다

-아니 그래서 보스몬스터가 누구냐고 대체;;

자이언트 웜과 기사형 골렘의 적대적 관계는 이쪽 세상에 넘어오기 전부터 있던 모양이다. 우리에게 열쇠를 주고 사라진 황금 골렘이 맞서 싸우던 상대일지도 모르지.

자이언트 웜이 제 주둥이를 반쯤 으깨둔 나 대신, 처음 보는 기사형 골렘에게 미친 듯이 달려들었던 이유를 알 것 같네. 동족의 시체를 갈아서 연료로 사용하는 골렘이니 대형종 특유의 감각으로 알아차릴 수밖에.

샤를롯의 반복되는 친절한 설명 덕분에 겨우 감을 잡은 한세아가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며 퀘스트를 정리한다.

 “30층에 와서, 자이언트 웜에게 쫓기다가, 웜에 대한 힌트를 얻고, 기사형 골렘을 발견해서, 웜을 한 마리 사냥한 다음 앞에서 얻었던 힌트를 기반으로 웜을 분해해서 골렘을 수리해야 하는 거였구나?”

-순서대로 따지면 1단계 다음 4단계를 진행하셨네여

-2번 3번 퀘스트 로그가 없으니까 이지랄이 나는거였구나

[관리자에 의해 삭제된 채팅입니다]

-그래서 메카 4인방을 몰고 나가서 보스 다구리 놓는거임?

-기사형 골렘 하나로 사냥하는 게 맞긴 함? 그거 포함하면 훨씬 더 많이 건너뛴 듯?

 “일단 롤랑한테 부탁해서 웜을 싹 다 끌어와서, 마력 탱크를 가득 채우면 되려나? …근데 이걸 언니들한텐 어떻게 설명해야 하냐. 샤를롯 양의 말을 들으니 짐작 가는 게 있다고 돌려서 말하면 대충 들어주겠지?”

물론 거기까지 알아냈다 해도 문제는 남아 있었다. 자이언트 웜이 사실 기사형 골렘의 배터리 재료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진짜 보스 몬스터는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는 상태.

내 쪽을 약간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는 한세아. 자이언트 웜을 가지고 바이오 에너지 드립을 치는 녀석이 있어 웃음을 꾹 참고 시선을 마주하자 멋쩍게 웃는다. 퀘스트가 한 번 꼬여버린 이상, 남은 자이언트 웜을 유인해 오는 건 결국 내 몫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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